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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12일 토요일
[(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만드시고,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카야파 대사제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며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복음).
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7,21ㄴ-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서 라자로를 되살리신 것을 보고 많은 유다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더러는 믿기는커녕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그 일을 알립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몸소 본 이들의 증언을 듣고도 의회에 모인 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정당성을 논하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의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하신 말씀을 판단한다는 종교적인 명분으로 의회를 소집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늘면서 로마인들의 억압이 더욱 거세질 것을 걱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그 바탕에는 정치적 문제와 세속적 욕망과 악의가 도사리고 있을 뿐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인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품은 악의는 많은 유다인에게 전염되어 그들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에 함께하게 합니다.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자신을 정결하게”(요한 11,55) 하는 대신, 자신들이 살길이라고 여기며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삼아 죽이려는 준비만을 할 뿐입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이 악한 마음에서 비롯하기보다는 무사유, 곧 생각 없음에서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다른 이의 현실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행동할 때 비로소 악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넘쳐 나는 악에 쉽게 물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그분을 우리 안에서 죽이는 일에 힘쓰게 될 것입니다.(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놀라운 겸손의 덕이요 자기 낮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석 사제들과 대사제, 바리사이...이들은 예수님 시대 당시 사회를 주름잡던 최고위층 인물들이었습니다. 비록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제한된 권력을 지녔지만, 그래도 당시 실세요,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 대사제 카야파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의회를 소집했는데, 오늘날로 치면 국회 본회의가 소집된 것입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오직 한 사람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 앞에 혜성처럼 등장하신 예수님은 유다 고위층 인사들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에게로 향해야 할 백성들의 시선과 관심, 박수갈채가 하루아침에 예수님에게 집중되니, 분노가 치밀고 열불이 가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예언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예언자도 보여주지 못했던 놀라운 기적과 표징들을 밥 먹듯이 일으키니, 수많은 유다인들이 그를 따라다니고, 제자단에 가입하고, 그를 구세주로 고백하니, 미치고 환장하고 펄쩍 뛸 일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다 최고위층 인사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던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는 고민 끝에 한마디 하는 데, 묘하게도 그의 말이 예수님의 운명을 정확하게 예견하는 말이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카야파는 자기 생각으로 위 발언을 한 것이 아니라, 엉겁결에 그해의 대사제로서 정확하게 예언한 것입니다. 대사제 카야파의 이 발언에 동조한 그들은 그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지어 만드신 피조물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반역이요 천부당만부당한 비극입니다.
이 모든 자초지종을 다 지켜보셨고,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시지만, 아버지의 크신 계획과 뜻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견뎌내시고 참아내십니다. 억울한 누명과 참혹한 죽음조차 기꺼이 수용하시고 이겨내십니다. 놀라운 겸손의 덕이요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유는 당신 홀로 돌아가심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생은 ‘종착역이 아니라 간이역’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인생이 종착역이라면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을 겁니다. 인생이 종착역이라면 불의하게 죽은 사람, 억울하게 죽은 사람, 피지 못하고 죽은 사람, 사랑도 못 해 보고 죽은 사람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 될 겁니다. 우리 인생의 종착역은 하느님의 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서 떠났던 형제님이 생각납니다. 가족을 사랑했고, 대학 교수로 정년 퇴임한 형제님은 아내가 믿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형제님은 이제 편안히 노후를 보내려고 했는데 그만 ‘암’이 찾아왔습니다. 병세가 심해지면서 저는 형제님을 방문했고, 천주교 교리를 말씀드린 후에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형제님께 ‘레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생일에 맞추어서 레오라고 정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이 세상 소풍 끝나가는 날, 저를 찾았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드렸고, 성체를 모셔드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모신 성체가 형제님을 하느님의 품인 종착역으로 잘 이끌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두려운 것 중 하나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끝, 종착역, 마지막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려고 합니다. 기차 여행을 떠올려 봅니다. 긴 여정을 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간이역을 지나갑니다. 어떤 역에서는 내릴 준비를 하고, 어떤 역에서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태어나고, 배우고, 사랑하고, 때로는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고, 새로운 길을 가고, 인생의 모든 과정이 하나의 간이역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삶의 고난 속에서 "여기가 끝인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을 보면,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많은 사람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이제 끝이구나. 모든 것이 끝났다." 하지만 그 십자가가 종착역이었습니까? 아니죠. 오히려 십자가는 새로운 생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아,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구나!" 우리는 종종 인생에서 시련을 겪을 때, "이제 끝이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길이야.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우리 삶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로 고통받을 때, 관계에서 상처받고 외로울 때, 꿈이 좌절되고, 길이 막힐 때, 이럴 때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졌듯이, 우리의 십자가도 새로운 출발의 간이역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인생의 어려운 순간들을 지나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의 간이역을 지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머무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차가 간이역에 잠시 멈추듯, 우리도 삶에서 멈추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바쁘게 달려가기만 하면 하느님의 뜻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기도하면서 "주님, 제가 어디로 가야 할까요?"라고 물어야 합니다. 둘째, 새로운 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간이역에서 우리는 방향을 바꿀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새로운 사명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십자가를 희망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힘든 순간이 있을 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과 희망의 시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은 종착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여러 간이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떤 역에서는 기쁘고, 어떤 역에서는 슬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믿으며 살아갑시다. 우리가 지나가는 삶의 모든 간이역에서,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 주님께서 준비하신 또 다른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십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곳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이게 하소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요한 11,51-52)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하여
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때에
그 한 사람을
비겁하게 찾지 않고
그 한 사람이
기꺼이 됨으로써
죽임으로써
구차하게 살기보다
죽음으로써
오롯이 살리게 하소서
나를 믿으시고
내가 믿는
당신께서 몸소
그러하셨듯이
나를 희망하시고
내가 희망하는
당신께서 몸소
그러하셨듯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당신께서 몸소
그러하셨듯이
오늘의 성인
성 요셉 모스카티(Joseph Moscati)
신분 : 의사, 과학자
활동지역 : 나폴리(Napoli)
활동연도 : 1880-1927년
같은이름 : 모스까띠, 모스카띠,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요셉 모스카티(Josephus Moscati)는 1880년 7월 25일 이탈리아 베네벤토(Benevento)에서 판사인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로사 사이의 아홉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나 6일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1884년에 나폴리로 이사하여, 1888년에 첫영성체를 하였다. 1897년 나폴리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던 모스카티는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과 친절한 성품을 지녔는데, 대학 시절에도 학업에 열중하면서 기도에 충실하여 매일미사 참례를 하였다.
1903년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의사로서 바쁘고 고된 생활을 시작한 그는 정성껏 환자들을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교회를 떠나 있던 많은 사람들을 신앙생활로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는데, 이들을 무료로 진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나폴리의 중심가에 자리 잡은 그의 진료소에는 그에게서 진료와 마음을 위안을 받으려는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처럼 과중한 활동 중에도 모스카티는 의학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 3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11년에는 나폴리 대학의 화학생리학 주임교수로 임명되었고, 또 빈(Wien)과 에든버러(Edinburgh)에서 개최된 국제 생리학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한편, 1906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였을 때는 즉시 피해 지역으로 달려가 위험을 무릅쓰고 인근 병원의 환자들을 옮기는 작업을 거들었으며, 1911년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에는 이 전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병원의 책임자로도 활약하였다.
1919년 40세도 안된 나이에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의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된 모스카티는, 1927년 4월 12일 병원에서의 오전 진료를 마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후에 자신의 집에서 환자를 진료하던 중 갑작스런 발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나폴리 각계각층의 시민들은 달려와 “의사 성인, 쥬세페 모스카티가 죽었다”고 애도하였으며, 그를 추모하고 그의 전구를 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주 누오보(Giesu Nuovo) 성당에 안치된 그의 무덤은 항상 꽃으로 덮였다.
그로부터 4년 뒤 모스카티의 뛰어난 덕행과 전구를 통한 기적적 치료에 대한 증거와 증언을 수집하기 위한 교구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성년(聖年)인 1975년 11월에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식이 거행되었고, 1987년 10월 25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제노 (Zeno)
활동년도 : +371년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베로나(Verona)
같은 이름 :
성 제노의 생애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다만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대화집" 속에 나타나는 자료로 그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성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그는 베로나의 주교로서 순교했다고 하나, 그와 동시대 사람인 밀라노(Milano)의 주교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는 그의 편지에서 성 제노가 증거자로서 선종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북아프리카 사람이며 그의 라틴어 저술이나 인용문들을 살펴볼 때 훌륭한 지식의 소유자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그는 매년 수많은 이교도들을 개종시켰고, 특히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해 강경했으며, 고트족의 침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렸을 때 속량금을 지불하여 그들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 제노 자신은 극히 가난한 삶을 살았다. 또 성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그의 지도를 받고 일생을 하느님께 바친 동정녀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성 제노는 아가페(Agape)의 남용을 비난했고, 장례 때에 큰 소리로 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371년 예수 부활 대축일경에 선종하였다고 한다.
성 사바 (Sabas)
활동년도 : +372년
신분 :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사바스, 싸바스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한 성 사바 고트인(Sabas the Goth)은 오늘날 루마니아에 속한 타르고비스테(Targoviste)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는 이방의 신들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사실을 변명하던 신자들을 공식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 사건으로 그는 그 도시에서 쫓겨났으나 나중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그리스도교 박해 때 성 사바는 용감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했으나,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무사하였다. 세 번째 박해 때에는 아타리두스(Atharidus) 휘하의 고트인 군인들이 그를 체포하여 타르고비스테와 가까운 무소보(Mussovo) 강물에 수장시켜버렸다. 그 당시 50여 명의 다른 신자들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어 순교하였다.
복자 안젤로(Angelus)
신분 : 수사
활동지역 : 키바소(Chivasso)
활동연도 : 1411-1495년
같은이름 : 안겔로, 안겔루스, 안젤루스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키바소에서 태어난 안젤루스 카를레티(Angelus Carletti, 또는 안젤로)의 양친은 피에몬테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수학하여 민법과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고향에 돌아와서 주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안젤루스는 모친이 사망하자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형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제노바(Genova)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안젤루스의 장상은 즉시 그가 선교열이 대단하며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감지하고 그를 훌륭한 인물로 양성하였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온정을 베풀었고, 환자들을 돌보면서 탁발 생활을 계속하였다.
제노바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9월 15일)도 그에게 늘 자문을 구하였고, 사보이아(Savoia)의 공작 카를로 1세는 자신의 고해신부로 그를 모셨다. 그는 소위 “숨마 안젤리카”(Summa Angelica)라는 윤리 신학서를 저술하였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의 임기 중 모슬렘의 침공이 있었을 때 작은 형제회는 위험에 처한 지역 국민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안젤루스는 언제나 제일 위험한 지역에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1491년 80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선교단의 책임을 맡을 정도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Innocentius VIII)가 그를 주교로 승품시키려 하자 그는 끝내 거절하였다. 그는 항상 겸손하였다.
여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구걸하였다. 그는 마지막 2년을 쿠네오(Cuneo)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84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