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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글은 스마트폰 📸 와이드(WID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고통중 주의 신비 요한복음 9장1-3절 / 김병삼 목사 ➤“1.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매 2.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죄를 지었기에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나이까? 그의 부모이나이까? 하니 3.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요 9:1-3) 얼마 전 여러분에게 물어봤던 질문의 답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입니다. 그럼 1위부터 5위까지 함께 보시겠습니다. 1. 온 만물을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처럼 악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56.9%) 2.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제거하시면 좋겠다. (26.6%) 3. 착한 사람에게 고통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6.7%) 4.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아무 이유가 없다. 내 책임도 하나님 책임도 아니다 (5.6%) 5. 안 믿는 자에게 오는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4.2%) 죄와 고통의 인과 관계? 악과 고통의 문제는 인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문제입니다. 만약 고통의 문제가 ‘인과관계’로 설명이 된다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착하게, 선하게 그리고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잘되고 평안하며 고통이 없다면, 반면에 못된 사람들, 죄인들이 고통을 받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한 이런 세상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평하지 않다.’ 라고 생각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도덕가들과 지혜 자들은 이 문제를 인과관계를 가지고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잠언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면 반드시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7 ¶ {창조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 1:7) ➤“33 그러나 누구든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안전히 거하며 재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하리로다.”(잠언 1:33)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인 지혜의 법칙이 해당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질문을 던진 것이 욥기입니다. ➤욥기 1장1절에 나타난 그의 소개를 보십시오. “1.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 보편적인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그는 무조건 잘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엄청난 시련이 다가옵니다. 욥기 1장 6-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련을 허락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의인도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수 있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에서 악한 세력에 의해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것이구나!” 성경이 이렇게 증거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씀이 우리를 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법칙을 용납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비(非) 정상적인 법칙이 나에게 적용된다면 정말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또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는다 해도, 나쁜 놈들이 고통을 받으면 우리가 외면할 수 있고, 나에게 책임 의식이 안 생기겠지만, 선한 이들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게 합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에 의하면 나면서 소경된 자가 죄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어야 마땅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동의를 구한 것입니다. ➤1-2절입니다. “1.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매 2.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죄를 지었기에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나이까? 그의 부모이나이까? 하니”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이 인과의 법칙에 따라 죄로 인한 고통이라면 참으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주님의 동의를 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의외입니다. 참 받아들이기 힘이 듭니다. ➤3절입니다. “3.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고통을 통해서, 그의 어려웠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삶을 바꿔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는 의문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고통이 오랫동안 나에게서 나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계속된다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 병이 고쳐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계획해 놓으셨다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문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만나는 가장 어려운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악' 과 '고통'의 문제입니다. 근본적인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악을 창조하셨는가?” “과연 하나님은 선하신가?”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면,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의 문제를 제어할 능력이 없으신 분인가?”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아니, 만일 그분이 선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악을 통제하시는 분이라면, 내가 당하는 고통, 우리가 경험하는 악의 문제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라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2001년 9월 11일에 있었던 엄청난 테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단지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니 단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시간에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2005년의 쓰나미를 생각해 보세요. 왜 하필이면 그곳에 자연 재해가 일어나서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었어야 했나요? AIDS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잘못 된 수혈로 인해 감염이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그 피를 수혈 받았어야 했을까요? 어떤 비행기가 추락을 했고, 타고 있던 100명 중에 99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한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가리켜서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죽은 99명에게도 이 사건이 기적일 수 있을까요? 정말 하나님이 선하다고 한다면, 선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고 한다면 이러한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혹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신 걸까요? 혹시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벌을 받을 만한 짓을 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런 잘못된 일들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일까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우리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문이 있습니다. 왜 무죄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답해야 하는 것들1-무죄한 사람이 있나요? ➤로마서 5장12절입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통하여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결국 인간들의 죄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선과 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죽음과 고통의 문제를 안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죄와 고통이 인과 관계에 있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인간 세상에 정의라는 것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자연의 반란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당하는 고통을 두고, "나는 무죄하기에 억울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중에 혹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과연 하나님께서 무기력하기 때문일까요?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이 가졌던 질문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박국 1장13절입니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셔서 악을 보지 못하시며 또 불법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배신하는 자들을 바라만 보시고 사악한 자가 자기보다 더 의로운 자를 삼키는데도 주의 혀를 억제하시나이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즉, ‘악’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에서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면 그 범위에서 벗어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불의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큰 죄를 짓지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의 모든 삶이 도덕적 실제적 죄에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지구상에 나타나는 많은 재앙들에 여러분이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편안하게 사용하는 냉장고와 자동차가 그 주범입니다. 여러분이 먹고 즐기는 고기를 만들기 위해 나무들이 쓰러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오늘날과 같은 선거제도에서 여러분이 투표한 사람 그 사람들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도 여러분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결국 그 누구도 온전하다 말할 자가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9절을 보십시오. “9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결국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심이 하나님의 무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참으시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때에 심판하실 날이 다가 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답해야 하는 것들2-의미 있는 고통이 존재하는가? 그러면 성경은 우리가 경험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 부분에 대하여 본문은 소경의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2-4절에서, “2.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3.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환난 중에도 우리가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역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성경은 ‘고통’ 그 자체보다 그 고통이 지니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일들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고 있으며,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신앙적인 접근이라는 것입니다. C.S Lewis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왜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느냐 질문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기 보다는, 왜 우리들 모두가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조니 에릭슨 타다와 스티브 에스트는 [하나님의 눈물]이라는 책에서 고통과 악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1969년 여름 스티브는 한 교회의 주차장에서 조니를 만났습니다. 조니는 전형적인 금발의 백인여성입니다. 2년 전만 해도 같은 또래의 고등학생들과 함께 놀며 가장 인기 있었을 그녀가 지금은 목이 부러져 장애인이 된 채 평생을 휠체어에서 보내야 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첫 만남에서 조니는 스티브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내가 목이 부러져 장애인이 된 것이 하나님과 상관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말해봐.” 당시 스티브는 성경을 무척 열심히 일고 연구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조니, 하나님은 너를 그 휠체어에 올려놓으셨어. 왜 그러셨는지 이유는 몰라. 하지만 하나님과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이유를 알게 될 거야. 이 땅에서 알지 못하면 천국에서는 알게 될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의 목이 부러지도록 하신거야.” 스티브는 그 말을 해 놓고 자신 스스로 얼마나 진부하게 들렸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과연 이 말이 조니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조니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 들였고, 그녀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 우리의 고통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로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 책은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조니를 가장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은 전신이 마비되고 난 후, 누군가가 먹여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밥을 먹을 때마다 질질 흘리는 추한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도, 코를 풀어 줄 사람도, 축축하게 젖은 베개를 바꿔 줄 사람도 없는 병실에서 죽음을 생각했으나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내면에서부터 크게 소리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죽을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 주세요.” 이제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를 풀어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발견해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삶의 고통 가운데서 당신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C. S. Lewis는 “우리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님은 속삭이시고, 우리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은 부르짖으신다.”고 했는데 과연 여러분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얼마 전 있었던 고속도로 사고로 인해 기도원에 갔다 오던 7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해야 했던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건데, 고통의 문제를 보는 하나님의 관점이 존재합니다. 하나님 계획의 핵심과 궁극적인 관심은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아픔이나 가난, 무너진 가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 것인가? 어떻게 복을 향유할까? 등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며, 어떤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도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구원의 열매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도, 38년 동안 병자로 살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편을 다섯씩이나 바꾸어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여인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이 아니었다면 구원의 주님을 진실하게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어제 아내와 함께 준비한 말씀을 나누다가 다시 간증을 해야겠구나! 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의 가족 간증입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아내와 함께 가장 극복하기 힘든 부분이 바로 이 고통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우리교회에서 ‘Mother Wise’라는 성경공부를 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 아내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너무나 쉽게 ‘공주 사모’라고 생각을 한답니다. 젊은 나이에 큰 교회의 사모로서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겉모습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저희 가정에도 아픔이 있는데 그것은 딸아이입니다. 날 때부터 저 체중으로, 그리고 신생아 폐혈증으로 인해 피를 교환해야 했지요. 당시 많은 성도들이 피를 검사하고 맞는 혈액형을 찾았지만, 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나도 뇌성 마비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요.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주셨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그것은 너무나 큰 선물이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딸아이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약을 먹으면서 성장 발달이 늦어지고, 미국에서는 영어를 못해서 그리고 한국에 와서는 이제 한국말이 서툴러서 학년을 낮추게 되었고, 동생과 함께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딸아이가 학교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때마다,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할 때마다 정말 절망적인 상황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딸아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다듬어 가고 계시다는 사실이고,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저희와 동일한 아픔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 간증들과 우리가 이겨나가는 모습들을 통해 교인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분명히 딸아이의 아픔이 우리 가족에게 무척 의미 있는 일임을 고백합니다. “고통은 사명이구나!”라고 깨닫게 하셨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희 가족이 이겨 나갈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늘 그 아픔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쓴 사람을 아십니까? 불의의 화재로 인하여 꽃다운 나이에 화상을 입고 살아있어야 하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던 사람이 ‘지선아 사랑해!’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고백했던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주님의 신비-우리를 다듬어 가심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지만 고통을 당하는 딸아이에게도 과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부분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엄마와 아빠에게 의미 있는 고통의 시간이었다면 우리 딸아이에게도 분명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 끝까지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고,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 아이에게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예술가가 르네상스기의 대 조각가인 미켈란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에 다가설 때 무엇을 보십니까?” “아름다운 모습이 저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봅니다. 망치와 끌을 잡고 그것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다듬어 내는 것이 간단히 말해 내 임무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 망치와 끌을 대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인물 중에 누구를 가장 좋아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좋아합니다. 그가 고통 가운데 고백했던 주옥같은 시편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시편 17편6절, “6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내 말을 들으실 터이므로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 말을 들으소서.” ➤9절, “9 나를 학대하는 사악한 자들과 나를 둘러싸서 죽이고자 하는 내 원수들로부터 내가 벗어나게 하소서.” ➤13절, “13. 오 {창조주}여, 일어나사 그를 좌절시키시고 던져 버리소서. 주의 칼이 된 그 사악한 자에게서 내 혼을 건지소서.” ➤15절, “15 나로 말하건대 나는 의 가운데서 주의 얼굴을 바라보리니 내가 깰 때에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리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윗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일어난 고통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들이었을까? 골리앗을 죽이고 민족의 영웅이 된 순간부터,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자의 세월을 살고, 미친 척하며 자신의 목숨을 구걸해야 했던 시절들, 그에게 일어나는 수없이 많은 정적들과 반란, 더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쫓겨 도망가는 비참한 상황들, 백주 대낮에 자신의 아들이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자신의 처첩(妻妾)들을 범하는 것을 바라보며 다윗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나님은 왜 그런 다윗의 삶에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중심이 좋았던 그 다윗에게 그런 고통들을 가져다 주셨을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끊임없이 다윗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 가운데 한 번도 다윗을 버려본 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다윗은 영안이 열려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 힘들었지만 소망이 끊어지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시편 17편 15절입니다. “15 나로 말하건대 나는 의 가운데서 주의 얼굴을 바라보리니 내가 깰 때에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리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먼 훗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살아온 삶의 족적을 생각할 때 분명히 감사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19절,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잘 행하는 가운데 자기 혼을 그분 곧 신실하신 [창조자]께 맡겨 지키시게 할지어다.” ➤로마서 8장17-18절, “17.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니라.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18.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하나님을 믿고, 고통을 받는 것이 우리의 삶에 필수과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고통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인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가 고통을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증하는 순간, 그 사랑이 우리는 덮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그의 책 [일상, 하나님의 신비]에서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셀 수 없이 많은 눈길, 그것을 알아볼 눈이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는 흔히 세속적인 영역과 거룩한 영역, 또는 악한 것과, 선한 것 사이를 구분하므로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악과 고통의 문제를 우리의 구분과 현상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역가운데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고통 가운데 ➤예레미야 애가 3장22-23절의 말씀처럼, “22. ¶ {창조주}의 긍휼로 통하여 우리가 소멸되지 아니하였으니 그분의 불쌍히 여기심은 끝이 없도다. 23. 그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은 크시나이다.” 라고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놓고 이렇게 정의하며 믿음을 고백합니다. ➤“9.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세상 철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고칠 수 없는 고통이 있다면 인내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철학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고칠 수 없는 고통의 문제가 있다면 즐길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불행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하고, 새로운 정의를 내리는 것입니다.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을 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이 에콰도르에서 순교한 후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남편의 순교의 피가 더 이상 이유 없이 죽어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시는 사명으로 말입니다. 남편의 죽음이 더 이상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죽음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하도록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증명하기를 원하실까요? 주의 인자와 자비, 긍휼하심이 오늘도 여러분을 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내일 자고 일어나면 그 고통과 죄악가운데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크다는 것을 또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이 복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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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