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밀양 아랑 유래
아랑전설(阿娘傳說)은 억울하게 죽은 아랑이 원령이 되어 자신의 원한을 푼 뒤 변고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아랑은 경상도 밀양부사의 딸로, 이름은 윤동옥(尹東玉)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에게서 자랐는데, 어느 날 밤 통인(通引)과 작당한 유모의 꼬임에 빠져 달구경을 나갔다. 통인 주기가 아랑을 겁간하려 했고, 아랑은 끝까지 항거하다가 끝내는 칼에 맞아 죽고, 대숲에 버려졌다. 부사는 아랑이 외간 남자와 내통하다 함께 달아난 것으로 알고 벼슬을 사직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밀양에 오는 신임 부사마다 부임하는 첫날 밤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어 모두 그 자리를 꺼리게 되었다. 이때 이상사(李上舍)라는 담이 큰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하여 왔다. 부임 첫날밤에 나타난 아랑의 원혼에게서 억울한 죽음을 들은 그는 원한을 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이상사는 곧 주기를 잡아 처형하고 아랑의 주검을 찾아 장사를 지내주니 그 뒤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영남루 밑에는 아랑의 혼백에게 제사지낸 아랑각(阿娘閣)이 있고, 《밀양아리랑》도 이 영남루 비화(悲話)에서 발생하였다 한다.
2. 밀양아리랑에 숨겨진 쓸픈 전설
3. 밀양아리랑
1) 역사
<밀양아리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매일신보』 1926년 10월 1일자에 소개된 김금화의 음반 ‘일츅조션소리판’의 목록에 보이며, 1929년 『별건곤別乾坤』 에 수록된 차상찬의 「밀양의 7대 명물」 중 ‘구슬픈 밀양아리랑’이 두 번째 기록이다. 이후 1930년대에는 기생들에 의해 음반화가 이루어지면서 지역을 막론하고 유행가로 불리면서 통속아리랑으로 자리 잡았다. 누구나 알고 쉽게 부르는 노래, 유행가로서의 장점을 갖춘 특징으로 인해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아리랑>과 <광복군아리랑>으로 개사해서 군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후렴구를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광복군 아리랑 불러나 주소”로 바꾸었고 가사 내용도 군가에 맞게 바꾸어 부른 것이다. 이는1946년에 간행된 『광복군가집』과 김구의 『도왜실기』에 수록되어 있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중공군들이 밀양아리랑을 <빨치산 유격대아리랑(파르티잔아리랑)>으로 개사해서 불렀는데, 이는 1953년 중공군 발행 군가집인 『조선지가朝鮮之歌』에 <파르티잔아리랑巴爾奇展的阿蔾朗>으로 수록되어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밀양아리랑>, <통일아리랑>으로 개사되어 노동가로도 불러졌다. 이렇듯 <밀양아리랑>은 경상도지역의 대표 민요이면서 통속민요이고,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장점으로 인해 시대별로 변용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경상남도 밀양 지역에서는 매년 개최되는 밀양아리랑대축제를 비롯하여 밀양아리랑보존회, 밀양아리랑콘텐츠사업단이 결성되어 밀양아리랑체조, 밀양아리랑플래시몹 등을 개발하는 등 전승과 보존에 노력하고 있다.
2) 가사
(후렴)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다 틀렸네 다 틀렸네/ 니가 잘나 내가 잘가 그 누가 잘나 구리백통 지전이라야 젤 잘났지/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 오네/ 아실랑살랑 춥거들랑 내 품에 안기고 비개춤이 높거들랑 내 팔을 비어라/ 물명주 단속곳 널러야 좋고 홍당목 치마는 붉어야 좋다/ 옥양목 겹저고리 연분홍 치마 열두 번 죽어도 못 놓겠네/ 앵기면 앵기고 말면 말지 고개만댕이 얹어 놓고 만단 말가/ 남의 집 서방님은 가마를 타는데 우리 집 저 문뎅이는 밭고랑만 탄다/ 길 가지 담장은 높아야 좋고 술집의 술어마씨는 곱아야 좋다/ 시어머리 죽고 나니 방 널러 좋고 보리방아 물 부어 논 게 생각이 난다/ 세상에 핀 꽃은 울긋불긋 내 마음에 핀 꽃은 울렁울렁
3) 악보
※ AI기술로 본 밀양아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