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너는 아느냐 (1999) - 엄상익 변호사
아들아 아들아 !
아버지와 아들이 법정에 서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저 놈은 아들이 아닙니다. 제가 죽어도 저 놈이 위선을 떨면서
상주노릇을 하거나 저놈이 내 제사상 앞에 있는 것도 싫습니다.
저 놈한테 들인 유학비용 결혼 비용을 모두 돌려받고 싶어요.
단 한 푼도 상속해 주기 싫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아버지가 재판장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재판장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들 교육을 위해 무리해서 강남으로 이사까지 가고
과외를 시켜가며 공부 공부하며 키웠습니다.
유학을 보내고 집안 기둥이 휘어 지도록 비용을 들여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저 놈이 대기업에 들어간 이후는 아예 부모와 연락을 끊고 삽니다.
새해가 되어도 세배를 오지 않고 명절이 돼도 10년간 찾아온 적이 없어요.
엄마가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손자 손녀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패륜아인 저 놈에게 들인 모든 돈을 돌려 받고 싶은 심정입니다.”
재판장이 이번에는 아들에게 항변할 기회를 주었다.
“저는 유학을 가서 개인주의를 배웠습니다.
저는 독립적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부모를 찾아가고 안 찾아가는 건
나의 자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집은 제 프라이버시의 영역 입니다.
부모가 오려면 미리 저나 와이프의 허락을 얻고 시간과 장소를 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손자 손녀를 보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 합니다.
부모는 교육을 하고 아들은 봉양을 해야 한다는 채권 계약을 원고와 맺은적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재판장에게 아들의 말 중 뭔가가 걸리는 느낌 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재판장이 아버지 쪽을 가리키며 아들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구입니까?”
“원고입니다.”
“아무리 법정에서 마주섰어도 아버지는 아버지 아닙니까?
아버지를 굳이 그렇게 원고라고 불러야 하겠 습니까?”
판사는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 눈에 은은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변호사를 하다보면 그런 광경을 종종 보게 된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빌딩 상속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아버지의 묘에 가서 불을 지르기도 하고
몰래 아버지를 죽이고 검거된 아들도 있었다.
모두들 부잣집 아들의 행태였다. 왜 그런 관계들이 됐을까.
부모가 건강할 때도 찾지 않는 아들은 아버지가 요양원으로 가면 관심은 가질까.
어쩌면 아들은 현대판 고려장을 지낼 것 같기도 하다.
영어 단어 하나 수학 문제 하나 더 알도록 교육을 시키는 게
인간 교육을 시키는 것 보다 더 중요 하다고 여기는 세상이다.
인간보다 전문직이나 대기업 사원의 지위를 더 귀중 하게 여긴다.
소송을 제기한 그의 손자가 커서 똑같은 행동을 할때 아들은 어떨까.
공부 공부 하면서 인성보다 영어를 더 중요시 했던 아버지 탓은 없을까.
아들이 잘못하는 건 맞지만, 그 아들을 그렇게 키운건 그 아버지가 아닐까.
세상이 모두 그런 이들만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전혀 다른 아들의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오래 전 판사의 실무를 배우기 위해 성남 법원으로 갔을 때였다.
같은 방에서 내 나이 또래의 판사와 친하게 지냈다.
격의 없이 법원 앞 빵집에 함께 가기도 하고 성남의 3류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어느 날 판사 실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집은 정말 가난했어요. 아버지가 택시를 운전해서 우리 5남매를 키웠으니까요.
아버지가 힘들게 돈을 버는 걸 보고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판사가 됐죠.
지금도 개인택시를 모는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어요.
내가 매일 아침 법원으로 출근 전에 하는 일이 뭔지 알아요?
아버지가 모는 택시를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닦으면서 이놈아 고맙다고 하죠.
그 택시가 우리를 살게 했 으니까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고슴도치 같은 관계가 있다. 효자인 아들도 있고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성경 속의 아버지 같은 존재도 있다.
나의 아버지는 말없이 뒤에서 은은한 사랑의 향기를 보내는 아버지였다.
나는 내 아들에게 어떤 아버지 인가를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