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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7일 목요일
[(녹)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나렉의 성 그레고리오 아빠스 학자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말고, 하루하루 늦추려 하지 말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마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5,1-8
1 재산을 믿지 말고 “넉넉하다.”고 말하지 마라.
2 너 자신과 네 힘을 붙좇지 말고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마라.
3 “누가 나를 억누르리오?” 하고 말하지 마라. 주님께서 기필코 징벌하시리라.
4 “죄를 지었어도 내게 아무 일도 없었지 않은가?” 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기 때문이다.
5 속죄를 과신하지 마라. 죄에 죄를 쌓을 뿐이다.
6 “그분의 인자함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받으리라.”고 말하지 마라.
정녕 자비도 분노도 다 그분께 있고 그분의 진노가 죄인들 위에 머무르리라.
7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말고 하루하루 늦추려 하지 마라.
정녕 주님의 분노가 갑자기 들이닥쳐 너는 징벌의 날에 완전히 망하리라.
8 부정한 재산을 믿지 마라. 정녕 재난의 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1-5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4)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6)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작은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이 두드러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큰 사랑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며 작은 이를 죄짓게 한 사람은 혹독한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이 내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였다가는 세상에 성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뜻은 그만큼 죄를 두려워하라는 것이고 육신의 지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죄를 부추기는 원인들, 곧 탐욕, 허영, 교만, 이기심 등을 잘라 내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떤 교부는 시각(視覺)의 마차에 올라탄 우리의 생각을 하느님 사랑을 향하여 몰고 가야 한다고, 육적인 시선을 마음의 판단에 복종시키라고 권고합니다.
다른 모든 감각보다도 특히 시각은 범죄 영상물까지 포함하여 온갖 종류의 영상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각별히 절제해야 할 감각입니다. 절제의 덕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식별력을 길러 줍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절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시궁창과 그 얼룩을 잘 알지만 죄악에 빠진 사람은 자기 병세의 심각성조차 깨닫지 못하고 시궁창에서도 향유 냄새가 나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오늘 독서인 집회서가 경고하듯 눈앞의 현실에 몰두하여 주님의 자비와 인내를 과신하거나 남용하지 말고 죄의 무서움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지켜 주는 절제 안에서 서로 평화롭게 지내려면 마음에 소금을 간직해야 하는데,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 소금이 바로 하느님 말씀의 지혜라고 말합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나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 9,43-44)
너무나 강경한 예수님의 말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때로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돈보스코의 제자 가운데 도미니코 사비오란 성덕이 출중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와서 돈보스코가 제시한 성덕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고 있던 중 안타깝게도 중병을 얻어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오래가지 않아 교회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여기 그가 짧은 생애 동안이지만 생명처럼 지켜왔던 모토가 있었습니다.
“죄보다는 죽음을!”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성서 말씀에서 저는 두 가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라는 단순한 보장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조건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형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정의롭지 못하게 살거나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형통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학생 때 배운 ‘가정법’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예문이 있습니다.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는 일마다 잘 될 수 있으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조건을 잘 따르고 지켜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필요한 조건만 채워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충분한 조건까지 채워져야 합니다. 세례는 구원의 필요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받은 신앙인으로서 주어지는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우리가 작은 행동 하나라도 선택할 때 그것이 결과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마실 물 한 잔’의 의미는 단순한 물 한 잔을 넘어섭니다. 이는 작은 사랑의 실천, 작은 친절이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마실 물 한 잔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작은 선행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미소 하나, 관심을 두는 태도도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만드는 씨앗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부자는 좋은 옷과 큰 집에 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지만, 집 앞에 있는 라자로라는 거지를 외면했습니다. 부자에게 라자로를 도와주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율법 학자에게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길에 강도당해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이 이방인이라면서 외면했습니다. 사제는 예배 시간이 급하다면서 외면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여관에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잘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주겠다고 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의 친척도,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구원은 사제나 레위라는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현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지금 당장 작은 행동을 통해 미래의 축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형통이 따르고, 우리가 베푸는 선행 하나하나가 하늘에서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을 들려주셨습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외롭고,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예수님께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외롭고, 아픈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예수님께 해 주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발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느니 한 발이라도 가지고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느니, 한 눈이라도 가지고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을 이웃에게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서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이다.”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그리스도의 사람을
품으니
그리스도의 사람이지요
참된 사람에게
참되니
참된 사람이지요
착한 사람에게
착하니
착한 사람이지요
바른 사람에게
바르니
바른 사람이지요
고운 사람에게
고우니
고운 사람이지요
따뜻한 사람에게
따뜻하니
따뜻한 사람이지요
부드러운 사람에게
부드러우니
부드러운 사람이지요
깨끗한 사람에게
깨끗하니
깨끗한 사람이지요
믿는 사람을
믿으니
믿는 사람이지요
희망하는 사람을
희망하니
희망하는 사람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니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그리스도의 사람을
품으니
그리스도의 사람이지요
오늘의 성인
성 가브리엘 포센티(Gabriel Possenti)
신분 : 수사, 신학생
활동연도 : 1838-1862년
같은이름 : 가별, 뽀센띠, 뽀센티
1831년 3월 1일 이탈리아의 아시시(Assisi)에서 법률가인 산테 포센티(Sante Possenti)의 13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난 성 가브리엘 포센티는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4살 때에 어머니를 잃고 큰누나 밑에서 자랐으나 그 누나가 콜레라로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부친이 스폴레토(Spoleto)의 세액 사정관으로 임명되자 그는 예수 고난회에 입회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매우 지성적이며 능력이 뛰어났고, 문학과 예술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깊은 신앙심과 성모님에 대한 신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높은 애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856년 9월 21일 마체라타(Macerata) 부근의 모로발레(Morovalle)에서 예수 고난회에 입회하여 수련자가 되었다. 그리고 1857년 9월 22일 첫 서약을 하면서 그에게는 '성모 통고의 가브리엘'(Gabriel a Virgine Perdolente)이라는 수도명이 주어졌다.
그는 이때부터 사소한 일에서도 완덕을 얻으려는 특별한 노력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의 밝은 성품, 기도 정신,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 규칙 엄수,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으려는 열망이 그의 모든 생활에서 빛을 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짧은 수도생활에도 불구하고 높은 완덕을 닦을 수 있었다.
1861년에 소품들을 받은 그는 대품을 받을 준비를 계속하였지만 6년 동안의 수도생활로 체력이 소진되어, 1862년 2월 27일 이탈리아 테라모(Teramo) 지방의 이솔라 델 그란 사소(Isola del Gran Sasso)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수도회가 이솔라 델 그란 사소에서 운영하는 피정의 집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지금까지 그곳에 남아 있다. 이후 그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성녀 젬마 갈가니(Gemma Galgani, 4월 11일)가 그에게 기도함으로써 치유된 일도 있었다.
그는 1908년 5월 31일 로마의 바티칸 대성전에서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로부터 시복되었고, 1920년 3월 13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성되었고, 아브르초(Abruzzo) 지방의 수호성인이며, 청소년, 특히 수련자와 신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가톨릭 활동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안나 린 (Anne Line)
활동년도 : +1601년
신분 : 과부,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성녀 안나 린(Anna Line)은 에식스(Essex) 지방 던모우(Dunmow)의 신사이자 강력한 프로테스탄트였던 윌리엄 헤이그햄(William Heigham)의 딸인데, 그녀의 아버지는 안나가 가톨릭 신자인 로저 린(Roger Line)과 결혼하자 상속권을 박탈하였다.
그런데 안나는 1594년에 과부가 되었고 건강조차 좋지 않아서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예수회원이던 요한 제라드(Joannes Gerard) 신부가 런던(London)에 성직자를 위한 요양원을 세웠을 때 성녀 안나가 그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요한 신부가 1597년 런던탑으로부터 탈주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성녀 안나 역시 당국의 눈을 피해 다니면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이 곧 발각되어 1601년 2월 2일 체포되었다.
성녀 안나는 그녀의 고해신부이던 예수회원 로제루스 필콕(Rogerus Filcock)과 마르코 바크워스(Marcus Barkworth) 신부 등과 함께 고난을 받다가 같은 해 2월 27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된 그녀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서 시성되었다.
성 발도메로 (Baldomerus)
활동년도 : +650년경
신분 : 차부제
지역 : 리옹(Lyon)
같은 이름 : 갈미엘, 발도메루스
갈미엘(Galmier)로도 불리는 성 발도메루스(또는 발도메로)는 리옹의 열쇠 장수로 매우 가난하지만 열심히 생활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하루의 수입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늘 가르치면서 생활하였다. 성 유스투스(Justus) 수도원의 원장인 비벤티우스(Viventius)는 그의 놀라운 신심과 성덕을 경탄해 마지않았으며, 그와 자주 독대하여 영적인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원장은 그에게 수도원의 독방 하나를 제공하여 전적으로 명상에 잠기는 생활을 하도록 배려하였다. 그는 하느님 사랑의 특별한 상징으로서 야생 조류들을 특별히 사랑하였고, “항상 하늘의 주님을 찬미하여라.”고 말하곤 하였다. 주교로 부터 차부제품을 받은 그는 열쇠 장수들의 수호성인이며, 그의 문장은 집게와 다른 상용 기구들이다.
성 레안데르 (Leander)
활동년도 : 534-600년
신분 : 주교
지역 : 세비야(Sevilla)
같은 이름 : 레안델, 레안드로
성 풀겐티우스(Fulgentius, 1월 16일), 성 이시도루스(Isidorus, 4월 4일) 그리고 성녀 플로렌티나(Florentina, 6월 20일)와 형제지간인 성 레안데르는 카르타고(Carthago) 출신이나 에스파냐의 세비야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면서부터 에스파냐에 있던 아리우스파(Arianism)와 싸웠고, 583년에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를 만났으며, 584년에 세비야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국왕으로부터 추방되자 유배지에서 아리우스파(Arianism)를 반대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주로 아리우스 이단에 빠진 주교들의 회개사업에 헌신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589년의 톨레도(Toledo) 교회 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는 에스파냐 전례의 개혁자로 유명하고, 수녀들을 위한 규칙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에스파냐 교회에서 교회학자로 공경을 받는다. 그는 레안드로(Leandro)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