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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당한 인생 (눅 3-118)
2025년 4월 4일 (금요일)
찬양 : 아 하나님의 은혜로
본문 : 눅 15:25-32절
☞ https://youtu.be/fcdbjqujqKI?si=RzF9KEU5Ee9C-KON
오늘은 아침에 라마나욧선교회와 함께하시는 모든 분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오랫동안 함께하시는 소중한 분들의 삶과 가정과 자녀들 그리고 섬기시는 교회와 산업의 현장들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한다.
오늘은 대한민국 대통령 탄핵 사건의 판결이 있는 날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소중한 자리가 되고, 이 일로 나라가 속히 혼란을 그치고 새롭게 일어서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금요세미나가 있고, 소중한 만남이 있는 날이다. 모든 시간 라마나욧선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함께하는 작은 교회들과 사역자들에게 힘을 주시는 은혜가 성령님을 따라 충만하기를 간절함으로 기도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잃어버렸던 아들 탕자가 돌아오자 모두가 즐거워하고 있고, 아버지는 큰 기쁨으로 아마 춤을 추셨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밭에서 열심히 일하다고 돌아오며 이 소리와 이유를 듣고 보인 반응이 놀랍다. 28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여기서 첫째 아들의 반응인 <노하여>라는 단어가 주목된다. 이 단어는 헬라어 ὀργίζομαι (orgizomai)의 수동태 형태로 "분노하다, 화를 내다"는 의미다.
이것은 강한 분노, 격노를 나타낸다. 지금 첫째 아들은 서운함 정도가 아니라, 불의에 대한 격분이나 억울함을 느끼고 있다.
첫째 아들은 지금도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왔는데, 재산을 다 탕진하고 온 둘째를 위해 잔치를 열고, 자신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이것이 억울하고 화가 난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첫째의 시선에서 둘째는 아버지를 힘들게 한 자식이다. 거기에 자기 재산을 다 탕진한 실패한 자이다. 그에게 동생은 잃어버렸다가 찾은 동생이 아니라, 실패하여 자신의 재산을 축낼 존재로 보여진 것이다.
그런 동생을 위해 자신에게는 한 번도 해주지 않은 큰 잔치가 벌어졌으니 화가 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이런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그를 권한다. 여기 <권한대>라는 헬라어 단어는 παρακαλέω (parakaleō)의 미완료 시제로 "부드럽게 설득하다, 간청하다, 위로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미완료 시제이므로 아버지는 사랑과 인내로 계속해서 그를 설득한 것이다. 애정 어린 설득과 간절한 요청으로 말이다.
그러자 첫째가 마음에 가두었던 울분을 쏟아낸다. 29-30절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첫째 아들은 오랫동안 성실하게 아버지를 섬겼다. 하지만 염소 새끼하나 주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수고에 대해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신이 누려야 할 보상을 동생이 가로챘다는 것이다.
그는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과 소외감을 느꼈다. 이로 인해 정죄의 마음이 자라났다. 요약하면, 그는 동생을 인정할 수 없었고, 자신은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그는 자신이 누려야 할 보상을 동생이 가로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동생을 ‘내 동생’이 아닌 ‘이 아들’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동생의 과거를 들춰내며 <창녀들과 함께 재산을 삼켜 버렸다>라고 강조한다.
그는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외친 것이다. 아버지의 잔치를 베푼 일에 대해 서운하며 아버지가 동생을 더 사랑한다고 오해하며, 원망한 것이다.
첫째 아들의 가슴에 있는 소리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나는 평생 충성했는데, 왜 나는 인정받지 못하고 저 죄인인 동생은 환영받는 거지?>이다. 아버지의 큰 사랑이 원망이 되고, 불공평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사랑을 조건적 거래로 생각한 것이다. 동생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불공평하다는 원망과 비교의식에 나온 열등감으로 채워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첫째 아들이 이런 감정에 휩싸인 근본적인 원인은 관계의 왜곡과 자기 의(義)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첫째 아들은 자신을 아들이 아닌 종으로 여겼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사랑이 아닌 거래로 받아들였다. 결국 이 왜곡된 인식이, 분노와 억울함의 뿌리가 된 것이다.
첫째 아들은 사랑을 거래로 이해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용서를 통해 사랑을 경험했음을 묵상한다.
나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이런 어리석음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아침이다. 탕자가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여기며 돌아왔듯이, 첫째 아들도 아버지를 섬겼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여겼지만, 첫째는 종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는 사랑을 거래로 바꾼 것이다.
분명 아버지는 늘 그를 아들로 여겼고, 아버지의 것이 모두 자신의 것임에도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지 않았다고 분을 낸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공로와 인정받기에 급급한 인생을 산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한 결정적 실수임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동생은 동생이 아니라 자신이 받을 것을 빼앗아 간 원수가 된 것이다. 이런 심정이 바로 바리새인과 내 안에 있었던 삶임을 자백한다.
그는 아마 아버지와 함께하는 축복의 시간을 동생을 부러워하며 지내지 않았을까?
이러한 첫째 아들의 반응은 단순한 감정 폭발이 아니다. 그의 태도에는 깊이 박힌 인식의 문제가 담겨 있다. 정리해보면 첫 번째는 동생이 받은 용서를 기뻐할 마음이 없었다. 두 번째는 동생이 받은 은혜를 자신이 손해를 본 것처럼 느꼈다. 세 번째로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종으로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낀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품에 있으면서도 더 노력해서 인정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사랑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살았던 첫째 아들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다. 이제 후반전은 아들로서 살기를 결단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자녀됨은 노력의 결과가 아닌, 은혜의 선물이다. 다시 이런 어리석음의 자리에 빠지지 않기를 다짐한다.
주님, 아무 조건 없이 저를 영접하시고,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허락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떠한 행위나 공로도 자녀됨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이제 아들이 되기로 결단합니다. 더 이상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나는 사랑받고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중보기도 제목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 중보기도 세미나 교재가 하나님의 뜻을 담아 출판되도록
1. 웨이브리즈 플랫폼의 콘텐츠 제작이 주님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2. 목회사관학교를 통해 이 시대를 이끌 진짜 목사가 세워지도록
3. 30억의 재정 공급을 통해 선교회가 새로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4. 라마나욧선교회 행정 시스템이 섬김을 위한 최적의 구조를 찾도록
5. 스페이스 알 사역을 통해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만의 방식을 세워가도록
6. 틴케이스가 2025년 세운 계획들이 세워져 가도록
7. 작은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져 가도록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도록
8. 충주 라마나욧이 구체적인 사역 방향을 정하여 세워지도록
9. 박정제목사를 비롯한 팀원들 모두가 성령안에서 충만하도록
삶에 적용하기 : 다음 질문을 통해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1. 나는 하나님을 정말 ‘아버지’로 인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인과 종’의 관계로 느끼고 있는가?
2. 내 안에도 누군가를 향한 비교, 분노, 열등감이 감춰져 있지는 않은가?
3.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내 정체성의 기준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공로 중심의 신앙에 매여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