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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0일 월요일
[(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르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형제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께 해 준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9,1-2.11-18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너희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12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너희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님이다.
17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18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40)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 준 의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의 ‘가장 작은 이들’은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로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의인이 되려면, 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작은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이 죄짓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6절 참조).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10절 참조). 그리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14절 참조).
바로 이 작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어린이처럼 스스로 작아진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작은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의인들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업신여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해서 입을 것과 먹을 것, 그리고 머물 곳이 없는 이들은 죄의 유혹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과 함께하도록,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모든 이가 하느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서로 도우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작은 이들’이 되어 ‘작은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웃픈 현실 앞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시기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회개(悔改)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지난 시절 지은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음’입니다.
송구스럽고 부끄러워 가슴도 치고,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가슴을 치는 행위도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죄나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도 회개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다른 측면의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라는 표현 안에는 ‘안다’ ‘인식한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려서, 삶에 여유가 없어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미처 몰랐던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 역시 회개입니다.
칼라너 신부님의 표현에 따르면 회개란 우리가 지니고있는 지극히 협소한 인식 지평을 더 넓게 확장시키는 일입니다. 결국 회개란?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앎이 더 깊어지고 더 충만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정말이지 중요한 노력이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는 주님,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주님, 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 나의 고통을 보고 계시는 주님, 나의 작은 신음소리 조차 귀기울이시는 주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으면 다음 작업이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 앞에 나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흙이요 먼지요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죄와 한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지닌 존재입니다. 왜? 우리 각자 내면에는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느님을 잘 알게 되면, 나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란 존재는 그 어떤 다른 곳이 아닌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 그것이 지상 과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회개의 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또 다른 측면의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좋은 마음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 목 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음료 한 잔 건넸는데, 그것을 받아 먹고 마신 사람들이 예수님이시랍니다. 우리는 습관처런 병자 방문을 가고 교도소 면회를 갔는데. 거기서 고생하고 있는 분들이 또 다른 예수님이시랍니다.
회개와 관련해서 요즘 시국 돌아가는 것을 묵상해보니, 정말이지 큰 회개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고 김치찌개를 맛나게 드시고 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입니다. 그는 죄중에서도 가장 큰 죄, 자신을 모르는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그런 죄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최악의 생활고와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참담한 사태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고 가슴을 찢고 있는데, 무슨 세계 챔피언 먹은 것도 아닌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주먹을 불끈 쥐고, 정말이지 참담하고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와 그 가족, 주변에 죽치고 있는 하이에나 무리의 회개와 새 삶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슬픈 저녁 시간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아침에 달걀, 우유, 떡, 야채를 먹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무엇을 먹을지 선택합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도 달라집니다. 아침에 건강한 음식을 먹으면 몸이 활기차고 힘이 납니다. 오트밀, 그리스식 요구르트, 달걀, 통곡물로 만든 빵과 같은 음식들은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고, 하루를 활기차게 살아가게 도와줍니다. 반면, 도넛이나 설탕이 많은 시리얼, 패스트 푸드 같은 음식들은 순간적으로는 달고 맛있지만, 금방 피곤해지고 건강을 해칩니다. 영적인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집니다. 가난한 이에게 먹을 걸 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볼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할 때, 우리의 영혼은 점점 약해지고 병들어갑니다. 마치 아침마다 몸에 해로운 음식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영적인 건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우리를 양과 염소로 나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굶주린 이를 먹이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를 입힌 이들입니다. 반면, 염소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아침에 꼭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 말씀, 용서입니다. 먼저, 기도는 우리를 하루의 시작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하루를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아침에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몸이 힘을 얻는 것처럼, 기도를 통해 영혼도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입는 갑옷과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싸움에 임하는 신앙인에게 무기와 같습니다. 기도는 먼 길 떠나는 자동차에 필요한 기름과 같습니다.
둘째,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마음을 다스려 줍니다. 하루를 말씀과 함께 시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작은 구절이라도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영혼이 더욱 튼튼해질 것입니다. 말씀은 신호등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미움과 분노를 품으면 그날 하루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실천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하루가 평안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 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선행 하나하나가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길입니다. 마치 매일 아침 건강한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하루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몸을 위해 건강한 아침을 챙겨 먹듯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용서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모여 우리의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건강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가장 작은이와 만나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가장 작은이에게
눈길 건네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
눈길 건네는 사람은
사람이고 싶은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사람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답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사람을 보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스스로를 보는 사람은
스스로인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마리아 에우제니아(예수의)(Mary Eugenia of Jesus)
신분 : 수녀, 설립자
활동연도 : 1817-1898년
같은이름 : 메리, 미리암, 에우게니아, 외제니, 유진
성녀 안나 마리아 에우게니아(Anna Maria Eugenia, 또는 마리아 에우제니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완전히 패배한 후 군주제가 회복된 1817년 프랑스 메스(Metz)의 경제적으로 부유한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Paris) 북쪽 교외의 한 성(城)에서 성장하였다. 그녀의 출생 배경은 그녀가 장차 프랑스 교회 전체에 새로운 영성적 길을 제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볼테르(Voltaire)와 자유주의의 신봉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정치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을 통해 마리아 에우게니아에게 풍부한 감수성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강한 의무감을 일깨워주었다. 가정생활을 통해 그녀는 지적 호기심과 낭만적인 정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폭 넓은 세계관을 키워갈 수 있었다.
뒤늦게 세례성사를 받은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축일 날 성당 미사 중에 별다른 마음의 준비도 없이 관행처럼 첫영성체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첫영성체는 미래의 비밀을 예언하는 놀라운 신비의 체험이었다. 그녀는 훨씬 뒤에 자신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로 완전히 돌아서기 전까지는 그 예언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청소년기는 행복했지만 전혀 괴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오빠와 젖먹이 여동생의 죽음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고, 허약한 건강 상태와 말에서 떨어진 일로 인해 심각한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힘든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배워 알고 있었다.
마리아 에우게니아가 13살이 되었을 때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모든 재산과 부동산을 잃었다. 게다가 여러 오해로 인해 부모님이 이혼하자 그녀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파리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마리아 에우게니아 역시 종종 어머니를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가정을 방문하곤 하였다.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아 15살 때 그녀는 어머니를 콜레라로 잃고 말았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세속적이고 천박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세속적인 즐거움과 경건한 삶의 좁은 길 사이에서 흔들렸다. 괴로움 중에 진리를 찾으며 때로는 절망하기도 한 그녀는 마침내 절대자에 대한 회개의 갈증을 느끼고 초월자에게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19살 때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 주교좌성당의 사순절 특강에 참석했다가 이미 설교자로서 그 재능이 잘 알려진 도미니코 수도회(설교자회)의 젊은 수도원장인 앙리 라코르데르(Henri Lacordaire)의 강론을 듣게 되었다. 라코르데르는 세상이란 특별한 장소에서 교회의 쇄신에 관한 환시를 본 라므네(Lamennais)의 제자였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했고 이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그는 젊은이들의 의문과 갈망, 이상주의, 그리스도와 교회 모두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강론 말씀은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가슴을 울렸고, 이를 통해 그녀는 그동안의 많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다. 동시에 수도 성소에 대한 소망이 일었다. 그녀는 완전한 회개를 경험했고, 그 순간 이후 자신의 모든 정신과 나약함까지도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런 순간에 그녀는 라므네의 또 다른 제자인 콩발로(Combalot) 수도원장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콩발로 신부는 그녀와의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꿈꾸어 왔던 수도회의 설립자로 예정된 한 선택된 영혼과 만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마리아 에우게니아에게 자신의 사업을 맡아주길 설득하며, 하느님께서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기 위해 그녀를 선택하셨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오직 교육에 의해서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만들어 당대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결국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콩발로 수도원장 신부의 인도를 받기 시작했다. 22살의 나이에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승천 수도회의 설립자가 되어 수도자들의 전 생애를 성화하기 위해 헌신하며 그들과 세상 안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1839년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다른 두 명의 젊은 여성들과 함께 파리의 생 쉴피스(Saint-Sulpice) 성당 근처 페루(Ferou) 길에 있는 한 공동주택에서 기도와 연학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41년에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부인과 앙리 라코르데르 수도원장, 몽탈랑베르(Montalembert) 같은 여러 지인들의 보호와 후원 속에 수도회의 첫 번째 학교를 개교하였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그녀가 설립한 수도회는 네 나라 출신의 16명의 수녀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로 성장했다. 그들은 옛 것과 새 것을 연결하기를 원했다. 즉 오랜 역사 안에 쌓여 있는 교회의 영성적 보화와 수도생활의 지혜를 현대인들의 요구에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교육과 결합하고자 했다. 이는 그 시대의 가치를 반영하는 문제였으며, 동시에 복음적 가치가 새로운 산업화와 과학의 시대에 부상하는 문화를 관통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강생의 신비에 중심을 둔 수도회의 영성은 깊은 관상과 사도직 활동에 헌신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찾아 나서도록 주어진 삶이었다.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생애에 대해서는 19세기 내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열렬히 사랑했고, 이를 수도회 역사의 활기 있는 한 부분으로 삼았다. 계속해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미래의 선물과 수녀회의 확장에 쏟아 부었고, 그것은 그녀의 평생의 사업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많은 수녀와 친구들을 보내주셨다. 초창기 회원 중 한 명인 테레사 엠마누엘(Teresia Emmanuel)은 아일랜드 출신의 신비가로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수도회의 공동 설립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엠마누엘 달종(Emmanuel d’Alzon) 신부는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1845년에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성모 승천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이 두 설립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로를 도와주었다. 또한 이 두 설립자는 우정뿐만 아니라 그들이 영감을 준 많은 평신도 협력자들이 수도회와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고 노동하며 수도자와 평신도들을 성모 승천의 길로 이끌며 많은 이들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자리 잡았다. 그녀가 설립한 수도회는 1888년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예수의 마리아 에우게니아 원장수녀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침묵과 겸손으로 지냈다. 그녀의 생애는 완전히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삶이었다. 1898년 3월 9일과 10일 오늘날의 파리에 속한 오퇴이유(Auteuil)에서 임종을 앞두고 노자성체를 받아 모신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온화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돌아갔다. 그녀는 1975년 2월 9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7년 6월 3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심플리치오 (Simplicius)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483년
같은이름 : 심플리치우스, 심플리키오, 심플리키우스, 씸쁠리치오, 씸쁠리치우스
이탈리아의 티볼리(Tivoli)에서 태어난 성 심플리키우스(또는 심플리치오)는 468년 3월 3일에 교황 성 힐라리우스(Hilarius, 2월 28일)를 승계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그리스도단성론(monophysitism) 이단을 단죄했던 칼케돈(Chalcedon) 공의회의 활동을 옹호하였고, 야만족의 침략으로 인해 도탄에 빠진 이탈리아 백성들을 구제하는 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는 또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지켜보았던 격동기의 교황이었다.
그는 오랜 지병으로 483년 3월 10일 로마에서 사망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 회랑에 있는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 11월 10일) 옆에 묻혔다.
성 요한 오길비(John Ogilvie)
활동년도 : 1579/1580-1615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스코틀랜드(Scotland)
같은 이름 : 오길비, 오질비,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성 요한 오길비(Joannes Ogilvie)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뒤섞인 혼란한 시대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나, 가톨릭의 정통성을 인정하게 되자 순교를 각오하고 루뱅(Louvain)의 스코틀랜드 대학에서 개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그 후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1610년 파리(Paris)에서 사제로 서품되면서 영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가명으로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의 선교는 그 당시로 보아 지극히 성공적이었는데, 감옥에 갇힌 가톨릭 신자들을 돌보는 위험까지도 감수하였다. 1614년 여름 그는 몇 사람을 개종시켰는데, 이 사람들 때문에 그가 가톨릭 사제임이 탄로나 이듬해에 글래스고(Glasgow)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1929년 복자품에 올랐고, 1976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아탈라 (Attalas)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보비오(Bobbio)
활동연도 : +627년
같은이름 : 아탈라스, 아딸라, 아딸라스, 앗탈라, 앗탈라스, 앗딸라, 앗딸라스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태생인 성 아탈라는 가프(Gap)의 주교 아레기우스(Aregius)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였고, 레렝스(Lerins) 섬에서 은수자가 되었으나 좀더 엄한 규칙을 따르고자 하여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 11월 23일)의 지도를 받던 뤽세이유(Luxeuil) 수도원으로 갔다.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국왕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가 프랑스 내의 아일랜드 선교사들을 추방할 때에도 그는 늘 성 콜룸바누스를 수행하였다.
이 사건의 발단은 성 콜룸바누스가 왕에게 첩을 포기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이탈리아의 밀라노(Milano)와 제노바(Genova) 사이에 있는 보비오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성 콜룸바누스가 615년에 사망하게 되자 성 아탈라가 원장이 되었다.
그의 규칙이 너무나 엄격하다는 수많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휘하에 있던 보비오 수도원은 북이탈리아 수도원의 중심이 되었다.
성 콜룸바누스와 같이 그도 역시 아리우스파(Arianism)에 대해서는 매우 강력히 대응하였는데, 그가 행한 기적 이야기들은 그 지역에서 수없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보비오에서 사망하여 성 콜룸바누스와 함께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