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시신을 기증하는 분들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실을 둘러본 적이 있다.
지하의 넓은 방에 가로 세로 줄을 지어 장방형의 실습대들이 놓여 있었다.
일부 실습대 위에 시신들이 천정을 향한채 깊은 침묵 속에서 자기의 육신이
해체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한 시신을 살펴보았다.
손과 발꿈치에 노랗게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한 세상을 사는 동안 노동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이제 그는 죽어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일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누워 말이 없는 그가 다시 일어나면 말을 한다면 어떤 얘기를 할까?
나는 의과대학생들의 실습과정을 통해 해부가 끝난 시신이 놓인
실습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교한 기계가 조심스럽게 부품별로 분리되어
정리 되어 있듯 사람의 몸이었던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하얀색 실 같은 신경줄이 마치 전선같이 인간 내부의 허공을 오가고 있었다.
윗부분에 있는 남자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살아온 세상을 향해
눈을 뜬 채 무심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눈을 본 것 같았다.
수정같이 맑은 눈동자였다. 죽은 사람의 눈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다.
모든 야망과 욕심이 사라져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또다시 그 넓은 방을 돌아보았다. 실습실의 한 구석에 철사로 사람의
뼈들을 엮어 만든 표본이 허공에 걸려 있었다.
그 밑에는 내가 아는 유명한 성직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의과 대학 에 자신의 시신을 기증한 분이었다.
바른 소리를 하다가 괴한들에게 살해된 분이었다.
그분은 뼈의 표본이 되어 ‘말 없는 말’로 여러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인간의 몸이란 내남없이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고. 몸을 위한 모든 야망과
욕심은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자기를 비우고 남을 채우는 사랑이 시신기증이라고.
그걸 스스로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위대해 보였다.
내가 아는 재벌가의 회장이 있었다. 백년이 넘는 뿌리 깊은 한국의 명가였다.
그 회장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경주 최부자와 힘을 합쳐 신문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대학도 조선인주식회사도 만들었다. 교육으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고 언론을 통해 식민지인들의 영혼을 깨웠다.
그 손자였던 그 회장은 살아있을 때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경복중학교에 입학했더니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내가 조선 최고 부자의
아들이라고 소개했어요. 그때까지 나는 우리 집이 부자인 줄 깨닫지 못했어요.
찌그러진 양철 필통을 가지고 다니고 꿰맨 양말을 신고 다녔으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수채가에 떨어져 있는 밥알을 주워 물에 씻은 후 손자인
내 앞에서 잡수시면서 그렇게 절약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죠.”
그 회장에게서 나는 진짜 부자의 검소함이 어떤 것인지를 봤다.
그는 항상 구겨진 면바지에 농구화를 신고 다녔다.
회장실의 소파도 찢어진 부분을 스카치테이프로 발라놓은 걸 본 적이 있다.
한번은 그가 깨끗하게 입은 쟈켓을 보고 얼마 동안 입었냐고 물었다.
그는 이십년이 넘게 입었다고 했다. 세월이 가고 노환으로 그 회장이 병원에 있을 때였다.
그는 몰래 병원측에 자신의 시신을 의과대학생들 해부용 실습자료로 기증했다.
가족도 돌이킬 수 없는 단호한 의사표시였다. 그 집안은 대대로 명당에 조상을
모신 집안이었다. 해부자료로의 시신기증은 명가의 전통을 깨는 파격이었다.
재벌 회장의 시신기증이 마지막으로 그가 완성되는 순간 같았다.
그것은 순간 한 줌의 재가되어버리거나 땅속에서 벌레와 구더기에게 먹혀가는
껍데기를 가장 가치있게 사용하는 방법인 것 같았다.
내가 존경하던 논객 김동길 박사가 저세상으로 건너갔다.
그가 죽기 전 연세대 의료원장에게 자신의 뜻을 밝힌 글이 공개됐다.
원고지 한 장에 또박또박 자필로 쓴 그 글의 내용은 이랬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 추도식은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곧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기증하여 의과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를 바라며,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재산도 몸도 세상에 다 내놓고 갔다. 마지막까지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었다.
그런 촛불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옮겨 붙을 때 세상은 환히 밝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