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성모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 교회 때 생겨났다. 여러 차례의 성모님 발현으로 이러한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조선교구의 수호자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로 정해 줄 것을 청하였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이러한 요청을 허락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제1독서
<나는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3,9-15.20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1,3-6.11-12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자격이 있다는 근거는?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날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가 없으시다는 근거는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이렇게 인사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은총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인간에게서 떠난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시니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물론 에덴 동산에서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도 죄가 없다면 은총이 가득해야 옳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고 다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은총이 없는 이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고통입니다. 그래서 마귀 들린 이들은 주님께 자신들을 떠나주십사고 청합니다.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어떤 피정 교육에 들어갈 때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어가시면 이러저러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에서 꼭 일등 하셔서 우리 성당을 빛내셔야 해요!” 장난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경쟁하면 누구나 느끼듯이 그곳이 지옥이 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면 이는 은총이 가득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은총은 곧 ‘자격’입니다. 은총을 가지지 않고 어딘가에 머무르려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려 하면 그것은 자격 없이 만나는 것입니다. 은총은 기도로 오는데 기도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말은 자신 안에 이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죽어서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가 있어?”라고 이 세상에서 말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격인 성령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은 은총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 은총으로 당신을 가득 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주님께 합당하다고 여기는 만큼 합당하지 못합니다. 저도 술을 마시고 용기백배하여 성당에 올라가 성모상으로 보았지만, 성모상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일 때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아니면 성모 마리아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때 자격이 없어집니다. 내 힘으로 하려 하고 성령을 원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25회’에 보면 중2 남자아이인데 호흡 곤란으로 4년째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나서 그 상처 때문에 학교 가기를 거부합니다. 오은영 박사는 이것이 꾀병은 아니지만, 자신이 그런 병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싶어서 진짜 그런 병이 든 것처럼 믿어진 증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부모에게 이것저것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왜 부모는 아이에게 이용당하게 된 것일까요? 부모는 너무 착하고 아이가 해 달라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다 해줍니다. 아이는 부모의 이 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부모의 약함은 내 힘으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이런 말 하면 죄송하지만, 교만에서 나옵니다. 권위를 내세워야만 교만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교만입니다.
금쪽 처방을 받고서도 부모는 “너는 할 수 있어”, 혹은 “우리는 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줍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도움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조금 따라주다가도 힘에 부치면 이내 폭발하고 맙니다. 처음부터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면 아이가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입니다. 부모의 탓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아이에게 합당한 부모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 그 순간부터 합당한 부모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자격’이신데 그 자격을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성령의 힘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믿을 때 자격을 잃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누구에게도 자격이 없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이 은총을 지니셨기에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아드님을 키울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상징이 아브라함이 자기 종에게 온갖 패물을 주며 아들의 신붓감을 찾아오라고 한 이야기입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그 종에게 합당하지 못한 존재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의 종은 레베카를 자신이 가져온 패물로 꾸며주었습니다. 이것이 ‘은총’이고 이사악을 만날 ‘자격’이 됩니다. 여기서 레베카가 아브라함의 종을 위해서 종과 종이 몰고 온 낙타들에게 물을 주는 시간을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하느님은 은총으로 자격을 주십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만날 자격 뿐 아니라 하느님을 만날 자격을 잃습니다. 자격 자체가 기도로 오시는 성령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CHkIdKSKYuk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이가 중요한 시험을 망쳤습니다. 좋은 결과가 아니라서 크게 실망했는데, 이 아이의 엄마도 크게 실망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버립니다. 이런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수능이 끝나고 나면, 실망한 부모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분명히 더 큰 실망은 아이일 텐데, 부모가 더 크게 실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부모가 심리적으로 아이에게 구속된 것입니다. 아이의 실패가 곧 자기의 실패이기 때문에, 아이의 마음을 돌보기보다 자기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시험 망친 건 너야. 잘 봤어야지.”라면서 외면하는 부모입니다. 이때에는 부모나 아이 각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관계라는 것은 구속된 것도 아닌 또 고립된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만약 위의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매우 속상하지? 실망하는 걸 보니 엄마 아빠도 마음이 안 좋아. 그래도 속상하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했고 또 기대했다는 뜻이겠지. 마음 잘 추스르고, 어떤 점을 보완하면 좋을지 함께 살펴보자. 엄마 아빠가 도울 것이 있으면 뭐든 말하렴.”
이렇게 말하는 관계가 된다면, 함께하면서도 자율적으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남 탓하면서 주저앉지 않게 됩니다. 함께하기에 힘낼 수 있으며,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를 잘 정립했으면 합니다. 함께하면서도 자율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게 하는 관계는 가족, 친구, 이웃…. 모든 사람과 이루어야 할 관계입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님께서 만드신 관계 역시 이 차원에서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었을 때, 거부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또 그 소식에 좌절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고 해서, 돌을 던져 공개 처형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과 함께하지만, 자율적으로 본인의 선택을 내세우시며 자기 인생을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오직 사랑만이 아무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줄 수 있어요(파울로 코엘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