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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3일 월요일
[(녹)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와 하느님의 심판을 깨달아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17,24-29
하느님께서는 24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인내심을 잃어버린 자들은 위로하신다.
25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 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
26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너는 그분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을 혐오하여라.
27 살아서 감사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누가 저승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찬미를 드리겠느냐?
28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이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리라.
29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마르 10,17)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분을 특별한 분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유다인들은 ‘선하다’는 낱말을 모든 선의 절대 근원이신 하느님께만 붙였습니다. 부자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그 답을 선하신 예수님께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나 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에게 십계명 가운데 ‘하느님 사랑’에 해당하는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그가 이 계명들을 충실히 지켜 왔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부자에게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부자는 “울상이 되어”(10,22)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울상이 되어’는 ‘충격을 받고’ 또는 ‘소스라쳐 놀라’ 등으로 의역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에게 놀랍고도 충격적인 도전이 되고, 부자는 이 도전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포기합니다. 부자가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야 하듯이, 우리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도전을 받고는 합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사과해야 할 때도 있고, 자존심이 상해도 상대의 말을 일단 들어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그 도전이 너무 충격적이고 감당할 수 없을 때, 이웃 사랑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어떠한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으로 그 도전 앞에서 용기를 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10,27)라고 말씀하십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재물은 선행과 공덕을 쌓아 올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물과 관련해서 참으로 특별한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재물 운도 좋았겠지만, 백방으로 노력하고 노력해서 막대한 부를 축척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눈만 뜨면 돈돈! 입니다. 입만 열면 돈돈! 입니다. 돈 외에도 더 크고 의미 있는 가치들이 부지기수인데, 완전 무시합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엄청난 재물을 탑을 쌓아 올립니다.
그렇게 발버둥 치던 어느 순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제 나는 곧 떠나가게 되는데, 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저 재물들은 어떡하지? 재물이라는 것,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별것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목숨 걸었을까? 왜 좀 더 나누지 못했을까?”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 이제 나이가 80, 90, 100입니다. 나이를 먹으니 돈이 있어도 즐길 방법도 없습니다. 어느 순간 정신도 흐려지고 기력도 흐려집니다. 이제는 그에게 통장 잔고에 찍혀있는 막대한 재산도 하나의 숫자일뿐,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후손들은 어서 빨리 그의 목숨이 끊어지기만을 간절히 학수고대합니다.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 돈이 최고라고 외치고 다녔기에, 자녀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돈을 최우선 가치로 여길 것입니다. 다들 유산 가운데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몫을 챙길까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떠나가는 자신은 거들떠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쇠락해가며 흐려져만 가는 자신을 내팽개쳐놓고 다들 떠나갈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오늘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 말씀을 건네십니다. “애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 24-25)
부자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부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눌 줄 모르는 부자들입니다. 재물 좀 있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뻐기지만, 어려운 사람들과 단 한 푼 나눌 줄 모르는 수전노 같은 부자들을 향해 오늘 예수님께서 옐로우 카드를 내미신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서 축척한 부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유분에 대한 적극적이고 관대한 나눔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부자들을 향한 주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참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재물과 관련된 예수님의 경고 말씀 앞에 걱정을 넘어 기분이 나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모은 이 재산, 거저 얻은 줄 알아? 평생 등뼈 휘어지게, 정직하게 일해 온 난데. 남들 보다 곱절로 일하고, 남들 먹을 때 안 먹고, 남들 놀러 다닐 때 더 일하고, 아끼고 아껴서 모아 겨우 이제 부자 소리 듣는데,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화내실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잘 새겨들어보시면 정답이 즉시 나옵니다. 이 텍스트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부자는 바로 이런 부자입니다. ‘재물을 하느님 보다 상위에 두는 부자’, ‘돈에 눈이 먼 나머지 세상에 다른 의미 있는 가치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부자’, ‘돈이면 다라고 생각하는 부자’, ‘오로지 돈에 목숨을 거는 부자’, ‘죽으라고 모을 줄만 알았지 조금도 나누지 않는 부자’...
손에 쥐었다 하면 어느새 빠져나가는 것이 돈입니다. 잔뜩 있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 돈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임종의 순간이 오면 다 내려둬야 할 것이 돈입니다. 물론 인간다운 생활, 품위 있는 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재물에 최상위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물론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가고 싶은 곳 가게 만들고, 먹고 싶은 것 먹게 하고, 분위기 잡고, 사람노릇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돈으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이 모든 행복의 근원은 아닙니다. 돈이 최종적인 해결사는 아닙니다. 돈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재산이 악인의 손에 들어있으면 그것은 함정과 죽음으로 향하는 근원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산이 선인의 손에 들어있으면 그것은 선행과 공덕을 쌓아 올리는 수단이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보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끔 어떤 사람들은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아기 엄마가 아기에게 하는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어떤 엄마들은 개나 고양이들도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생명을 사랑하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보답받지 못하는 데 끝까지 무조건적 사랑이 가능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메데이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콜키스의 공주이자 강력한 마법의 재능을 지닌 인물로, 황금 양피지를 찾으려는 이아손에게 첫눈에 반하여 자신의 가문과 고향까지 등지면서까지 그를 도왔습니다. 이아손이 위험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온갖 마법과 책략을 제공하였고, 심지어 이아손이 양피지를 가지고 도망칠 수 있도록 본인의 오빠까지 해치며 뒤쫓는 이들을 따돌리기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감수하겠다는 메데이아의 마음이 그만큼 절대적이었던 것입니다. 둘은 함께 도망쳐 코린토스에 정착하였고, 결혼하여 자녀도 낳으며 한때 평온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아손은 정치적 이익과 권력을 위해 코린토스 왕의 딸과 새 혼인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메데이아가 받았던 상처는 매우 깊었습니다. 그동안 본인이 요구받았던 일들은 죄책감까지 감수하며 전부 들어주었지만, 막상 자신은 이아손에게서 약속에 걸맞은 보답이나 책임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힌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새로 맞으려던 신부와 그 아버지인 코린토스 왕에게 치명적인 독을 써서 죽게 만들고, 나아가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마저 해치는 극단적인 복수로 치달았습니다.
이처럼 한쪽이 모든 요구에 응하기만 하고 정작 상대는 거기에 걸맞은 보답을 하지 않을 때, 사랑은 커다란 비극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메데이아 이야기가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아기와 반려동물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까요? 아무리 반려동물이 사랑스러워도 그것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 아기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생존본능 우선이기 때문에 주인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국 주인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러나 자기 반려동물이 은근히 자기를 구해줄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느낄 때는 큰 실망을 합니다. 주면서 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기는 동물과는 다르게 자기가 받은 것을 반드시 되갚을 것이란 믿음을 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사랑도 하나의 투자입니다. 절대 자신은 해 주는 게 없는데 상대는 자신을 더 사랑해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계약입니다. 내가 주면 상대도 주어야 하고 사랑을 받으면 나도 주어야 합니다.
제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에게 돈이 필요할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면 다 주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체를 통해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저하다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느꼈습니다.
‘아! 내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건 아니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따를 제자들을 뽑을 때 배추를 거꾸로 심고 오라고 시켰다고 합니다. 자기를 버렸는지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계약입니다. 계약은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는 얼마만큼 줄 수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다 주시는 예수님께 나는 무엇을 드리며 그분께 은총을 청하는지도 살펴봅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는 열매 맺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고, 자선을 베풀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 신앙이 열매 맺기는 어렵습니다. 교우들과 ‘인공지능(AI) 시대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자매님이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류에게 해로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인공지능의 개발을 막거나, 규제를 강화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사라지는 것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우마차’는 사라졌습니다. 스마트 폰이 등장하면서 거리에 있던 공중전화가 사라졌습니다. 카세트테이프의 자리는 ‘CD’가 차지했습니다. ‘CD’의 자리는 ‘MP3’가 차지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유튜브’를 통해서 음악을 듣습니다. 검색의 시대가 열리면서 두꺼운 사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등장하면서 지도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독점하던 인공지능의 시대를 중국의 ‘딥 시크(Deep Seek)’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도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고,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과 신앙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세상에서는 첫째가 되기 위해 경쟁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애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과 섬김을 강조하시며,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속 이야기들을 떠올려 봅니다. 다윗은 형들보다 작고 힘없는 목동이었지만, 하느님께서 골리앗을 물리칠 용사로 선택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찬가에서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셨다.”라고 노래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논리와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던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 주변의 작은 이들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나 사회에서 ‘꼴찌’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태도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성공과 인정만을 좇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은 섬김과 겸손의 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높아지는 길은 다른 이들을 섬길 때 열립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과학과 자연의 원리에서도 발견됩니다. 물리학에서는 작은 미립자들이 거대한 물질의 근원이 되고, 생물학에서는 힘센 동물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 살아남습니다. 경제에서도 전통적인 대기업이 아니라, 작은 스타트업들이 혁신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도 결국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원리 안에서 ‘역전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은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과 다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를 탐하기보다 낮아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때,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를 첫째로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의 성인
성녀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Catherine Mary Drexel)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지역 : 미국(USA)
활동연도 : 1858-1955년
성녀 카타리나 마리아 드렉셀(Catharina Maria Drexel, 또는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은 1858년 11월 2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유복한 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자라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는 흑인과 토착 미국인인 인디언들의 물질적, 영성적 삶의 질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그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으나 이내 정말 필요하고 부족한 것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성녀 카타리나는 인디언과 유색인종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한 복된 성사의 수도회(Sisters of the Blessed Sacrament)를 설립하였다.
자신의 삶을 헌신하며 기금을 마련한 성녀 카타리나 원장은 1894년 뉴멕시코(New Mexico) 산타페(Santa Fe)에 인디언들을 위한 최초의 선교학교 개교식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미시시피(Mississippi) 강 서편의 인디언들을 위한 학교와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들을 위한 학교들도 개교하였다. 1915년에는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 미국 최초의 흑인들을 위한 대학인 사비에르(Xavier)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녀가 선종할 무렵에는 이미 미국 전역에서 500명이 넘는 수녀들이 63개의 학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988년 11월 2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2000년 10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논나 (Nonna)
신분 : 과부
활동연도 : +6세기경
같은이름 : 논니타 논니따
성녀 논나는 귀족 출신으로 웨일스(Wales)의 디버드(Dyfed)에서 태어난 듯하다.
그녀는 웨일스의 세인트 데이비드(오늘날의 지명) 교외 티 그윈(Ty Gwyn)의 어느 수도원에서 살다가 샌트(Sant)
라는 어느 족장에게 붙잡혀 가서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성 다윗(David, 3월 1일)이다.
그 후 그녀는 콘월(Cornwall)과 브르타뉴(Bretagne) 등지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논(Non) 또는 논니타(Nonnita)로도 불린다.
성녀 쿠네군다(Cunegundes)
신분 : 동정녀, 과부, 황후
활동연도 : 978-1033/1039년
같은이름 : 구네군다, 구네군데스, 구네군디스, 쿠네군데스, 쿠네군디스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또는 구네군다)는 룩셈부르크의 백작인 부친 지크프리트와 모친 헤드비그로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신심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공작인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와 결혼하였다. 이때 성 헨리쿠스는 동방의 어느 목수가 제작한 십자가를 선물했는데, 이것이 지금도 뮌헨에 보존되어 있다. 어느 전기작가는 그들 부부는 결혼식 날에 동정서원을 발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당시의 황제인 오토 3세가 서거하자 성 헨리쿠스는 바이에른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대관식은 마인츠(Mainz)에서 성 빌리지스(Willigis, 2월 23일)에 의하여 성대히 거행되었고, 이어 1013년에 그는 로마(Roma)로 가서 교황 베네딕투스 8세(Benedictus VIII)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았다.
그런데 결혼 첫날밤부터 서로 동정을 지키며 남매처럼 지내던 성녀 쿠네군다는 얼마 뒤에 중상자들의 희생물이 되었고, 남편마저 일시적이나마 아내를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확고히 항변해야 할 입장에 선 그녀는 불에 의한 시죄법(試罪法) 적용을 허용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성 헨리쿠스는 자신의 의혹을 풀고 마음으로 일치하여 살았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국내의 신앙 전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성녀 쿠네군다는 황제에게 청을 드려서 밤베르크(Bamberg) 대성당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하였고, 교황 성하가 직접 오시어 축성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러던 중에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녀는 병이 나으면 카셀(Kassel) 근교 카우푼겐에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약속하고, 그 후 이 일이 거의 완공될 무렵 남편 성 헨리쿠스가 운명하였다.
1024년 남편의 기일을 맞이하여 성녀는 카우푼겐 성당을 수차례나 방문하고 미사 때 복음을 봉독한 뒤에, 그녀는 원래의 십자가 일부를 제대에 봉헌하였다. 그 후 그녀는 주교로부터 수녀복을 받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지난날의 황녀로서 모든 부귀영화를 잊고 비천한 환경과 초라한 수도원에서 기꺼이 살았으며,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삶을 살았다고 주위 사람들이 높이 칭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1200년 3월 29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첼레도니오(Cheledonius)
신분 : 군인 순교자
활동연도 : +304년
같은이름 : 첼레도니우스, 켈레도니오, 켈레도니우스, 첼리도니오, 첼리도니우스
성 헤미테리오 (Hemiterius)
신분 : 군인 순교자
활동연도 : +304년
같은이름 : 헤미테리우스, 헤미떼리오, 헤미떼리우스, 에메테리오, 에메테리우스, 에메테리오, 에메떼리오
성 헤미테리우스(Hemiterius)와 성 켈레도니우스(또는 첼레도니오)의 생애와 순교 사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이들을 위하여 장시를 지은 프루덴티우스(Prudentius)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박해자들은 그들의 순교 사실을 불태웠고, 미래의 영광을 두려워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이 두 성인은 성 마르첼루스(Marcellus)의 아들로 부친을 따라 군인이 되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에스파냐의 칼라호라(Calahorra) 성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성 에우트로피오(Eutropius)
신분 : 군인 순교자
활동연도 : +308년
성 바실리스코 (Basiliscus)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308년
성 클레오니코 (Cleonicus)
신분 : 군인 순교자
활동연도 : +308년
성 클레오니쿠스(Cleonicus), 성 에우트로피우스(또는 에우트로피오), 성 바실리스쿠스(Basiliscus)와 동료들은 흑해 연안의 폰투스(Pontus)에서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하였다.
이들 순교자들은 성 테오도루스 (Theodurus, 2월 7일)와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