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大邱 "녹향 (綠鄕)" 대한민국 고전음악감상실 1호 - 1946 년 10 월 개업 전화 번호 : 053 - 424 - 1981
글쓴이; 조선일보 김용운(金龍雲) 기자 / 1993 년 8 월 30 일
사람이 사는 것이 길어야 백 년인데 영겁을 두고도 변함없이 순환을 계속하는 자연에 비하면 한갖 티끌만한 존재련만 우리는 이 짧은 생애속에서도 많은 희비애락을 겪어나가곤 한다. 코 흘리게 어릴적 부터 지금이 되도록 돌아보면 어느새 우리는 어른이 되어 있고 우리들의 아이가 다시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서글픔이 있지만 한없이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부모님이 어느듯 고희를 바라보는 늙으신 분이 되었음에 참으로 세월의 흐름이 애석하게 여겨 질 때가 있다.
외동으로 자라시다 남보다 많은 자녀를 둔 것을 자랑으로 생각 하시며 우리를 먹이고 입히는 것만을 기쁨으로 아셨고 모든 것을 우리들 위주로만 사셨던 부모님이 아니셨던가. 또한 음악을 좋아 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어려웠던 모든 역경을 겪으시면서도 끈질기게 녹향음악감상실을 저버리지 않았던 그 인내와 고집스러움은 우리에게 주는 살아있는 교훈이 아닐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난했지만 남보다 행복했고 또한 모이기만 하면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가진 것 없는 빈손일 때도 내일을 기대하는 희망을 버린 적 없는 밝은 얼굴, 맑은 마음을 가질수 있지 않았던가. 우리 육남매 여지껏 살아오면서 어느 누구도 부모님 속을 썩이지 않은 형제가 없었건만 늘 그것을 잊으시기만 하는 용서의 부모님이 아니셨던가.
이제 우리가 이만큼 성장하여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생활방식대로 살아 가고 있지만 가끔식 만나서 혈육의 정을 나누며 서로를 염려하는 마음을 전하고저 이 회를 조직하고자 하니 황혼길에 서신 부모님이 남은 여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우리도 부모님의 그 모습 그대로를 우리 동기간에 전하며 또한 우리의 후손들에게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녹향(綠香)'이라는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며 여지껏 그 이름 아래 살아 온 것 같다. 어쩌면 이 이름은 앞으로도 계속 살아있을 것이며 꼭 살아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회를 <녹향회(綠香會)>라 칭하고자 한다.(위 글은 인터넷 어디선가 보고 카피해 둔 글인데, 글 내용으로 보아 그 분(이창수씨)의 자제분의 글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우리나라 고전 음악 감상실 제 1 호라는 <녹향(綠香)>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작게나마 주인이신 이창수(李昌洙)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3 년 8 월 30 일자 '조선일보' AV 살롱란의 <녹향(綠香)>에 관한 기사를 읽고 부터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저 겉 멋으로 서울 명동에 있었던 음악 감상실 <필하모니아>에도 몇 번 드나들기도 했었지만, 마침 녹향이 있는 곳이 고향으로 가는 길목인 대구여서 언제든 고향에 가는 길에 찾아 보리라 마음 먹고 그 때 신문에서 본 전화번호를 매모해뒀었는데 그로부터 3 년후인 1996 년 1 월, 지난 3 년 반 동안 다니던 출판사를 퇴사하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오던 음반점을 내고자 나중에 괜찮으면 모두 데려 가기로 하고 식구들은 경기도 일산에 둔 체 혼자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모든 게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아 음반점과 음악카페를 열 꿈을 9 개월 여만에 접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버렸지만 그때 처음으로 <녹향>에 들려 주인이신 이창수씨를 만나 뵈었습니다.
그 후로 몇 년간은 고향에 다니러 갈 때마다 한 두 번씩 들리곤 했었지만, 근래 들어 이것저것 복잡한 일이 많아 들려 보질 못했는데 지난 번 추석에 고향에 내려 갔을 때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번호부를 뒤져보니 <녹향>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 혹시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겼거나 전화번호가 바뀌지나 않았는지 ? 행여 이미 돌아가시지나 않았는지 내심 조마조마하며 전화를 걸었더니 반갑게도 나이 드신 분 특유의 쉰 듯한 음성으로 조용하게 전화를 받으시는 게 아닙니까 .... 정말 얼마나 반가웠는지, 우선 아직 생존해 계신 것에 감사했고 아직도 음악감상실을 지키고 있다는데 다시금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대충 전화로 저의 소개를 드렸지만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금방 기억은 못하셨고, 내일은 일요일인데 문을 여느냐고 여쭈어봤더니 일요일도 오후 4 시경까지는 문을 열어 두니까 오라고 하셨습니다. 1966 년 1 월에 대구역 앞 동성로에 이는 대구극장 앞 건물에 있는 것을 봤는데 그로부터 11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참 용케도 한 자리에서 버텨오셨다 싶었습니다. 이젠 음악감상실을 찾아 주는 손님의 순수한 수입만으로는 음악 감상실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해 이창수씨의 자녀분들이 평생을 바쳐 지켜오신 아버님의 노후를 위해 돌아가실 때까지 <녹향>을 지키시라고 음악 감상실 운영을 도와드린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전 날 찾아 뵈리라고 미리 전화를 드렸고 일요일이지만 문을 열고 기다리신다고 하셨는데 오후 1 시가 되도록 몇 번 확인 전화를 드렸지만 전화를 받지 않아 '오늘은 일요일이라 쉬시나 보다' 싶었지만 2 시가 넘은 시각에 다시 한 번 전화를 해봤더니 그때야 교회 다녀 오셨다며 어서 오라고 반갑게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버스와 전철을 갈아 타고 오후 4 시경 '중앙로'역에 내려 몇 년전 찾아 간 일이 있는 기억을 더듬어 혹시 그동안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긴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대구역 건너편 동성로 입구 쪽의 대구극장 맞은편 건물 2 층에 있던 <녹향>을 찾아 갔더니 다행히 아직도 몇 년전 그 건물에 멀리 <녹향>의 간판이 걸려 있는 게 보였는데 그전엔 좁은 골목안이었던 것이 지금은 <녹향> 맞은편에 대구극장이 있던 건물이 사라져 버리고 훤하니 뚫려 있어 의아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운영난으로 대구극장은 문을 닫고 건물이 헐려진 자리는 임시로 주차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녹향>으로 들어 가기 전에 우선 <녹향> 주변 거리 모습과 간판 등을 몇 장 카메라에 담고 마침 내가 찾아 간 시간에 넓은 홀에 손님이라고는 50 대 중반의 남자 분이 한 사람 있을 뿐이었는데,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29 인치 가량의 무대 앞 왼쪽에 있는 TV를 보고 있었는데 일본 TV를 보고 있길래 일본인이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라 여긴 유선으로 해서 일본 TV가 나오기 때문에 일본 TV 방송을 보면서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음악감상실에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TV 방송을 보러 오는 그것이 오늘의 <녹향>이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먼저 이창수씨에게 양해를 구한 뒤 음료수와 차를 준비하는 주방 기기들이 놓여 있는 주방을 배경으로 이창수씨의 사진을 몇 장 찍고 홀 이곳 저곳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녹향>과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대형 스피커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릴 테이프 녹음기와 손으로 태엽을 감아 유성기판을 들었다는 축음기가 무대 전면에 자리를 하고 있었고, 어울리지는 않지만 세월의 흐름과 변화는 어쩔 수 없어 CD 플레이어와 디지털 앰프, TV 가 무대 앞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홀 한 구석의 레코드 진열장에는 그 가치를 따지기 힘든, 지금은 구할래야 구할 수도 없을 귀한 레코드들이 이제는 음악을 들려 주기 위한 음반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지나온 세월의 흔적으로서 진열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무슨 음반들이 있는지 좀 보고 싶었지만 나이 드신 분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했습니다. 대충 감상실 안의 정경을 카메라에 담은 뒤 커피를 마시며 96 년에 <녹향>을 찾았었던 일을 다시 말씀드리니까 그제서야 기억이 난다며 반가워하셨습니다.
<녹향>이 대구 향촌동에다 처음 음악 감상실의 간판을 내 걸고 문을 연 것이 8, 15 해방 이듬해인 1946 년 10 월이었다니까 그로부터 61 년동안 집세를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때도 많았지만 오직 음악을 사랑하시는 일념으로 <녹향>을 지켜 오고 지탱해 온 셈입니다. 2007 년 현재 만 86 세로 그 당시 26 살의 팔팔했던 젊은 청년 이창수는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되어 이제는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었지만 스물 여섯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클래식 음악 감상실을 열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겼으니 참으로 대단한 젊은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년엔가는 노환으로 쓰러져 잠시 <녹향>의 문을 닫았었다는데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셔서 다시 <녹향>에 나와 계시는데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녹향>을 지키실 각오이신 것 같았습니다. 전쟁 중에 피난민들과 함께 대구로 몰려든 화가와 음악인, 문인 같은 지식층의 예술인들에게 차와 음악으로 심신을 달래 줬던 클래식 음악 감상실 <녹향>은 1955 ~ 1956 년 사이가 전성기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손님들이 밀려 왔었다는데 당시 전기 사정이 열악하여 수시로 전기 공급이 끊길 때면 축음기의 태엽을 감아 음악을 들려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80 년대 초까지는 넉넉하지는 못해도 그런대로 음악감상실을 꾸려 나갈 수 있었는데 IMF 이후부터 사양길로 들어서서, 이제는 컴퓨터와 CD 며 MP3 등 일반 가정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갖가지 편리한 문명의 이기가 갖춰진 지금은 이미 음악 감상실에 음악을 들으러 온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시절이 되어 버렸고, 대구에 있는 향토 음악인들이 한 달에 두 세번 정기적으로 음악모임을 가지는 것과 이따금 <녹향>과 연고가 있거나 대구 근교에 거주하는 음악인들이 음악발표회를 가지는 것 외에는 하루에 열 명 내외로 찾아 주는 손님이 전부인데 어떤 날은 한 사람의 손님도 찾지 않는 날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평일에는 대개 오전 10 시 쯤 문을 열어 손님이 없으면 저녁 7 시경이면 문을 닫는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손님이 찾아 주는 입장료 수입으로는 종업원을 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현실이라 주인인 이창수씨가 노구를 이끌고 홀과 주방을 오가며 손수 차를 끓여 나르고 손님이 음악이라도 청하면 음반을 찾아 들려 주는 일까지 1 인 3 역의 일을 혼자 하고 계셨는데 한 잔에 3 천원씩 받으신다는 커피 한 잔을 시켰지만 웬지 앉아서 나이 드신 분이 내어다 주시는 커피를 받아 마시기가 죄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건강해 보이셔서 뵙기 좋다니까 겉으로 보기엔 건강해 보일는지 몰라도 전신이 안 아픈 곳이 없다시며 누가 슬쩍 건드리기라도 하면 쓰러질 정도라고 힘없이 웃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옷을 추스리기 조차 힘이 들고 성가신지 허리춤에 조금 삐져 나와 있는 와이셔츠 자락을 추스리지도 않으시고 홀 안을 걸어 다니는 것도 힘에 부치시는 듯 조심스레 움직이셨습니다. 현재 70 을 넘어선 예술인들은 거의 모두 몇 번씩은 <녹향>을 거쳐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데, 6, 25 사변이라는 격변의 시기에 다른 곳에서는 감히 접할 수도 없는 귀한 음악을 들으며 시와 문학과 음악과 미술을 논하며 젊음을 불태웠을 수많은 지식인들은 지금 모두 <녹향>을 잊어버린 것일까요?
한 때 그들에게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고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쉼터였던 <녹향>을 이제는 세월의 뒷전에 밀려나 저대로 사라져버리도록 내버려둬도 괜찮을까요 ? 그로부터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는 오랜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지만 그들의 무심함에 슬그머니 화 같은 게 나려는 건 저의 괜한 오지랍일까요 ?
오래된 민가나 사적 같은 곳은 정부에서 보조금을 지급하여 지키는 보존 정책을 펴고 있는데 정부 차원에서 안된다면 대구시 지방 자치단체에서 운영비를 보조해주든가 지방 유지들이 합심하여 60 여년을 지켜 온 역사 깊은 문화의 사랑방이었던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 감상실 1 호"인 <녹향>을 대대손손 지키고 보존해야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오늘 이 시간도 단 한 사람일지언정 음악감상실 <녹향>을 기억하고 찾아 주는 손님을 기다리면서 이창수 선생님은 음악실을 지키고 계실겁니다.
대구 근처에 계시는 분들 가운데 혹 생각나시면 한 번 쯤 <녹향>에 들리셔서 노구에 홀로 외로이 <녹향>을 지키고 계신 이창수씨를 격려해드리고 가능하다면 이따금이라도 옆에서 도와 주셨으면 좋겠네요. "예술가의 사랑방 반세기"46 년 문 열어…양주동, 유치환씨 등 단골 피난시절 가곡 명태 노래말 만들어진 곳 애창가곡 명태의 노래말이 만들어지고 양주동, 류치환, 최정희, 양명문, 이중섭 등 작고한 예술가들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 있다.대구시 중구 화전동 대구극장 앞 40 평 공간에 차려진 「녹향」감상실. 1946 년 10 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문 음악 감상실 간판을 내 건 이곳은 주인 이창수(李昌洙)씨(83)가 반세기 가까이 음악실을 지키며 차 한잔의 휴식을 찾는 손님들을 반갑게 맞는다
개업 이래 10 차례나 넘게 셋집을 옮겨 다니면서 용케 버텨왔습니다. 벌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드문드문 찾아주는 단골들 때문에 고향집처럼 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녹향을 찾는 손님은 많아야 하루 10 여명. 한 사람도 찾지 않는 날도 다반사라고 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감상실치고는 초라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이씨는 이곳이 한 때 이 지역에서 으뜸가는 문화사랑방이었다는 자부심으로 레코드 더미에 묻혀 산다. 녹향의 전성기는 6 25 피난시절. 대구로 피난 온 예술가들이 부산의 밀다원(蜜茶苑)처럼 이곳에 모여 음악을 듣고 노변정담(蘆邊情談)을 나누던 시절이다.
우리가곡 명태의 노래말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 무렵 이곳이었다. 그때가 51 년경이었습니다. 막걸리로 거나해진 양명문 시인은 밤 9 시면 어김없이 찾아와 차이코프스키만 주문했습니다. 그리고는 손님들이 보거나 말거나 스피커 앞에 서서 '비창' '바이올린협주곡' 따위를 지휘했지요. 그러던 어느날엔가 감상실에 틀어박혀 명태 시(詩)를 쓰고는 좋아라 떠들고 목청껏 낭송하곤 했습니다. 시인은 환도후 서울로 떠나면서 자작시의 친필 원고를 이씨에게 주었고, 얼마 후명태는 작곡가 변훈씨에 의해 가곡으로 만들어졌다.
녹향감상실의 스피커 위에는 커다란 꽃병 하나가 정물처럼 놓여 있다. 작고한 소설가 최정희가 들고온 것이다. 피난길에 대구에 머물렀던 최씨는 매일같이 꽃을 안고와 감상실을 향기로 채우고는 갈탄 난로 옆 다탁에 앉아 글을 썼습니다. 양주동, 유치환씨도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면 곧 바로 녹향으로 달려오곤 했지요. 대구 미(美)공보원에 출입하던 화가 이중섭씨는 노트와 신청곡 용지에 연필로 그림을 그릴 뿐 매우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이후 녹향은 여느 감상실처럼 쇠퇴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사랑방' 시절에 대한 이씨의 향수는 남다르다.
70 년대 들어 감상실은 집세에 쪼들려 10 여차례 옮겨 다닌 끝에 3 년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입장료 수입만으로는 종업원 두기도 벅차 이씨 혼자서 커피를 끓여나르고 음향기기를 조작한다. 이곳 저곳 옮겨 다녔지만 갈탄난로가 기름난로로 바뀌었을 뿐, 탁자와 의자 시설 등 대부분은 사랑방 시절 그대로 변함없다. 영국제 스펜토리안 스피커로 밤 10 시면 마지막곡으로 틀어주는 브람스의 자장가까지 옛시절 그대로이다. 주인 DJ 종업원 1 인 3 역이 고령의 그에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씨는 음악과 떨어져 사는것은 한 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http://blogs.chosun.com/pts47/2018/01/29/%EC%9A%B0%EB%A6%AC%EB%82%98%EB%9D%BC-%EC%B5%9C%EC%B4%88%EC%9D%98-%EC%9D%8C%EC%95%85-%EA%B0%90%EC%83%81%EC%8B%A4-%EB%85%B9%ED%96%A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