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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깨달음에 대하여(改正)
글을 쓰는 일이 모두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특히나 웃고 즐기는 글이 아니라면 생각과 깨달음을 말하는 데는 올바른 자세(姿勢)와 품위(品位)가 있어야 한다. 지난번 본인이 쓴 글에 작은 오류가 있어 크던 작던 잘못된 점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심정으로 글을 다듬었다. 심오(深奧)한 말에도 개그맨이 말하는 것과 스님이 말하는 소리가 다르고, 같은 스님이라도 사미승이 말하는 것과 덕승(德僧)이 말하는 소리가 다르다. 같은 물이라도 벌이 먹으면 꿀이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항상 경계하면서 없는 것을 마치 있어 보이려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말로 부처님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한다. 망인사대위자신상(妄忍四大爲自身相) 육진연영위자심상(六塵緣影爲自心相) 유망집고(由妄執故) 비유혹차허공자성(非唯惑此虛空自性) 역부미피실화생처(亦復迷彼實花生處)
4대(水火地風)를 자기의 신상으로, 6진(色聲香味觸法)의 그림자를 자기의 심상(心相)으로 망령되게 알고 있다. 망령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이 허공의 자성을 의심할 뿐만 아니라 저 실제의 꽃이 피는 곳마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원각경(圓覺經)에서 나오는 말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가 깨달음에 대해 논하는 것이 주제넘은 짓은 아닌가 반추(反芻)하면서 지나온 발자국을 돌아보며 군맹무상(群盲撫象)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편견이나 되바라지는 것은 없는지 겸손(謙遜)한 자세로 시종일관(始終一貫) 견지(堅持)하고자 한다. 생각은 이성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일 또는 행위에 대한 사단(事端)이라 규정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이 되며 결자해지(結者解之)도 본인에게 있다. 이러한 수많은 생각(觀念)은 밖(空間)에서 안(精神)으로 들어오는 것이지 내 안에 뇌에서 무슨 작용을 하여 기억해 내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에서 처리된 결과 값을 모니터로 보여주는데 모니터의 백라이트(발광체)가 기능을 하지 못하면 정보를 인식할 수 없다. 사람의 뇌는 이러한 발광체 역할을 한다고 봐도 무난하다. 그렇다고 사람의 뇌(머리)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지혜가 작용하여 사물의 본질이나 이치(理致), 진리(眞理) 등을 골똘히 생각한 끝에 궁극적(窮極的)으로 알게 되는 것, 곧 행복(幸福)을 의미한다. 만약 생각을 하는 대상이 부처님이라면 모든 생각이 곧 깨달음(智慧)이고 또는 반야(般若)라 말할 수 있으며 법(法)이 된다. 깨달음에는 어떤 것을 더하거나 뺄 것이 없으며 완벽(完璧)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만 인류가 그래왔듯이 깨달음을 뛰어 넘는 그 무엇이 존재할 수도 있다. 이는 조각장이 어떠한 상(像)을 만들려고 수천, 수만 번의 칼질을 하다가 더 이상 칼질할 때가 없는 지경에 이를 때를 말한다.
사람이 깨달음을 얻는 행위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마음과 이성의 경계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생각은 스스로 내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과보나 인연으로 인하여 외부에서 내 안으로 들어오는 삼라만상(參羅萬像)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좋은 일이면 즐겁게 스쳐 지나가므로 깊이 생각할 것도 없지만 그것이 나쁜 일, 불미스러운 일인 경우에는 마음에 도덕적 판단력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때문에 심기(心氣)가 불편하게 되고, 마음과 이성 사이에서 도덕률(道德律)이 작용하면서 생각이 혼란스러워 심신(心身)이 병환(病患)으로 이어지게 된다. 참고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Sound Mind, Sound Body)이란 말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가난한 집보다는 부잣집에 태어나는 것이 좋은 것이고 머슴도 부잣집에서 하는 게 낫다는 통념이 있을 뿐, 떨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느냐 생각하면 역경(逆境)과 시련(試鍊)이 큰 사람을 만든다는 데에 다른 이견(異見)이 없다. 생각이 작용하는 것은 이성(理性)이고, 도덕률이 작용하는 것은 마음이다. 이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고, 숨기려 하거나 외면하면 도덕불감증(道德不感症)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실천이성과 도덕적 삶에 대해서는 칸트(Kant, 1724~1804)에서 이미 자세하게 다루었다.
나, 내가, 제가, 저가, 소인(小人), 자신(自身), 오(吾), 우(愚), 이 몸(己), 본인, 자아(自我), 무아(無我), 하나님, 자연(自然,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고, 정혜(定慧, 선정(禪定=마음)과 지혜(智慧=이성(理性)))가 스스로 존재(存在)하고 소멸(消滅)하는 것을 이름), 우리(1인칭 복수) 등 자신을 지칭하는 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자신의 마음을 지칭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은 없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마치 전기는 존재하지만 전기의 입자(본질)인 전자(電子)는 알 수 없는 것과 같이(과학이 고도로 발전하면 전자(電子)를 눈으로 볼 수도 있다.) 것으로 공기와 마찬가지로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마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규명할 수 없는 것일까? 여기에는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한 때의 마음 상태와 그것을 깨달았을 때(무아가 인식되어진 상태)의 지칭이 서로 극명(克明)하게 다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산은 산, 물은 물에서 다루었다. 주체적 존재가 보는 자연과 객체적 존재가 보는 자연은 보는 것과 보여 지는 것(순수이성비판)의 생각의 전환에 따른 인식의 변화를 말한다. “나”는 이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는 말로 전자의 경우 비존칭어로 사용되며, 후자에 경우는 본질적 자아(自我) 또는 무아(無我)를 지칭하기도 사용한다. 하나님(“나”라는 존재가 매우 많다.)은 하나뿐인 유일신(唯一神) 여호와(야훼)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화의 이질적인 측면에서 논리적 비약(論理的 飛躍)이 있으며 규정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하여 믿음에 절대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 가지는 정의롭고, 올바른 자세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님은 매우 큰 존재를 의미한다(하나=자연(自然)을 가르킴). 하느님은 하늘님으로 하늘(온누리)에 계신 창조주(조물주, 자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근대 이데올로기 시대에 북한에서 인민(人民)이란 말을 쓰기 시작하자 남한에서는 국민(國民)이란 말을 애써 만들어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둘 다 보편화 되어 거부감 없이 사용하지만 사실 전자가 더 올바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하느님을 지칭하는 존재는 깊게 따질 것도 없이 사실상 동일하다. 신(神)이란 사람 또는 자연에 있어 정령(精靈), 영혼(靈魂) 또는 혼령(魂靈)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만물이나 사람의 이성(理性) 또는 관념(觀念)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신에 존재라는 것은 사람이 입증하가 어려운 대상이며 사람이 바위(돌)를 보고 저 바위에 신이 있다 없다를 함부로 단언(斷言)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어느 인간이 신에게 말하기를 “신이시여 저에게 천국(天國)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신을 믿겠나이다.”하자 신(神)이 말씀하시길 “내가 이미 다 보여주었는데 뭘 더 보여 달라고 하느냐?”이는 마치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안심법문(安心法門)과 유사하다. 보편적으로 신(神)이라는 것은 악(惡)하지 않으며,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년을 주시고, 사람에 대하여 가감(加減)이 없으며 신(神)은 오직 자연과 사람의 정신에 의지하며 지배하기도 한다. 특히 사람의 영혼에 직접 작용하면서 도덕적 행위에 있어 내재적(內在的)으로 작용한다. 기독교(基督敎), 무슬림(穆斯林)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神)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찰떡같이 믿고 있으나 자연은 우주만물을 의미하며 우주만물과 사람에게 깃들어 영혼의 과보(果報)에 따라서 질서를 잡아가는 것으로 자연과 사람에 의식(意識)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면 신(神)을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완벽하고, 절대적인 존재(天神)로 인식하지만 때로는 외로워서 눈물도 흘리신다고 시인은 말한다. 신(神)은 스스로 존재하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존재가 아니며,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시며, 예지능력(豫知能力)을 가진 것으로 자연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의지처(依支處)로 삼고 오로지 이성(理性)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헤아려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존재하고 소멸하는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은 오로지 만휘군상(萬彙群象)의 자연(自然)과 사람 밖에는 없다. 사람에게는 인식(認識)의 주체(主體)라는 것이 없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의미는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신(神)이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바꾸어 말하면 영혼(靈魂)이라는 존재가 또 다른 영혼(靈魂)에 얼(꼴)과 소리를 인식하고 판단하여 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사람이 윤회(輪廻)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혼령(魂靈)이 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에는 항상 이성과 함께 연동하여 작용하는 큰마음 또는 한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이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주어지게 된다. 자연 앞에서 사람이 한없이 작아 보이는 것은 자연에 깃들어 있는 정령(精靈)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이성과 마음은 서로 같지는 않지만 동시에 존재하고 동시에 사라진다. 이성은 서로 다름을 인식하고 마음은 서로 같음을 인지한다. 이 서로 다른 개념이 서로 다르게 작용하면서 동시에 존재하고 동시에 사라지는 현상을 불교에서는 불이(不二)라고 말하며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 부처(佛陀)이며, 자연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같다. 결국 사람은 자연의 정기(精氣, 물, 불, 땅, 바람)를 받고 이 세상에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숙명적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신과 인간은 물과 기름의 관계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참회(懺悔)한다. 그렇다면 신은 영원히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늘에 별이 빛을 발하다가 소멸하듯이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영혼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사대봉사(四代奉祀)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잘못 쓰게 되면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따라서 마음의 주체가 되어야 할 존재가 한 번 쳐다볼 겨를도 없이 수동적인 존재로 바뀌게 되고, 결국 눈뜬장님이 되고 만다. 마음을 잘 쓰면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되어 우주를 담고 남을 수 있을 정도로 무한하게 크다.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루게릭병으로 전신불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우주를 담아 내지 않았던가? 어떻게 하면 마음을 잘 쓸 수 있을까? 사람을 오직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선(善)한 마음은 끊임없이 베풀어 행하라. 공덕을 행하고 그것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말라.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탐진치(貪瞋痴)와 칠정(七情,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싫어함(惡), 바람(欲))에서 벗어나 평온(平穩)함과 항상심(恒常心)을 지속가능성(持續可能性)으로 수행정진(修行精進)해 나아가야 한다. 우주를 마음에 담아내는 일은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으며, 신(神)도 이것은 어쩌지 못하는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사람)은 자연과의 동기감응(同氣感應)을 통해 혁명적 사실을 증명해 내셨기 때문에 모든 천신(天神)들이 부처님을 우러러 존경(尊敬)하게 되었다. 철학(哲學)이란 하늘에 있는 도(道, 形而上學)를 인간이 간절히 간구(懇求)하여 이 땅위에서 이성으로 널리 베풀어져 사람을 두루 이롭게 하는 논리적 관념론을 말한다. 마음을 무슨 그릇에 비유하는데 적절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렇다고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마음에는 시공(時空)에 경계가 없으므로 오랜 시간을 두고 겪어봐야 아는 경우가 많으며, 나와 뜻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그릇이 크고 작음으로 속단하는 것은 보편적 도덕법칙 기준이 모호한 상황에서는 부적절한 표현으로 여몽(呂蒙)의 괄목상대(刮目相對)는 이를 반증한다. 영혼은 욕+색(欲+色)이 존재하므로 이성적으로 구별이 가능하지만 마음은 욕+색+무색(欲+色+無色)이므로 마음은 구별에 대상이 아니다. 사람이 수행(修行)을 한다고 하는 것은 욕과 색을 올바른 행위를 통해서 소멸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계(欲界, 속세)는 탐진치(貪瞋痴)의 생각과 마음이 갈등(葛藤)으로 복잡하게 작용하다보니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복잡한 세상에서 행복의 근원인 자신의 욕심(마음)을 비워나가면서 복잡한 삶을 단순화, 최소화 시키는 것은 지혜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깊고 오래 생각(Think)할수록 감사(Thank)함도 더욱 커진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항상 처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하는 마음가짐을 굳게 지니며, 아직 본인에 생각이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가야 할 길이 멀다)는 여지(餘地)를 항상 남겨두고 잘못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 자리에서 바로잡을 결심이 되어 있다. 형의상학(形而上學)적인 내용은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앞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고 정각(正覺)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그늘에서 안주해서는 안 된다. 가르침을 받아 깨닫는 것은 내 것이 결국 아니기 때문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에서 “아(我)”는 마음(心)을 의미한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말에도 “혼자”는 마음을 보기 위함이다. 징기즈칸은 “이 넓은 초원에 어디 길이 따로 있겠는가? 내가 가는 것이 길이다.” 여기서 “내가”는 ‘마음이 가는 바’를 의미한다.
부처님이 29살에 왕자의 신분으로 모든 것을 두고 유성출가(踰城出家)를 한 것에 대해서 미친 짓으로 말하고 그 미친 짓 때문에 위대한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었다고 말하는 스님이 있다. 부처님의 전생담을 보면 호명보살(護明菩薩)로 있을 시절에 수많은 공덕을 쌓았다. 그때마다 부처는 “너는 이러한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반드시 부처로 태어날 것이다.”수기(授記)를 여러 번 받은 인연(因緣)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단지 마음이 행하는 바를 따랐을 뿐 유성출가, 설산수행(雪山修道)은 깨달음의 과정일 뿐 그것이 무모한 미친 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설산수행도 부처님이 자신이 고행(苦行)을 6년 동안 해 보았더니 영 아니더라 말씀하시며 “수행자는 수행함에 있어 자신에 몸을 학대하지 말라”고 강조하셨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 본다. 참고로 세계(世界)는 불교용어이며, 중국은 천하(天下)를 사용했으며 우리말로는 ‘누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