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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6일 주일
[(녹) 연중 제6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6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곳곳에서 주님께 탄원하는 가난한 이들과 박해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시어, 분열을 일으키는 폭력과 이기심의 멍에를 벗겨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여 새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어, 물가에 심긴 나무 같아 가문 해에도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덧없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다고 하시며, 부유한 사람들은 이미 위로를 받았으니 불행하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2.16-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이른바 평지 설교의 시작입니다. 이 본문에서 대조되는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은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습니다. 전반부의 행복 선언은 마태오 복음서 5장의 참행복 선언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 이인칭으로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불행 선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불행 선언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유함과 즐거움은 바랄 것이 못 되고 오직 내세에만 희망을 두라는 식의 해석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난과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됩니다. ‘사목 헌장’은 “사회 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26항)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선포하는 구원은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전인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아우릅니다. 행복과 불행의 궁극적인 기준은 바로 하느님 나라, 사람의 아들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오직 영원한 행복이신 하느님께만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합니다. 지금 배부르고 부유하고 웃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지 않기에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도 자기들이 가진 것을 나누면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현세에서 끝나는 가치들을 하느님 자리에 둘 때 참행복은 없습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사소한 일에 핏대까지 올리며 아등바등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우리네 인생 안에서 하루하루 가급적 만족하고 살려고 노력하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간의 삶, 뭐 그리 대단히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올라가 봐야 그 끝에 대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억을 모아봐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공동체를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8천원짜리 순대국밥 한 그릇을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행복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을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죄인이고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비참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언제나 굳건히 내 안에 자리하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깊이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부끄럽더라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뱀이 길을 가다가 ‘톱’에 약간 상처를 입었습니다. 화가 난 뱀은 톱을 노려보다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입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뱀은 톱을 몸으로 칭칭 감았습니다. 톱이 숨을 멎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뱀은 톱에 몸이 잘려 죽고 말았습니다.” 뱀이 참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만일 뱀이 처음 상처를 받아들이고 톱을 무시했다면 입에 상처를 입지 않았을 겁니다. 입에 상처를 입었어도 톱을 무시했다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뱀만 그럴까요? 저도 어릴 때 뱀처럼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와 장난하다가 친구가 저의 공책을 찢었습니다. 화가 난 저는 친구의 책을 찢었습니다. 친구도 화가 나서 제 연필을 부러트렸습니다. 저도 화가 나서 친구의 가방을 찢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아셨고, 친구와 저는 무척 혼이 났습니다. 그냥 공책이 찢어진 걸 무시하고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 연필이 부러지는 일도, 책이 찢어지는 일도, 가방이 찢어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
장자는 화를 참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글을 남겨 주었습니다. 제목은 ‘빈 배’입니다.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다가와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일지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비키라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묻지 못하면, 다시 소리쳐 묻고 그래서 안되면 세 번 소리쳐 묻는다. 또 그래도 안 되면 나쁜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생의 강을 흐른다면 누가 해하겠는가.” 멀리 미국에 있지만 한국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뉴스는 연일 정치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시비가 가려질 겁니다. 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안정을 찾을 겁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저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는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듣고,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감정이 생기면 일이 복잡해지곤 합니다. 작은 상처를 무시할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폭풍우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신앙은 먼저 행하면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자라는 겁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서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고통과 슬픔은 먹구름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이 하늘의 태양을 없애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고통과 슬픔 뒤에 밝게 드러나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 고통,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할지라도, 성공했을지라도,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은 재물, 권력, 명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은 사랑, 헌신,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서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행복과 불행>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있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내가 없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을 없애면
나도 없으니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이 있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과 함께
나는 행복합니다
나 홀로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을 믿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만을 믿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을 바라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만을 바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만을 사랑하면
나는 불행합니다
내가
당신의 행복이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내가
나만의 행복이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이
나의 행복이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이
나의 불행이라면
나는 불행합니다
나 있음이
행복이요
나 없음이
불행일지니
당신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있고
당신을 없애면
나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율리아나 (Juliana)
활동년도 : +305년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니코메디아(Nicomedia)
같은 이름 :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 출신인 성녀 율리아나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의 쿠마에(Cumae)에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처음에는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모진 매를 맞았고, 그 다음에는 그녀와 결혼을 간절히 바라던 집정관 에빌라시우스(Evilasius)로부터 또 다른 고문을 받았다.
그 후 감옥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으로 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그녀의 수난기는 중세 시대에 널리 알려졌다.
성 오네시모 (Onesimus)
활동년도 : +1세기경
신분 : 바오로의 제자, 주교, 순교자
지역 : 에페수스(Ephesus)
같은 이름 : 오네시무스
필레몬에게 보낸 사도 바오로의 편지에 의하면(10절~18절), 오네시모는 프리지아의 골로사이에서 살던 필레몬의 노예였다.
그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당시에 바오로를 만났고, 세례를 받았으며, 사도 바오로의 영적 아들이 되었다.
또한 바오로는 그를 필레몬에게 되돌려 보내면서,오네시모는 이제 노예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주도록 요청한다.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말한 그대로 자신도 행동했고, 또 "성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서" 인정하였다(골로사이 4:7~9).
성 예로니모에 의하면, 그후 오네시모는 말씀의 설교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교까지 되었으며, 로마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여 로마 순교록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복자 그레고리오 10세(Gregory X)
활동년도 : 1210-1276년
신분 : 교황
지역
같은 이름 :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테오발두스 비스콘티(Theobaldus Visconti)는 피아첸차(Piacenza)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 파리(Paris)와 리에주(Liege)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후 리에주에서 부제가 되었다. 그는 오토보니(Ottoboni) 추기경을 수행하여 영국 선교 길에 오른 적도 있고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직 사제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6명의 추기경 위원회에 의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어 약간의 물의가 일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Roma)로 와서 1272년 3월 19일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3월 27일에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또는 그레고리오)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는 1274년에 리옹(Lyon) 공의회를 소집하여 동방 교회와 로마간의 화합을 꾀했으나 십자군으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공의회가 끝난 후 그는 스위스의 로잔(Lausanne), 이탈리아의 밀라노(Milano), 피렌체(Firenze), 아레초(Arezzo)까지 여행했으나 1276년 1월 10일 아레초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71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로마 순교록에 등재되었다.
복녀 필립바 마레리아(Phillippa Mareria)
활동년도 : +1236년
신분 : 동정녀
지역
같은 이름 : 마레리, 필리바, 필리빠, 필리파, 필립빠, 필립파
성녀 필립바는 리에띠의 지꼴리 태생인데, 그녀의 집안은 아브루찌의 주요 지주 가문이다.
그의 부모는 신심이 깊은 부부인지라, 인근 지방에 설교하러 오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자기 집으로 모신 적이 있다.
이때부터 필립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전히 본받으려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들이 그녀의 결혼을 서두르자, 필립바는 삭발을 한 후 보기 흉한 옷을 입고는 몸을 숨겨버렸다.
이윽고 그녀는 집을 나와서 마레리오산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거룩한 어느 프란치스칸의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저 유명한 또디의 로제르 수사이다. 그녀는 성녀 클라라의 규칙을 채택하였고, 필립비가 원장이 되어 많은 동료들을 지도하였다.
철저한 가난생활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1236년, 그녀는 중병에 걸린 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