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월요일(마르8,11-13)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어라
미국에서 교포 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님 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되고 은총도 그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좋아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기보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기를 소망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마르8,1-10).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집과 몰이해 속에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맞는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성모님과 일치한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우리가 머무는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첫댓글 페드로 오렌테의 <빵과 물고기의 기적>, 1605년경, 상트페트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온 신자들의 모습이 멀리까지 보인다. 요한은 5000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고 썼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때 취한 제스처는 축복을 내리는 자세이다. 갈릴래아 호수 옆, 물이 무성한 언덕 위에 앉아 있는 신자들 사이로 수많은 음식 바구니가 지나간다. 남은 음식은 12바구니나 되었다. 보리빵이 담긴 바구니는 소박한 첫 번째 음식봉헌이었다. 왼쪽에 앉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사도 필립보는 각 신자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데에도 200데나리온이 들 것이라고 계산했다.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든 소년은 이 그림이 요한 복음서에 근거했음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소년 옆에 있는 사도가 베드로 형제인 안드레아임을 알 수 있다.
아멘!~~~
묵상 하고갑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
아멘 _, 감사합니다 ♡
주님, 표징믈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주십시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