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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장성하라
히브리서 5장 12-14절 / 김병삼 목사
➤“12.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들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나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 13.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니라. 14.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에게 속하나니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느니라.”(히 5:12-14 KJV)
요즘 신앙인들의 문제는 성경이 바뀌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성경이 세로로 써 있어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늘 긍정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는데 지금은 성경이 가로로 써 있어서 성경을 읽으면서 부정적으로 되었다고 말입니다. 가르치는 선생이 됨직도 한데 우리가 알거니와 예수 그리스도를 오래 믿은 것과 믿음이 자라나는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오래 믿은 것과 성령을 체험한다는 것 역시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결국은 변화에 대한 문제요, 성장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 기록자가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내용입니다.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이제는 가르치는 반열에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가르침을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번 말씀은 오래 전에 읽었던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제자입니까?」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도전을 받게 되어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르띠즈 목사님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교인 수가 184명이던 교회를 2년 동안 600명이 넘는 교회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모든 일들이 제일이라고 생각할 무렵, 성령께서 목사님을 깨뜨리기 시작하셨습니다. “후안 너는 지금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하는 일은 사업이야.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사가 잡지와 책을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술수를 쓰고 있다. 도대체 네가 하는 일들 가운데 어디서 나의 손길을 찾아보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답니다.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 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쪄 가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너는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교인들을 400명 더 확보했을 뿐이지, 누구도 자라나고 있지 않고 그대로이다. 전에는 제가 200명의 영적 갓난아기를 거느렸다면, 지금은 600명을 거느리고 있는 것뿐이다”
이 말은 우리예배당의 모습과도 동일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가만히 교회 공동체를 들여다보면 마치 교회당의 목회자들이란 ‘영적으로 자라지 못한 영적 갓난아이들을 돌보는 보모와 같다’ 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많아질수록 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교인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나라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돌보느라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언제까지 교인들이 교회 공동체에 나오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되며, 언제까지 사역자가 부족하여 고민하는 교회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제가 봐도 한심한 일인데 아직도 날씨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는 제 모습을 봅니다. 날씨가 좋으면 이 사람들이 들로 밖으로 나가지 않을까? 날씨가 궂으면 집에서 나오지 않을까? ‘놀토’가 되면 가족들이 다 어디를 가지 않을까? 이제 날씨가 추워지면 이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를 나올까? 며칠 전에도 예배시간에 마라톤으로 인해 주차 장소가 통제된다는 현수막을 보고는 또 걱정을 해야 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중에 날씨가 춥거나, 비가 많이 온다고 김병삼 목사가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비가와도, 날씨가 좋아도 옵니다. 바로 여러분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그리스도인들 말입니다. 목사를 성도들과 다르게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 유익한 것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유익합니다. 저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유익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어린 신앙
훨씬 더 좋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히브리교인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12.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들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나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자 서지 못하는 갓난 아이, 꼭 누구의 가르침을 따라 누구와 함께 라야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 영적 갓난아이입니다.
아이와 성인의 차이는 돌봄의 대상이 되느냐, 아니면 돌보는 사람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저는 아이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누나가 어렸을 때부터 늘 아팠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누나를 돌보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누나를 챙겨야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동생을 보고 “오빠예요?”라고 묻는 경우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신앙의 연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디모데전서 4장12절에서 이렇게 권면 했습니다. ➤“12 아무도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신앙은 늘 자라나고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직 영적인 어린아이인지 아니면 성숙한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영적인 갓난아이란? 돌봄을 받아야만 하는 영적 갓난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어린아이가 있는 곳에는 ‘평화’가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만족스럽지 못해도 울음을 터뜨리고 칭얼댑니다. 영적으로 성숙한지 갓난아이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꾸 자신만을 이해해 달라고, 자신의 소원이 무엇인지만을 간구 하는 사람은 아직 영적으로 갓난아이입니다. 믿음이 자라나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말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나에게 불리한 쪽으로 발생하는 일과 하나님의 목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에 들어간다면 이 모든 것들의 내용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난 후에 아내로부터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연애할 때는 제가 ‘천사’였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만일 제가 결혼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연애시절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회당에서 한 남자가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답니다. 우연히 기도 소리를 들은 목사님이 그 남자에게 충고했습니다. “자기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더 잘 들어주신답니다.” 그러자 그 남자의 기도가 이렇게 변했답니다. “하나님, 우리 자식에게 부자 아빠를 허락해 주세요.” 본문에서 어린 아이의 특징 중에 하나가 ‘젖이나 먹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적 갓난아이는 딱딱한 식물을 먹지 못합니다. “Babies can drink only milk, not old enough for solid food" 여기에서 비유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유에는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아이들에게 우유가 가장 맛있는 음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음식이 아니지만 우유 밖에는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우유를 마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졸업하던 날,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습니다. 제가 살던 왕십리에는 당시에 ‘육합춘’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중국집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저에게 탕수육과 짬뽕을 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저는 탕수육에 대해 ‘신맛’이 난다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짬뽕과 탕수육이 함께 나왔는데 저는 짬뽕을 먼저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탕수육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더 이상 먹는 것은 무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탕수육이 짬뽕보다 훨씬 더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때 먹지 못했던 탕수육이 늘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우유란? 최상의 음식이 아니라, 그것밖에는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누릴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딱딱한 식물이란 그 속에 뼈가 있는 것, 가시가 있는 것, 아니면 씨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 어떤 식물은 껍질을 베껴내야 먹을 수 있는 것, 혹은 익혀먹어야 하는 것, 깨끗이 씻어 먹어야 하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적 갓난아이에게는 좋은 말만 합니다. 격려의 말만을 합니다. 감당할 수 있는 일들만을 요구합니다. 오히려 일을 시키기보다는 보채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이 도전이 되지 못하고, 자꾸 목에 걸린다면 아직 영적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이제 소화시킬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가시를 좀 발라내고 먹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먹을 때가지만 먹고 씨를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대부분의 경우에 말에 넘어집니다. 말에 넘어지는 자야말로 영적 갓난아이의 특징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도바울이 지적한 갓난아이의 표징을 우리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이 교인들을 향하여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고 전제합니다. ➤3-4절입니다.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 4.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하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냐?” 바울은 각각 베드로, 아볼로 그리고 자신을 추종하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그것이 영적 갓난아기의 표징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호(好) 불호(不好)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저는 ‘자기의 의’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든 사물들에 대한 기준이란 바로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절대화가 될 때 우리에게서 분열의 조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분쟁이란 유아적(幼兒的) 사고의 근원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당 안에 어떤 분은 “누구하고는 절대로 속회를 같이 안 한다.” 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장의 표식이란 “아무도 품을 수 없는 사람을 내가 품으리라.” 고 생각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교회 공동체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모두가 죄인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어떤 교인도 좋고, 나쁜 대상이 아니듯이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한 교인들 역시 목회자를 호, 불호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단계를 벗어나는 성숙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배신을 당하고 실망을 할지라도 끝까지 품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바로 우리를 품으시는 사랑인데 말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처럼 말입니다. “10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을진대 화해하게 된 자로서 더욱더 그분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자신의 의로움를 드러내고, 편을 가르는 것보다 미성숙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곳이 늘 시끄러운 이유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숙하여 진다는 것
낮은 울타리의 ‘사랑하기에 아름다운 이야기’에 나오는 글입니다.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살아생전 보물처럼 노트를 쓰곤 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일에 비밀이 없는 분이셨지만, 그 노트에 관해서는 함구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 되어서야 아들은 아버지의 노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대를 하고 보았던 노트에는 가족들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이름뿐이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생각했던 아들은 적잖이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노트를 보고 있구나!” 어머니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이건 너희 아버지의 노트란다. 매일 밤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리곤 하셨지” 아들은 자신이 알 수 없는 낯선 이름들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이분들은 누구신가요?”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신 분들이란다. 아버지는 매일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올리셨단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성숙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누군가를 배려하고,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영적 성장의 모습, 믿음이 자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신앙적인 성숙, 믿음이 자라난다는 말씀에 대비해 본다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배려하는 신앙인으로 자라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배려를 받지 못한다고 아무것도 못하시는 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그런 대우를 받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그러한 표현이 가장 잘 나타난 부분이 바로 ➤마태복음 6장33절입니다. “33.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열왕기상 3장에 보면 바로 그런 말씀이 나오고 있는데,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1천 번제(燔祭)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이 얼마나 좋았던지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너의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솔로몬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8. 주의 종이 주께서 택하신 주의 백성 한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므로 너무 많아 셀 수도 없고 계산할 수도 없사오니 9. 그러므로 주의 백성을 재판하도록 주의 종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사 내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같이 큰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까? 하니라.” (왕상 3:8-9)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했는지, ➤13절에 “13.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것 즉 재물과 명예도 내가 네게 주었은즉 네 평생토록 왕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자가 없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영적 성숙함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자만이, 믿음이 자란 사람의 표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람들에게 구하지 않는 것까지 더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성숙한 자의 가장 분명한 표징이 무엇입니까? “14.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에게 속하나니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느니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을 ‘영적 성숙’이란 연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practice' 옳은 일을 하면 거짓이 드러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 여러분은 어떤 계획을 세워 놓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일본을 놀라게 한 이승엽 선수가 연습 벌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타이거 우즈가 골프의 황제가 된 것은 다른 누구보다 연습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나라의 자랑, 자랑스러운 신앙인 최경주 선수는 처음 미국으로 건너가 골프를 연습할 때, 잔디를 파는 것이 아까워서 티를 꽂아 놓고 연습을 했었답니다. 그는 한국에서 얼마나 골프를 하고 싶었는지 맨 바닥에서 연습을 하던 사람이요, 그의 손을 보면 물집이 잡혔다 터지고, 아물기 전에 또 물집이 잡혀 손바닥이 울퉁불퉁해졌다고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공을 보내기 위해서는 반복된 연습밖에는 없습니다.
영적 성숙이 결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물집이 터지고 눈물이 나고, 무릎이 아프고, 눈이 시린 경험을 해야 영적 진보가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힘이 들겠지만, 중보기도실에서 사랑하려고 몸부림치며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말씀 가운데 행함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간단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여러분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을 미워해야겠습니까? 아니면 품어주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어렸을 때는 자기중심적이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자기가 미워할 이유가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각을 사용하여 신앙생활을 하면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사람인가?” 또한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우리의 감정으로 인한 판단이 아니라, 지혜로운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앞에 앉아있는데 어떤 나그네가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몹시 더운 날이었기 때문에 그는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지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정심이 많은 아브라함은 그의 지친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껴 자신의 집에서 잠깐 쉬어가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에게 시원한 우유와 빵을 대접하게 했습니다. 나그네가 즐겁게 음식을 드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아브라함이 나그네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음식을 잡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음식을 먹던 나그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페르시아 사람으로 불을 숭배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왜 그에게 기도합니까!" 아브라함은 그에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또 왜 그분을 섬겨야 할지를 설명해 주었으나 그 나그네는 불의 숭배를 주장할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참지 못해 격분하여 말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내 장막에 머물 수 없소. 속히 나가시오" 라고 고함을 질렀고, 나그네는 잔뜩 성이 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떠나는 나그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분을 삭이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아, 하나님은 50년이나 저 사람을 참아오셨는데 너는 한 시간도 참지 못하고 쫓아내는구나." 우리는 곧잘 분을 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충동적인 감정일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너무나 사랑과 거리가 많음을 깨닫습니다. 이웃사랑을 제일 큰 계명으로 알고 있는 교회의 사랑도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20.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니 자기가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자기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 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 이 명령을 우리가 그분께 받았느니라.”(요1서 4:20-21)
➤고린도전서 2장 13-16절에서 분별의 기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3.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14.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15.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결국 성숙의 척도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분별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자에게 가장 경계해야할 부분이 바로 소유욕입니다. 며칠 전 저는 꿈을 꾸면서 굉장히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제 속에 있는 모습을 꿈속에서 보게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 교회의 단체가 빨리 차를 타러 나가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성도가 봉투에 든 헌금을 저에게 맡기며 “목사님, 이것을 꼭 전해 주세요.”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서로 헌금 봉투를 맡기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제 옆에는 부목사님들도 있고, 제가 먼저 나가면 그 일을 대신 해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곳을 빨리 떠나지 못하고 그 헌금을 다 받고 있었습니다. 속으로 “이걸 내가 꼭 받아서 전해줘야 잘 난 척을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서 허둥대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손에 넘쳐난 헌금들을 여기 저기 떨어뜨리면서 당황하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해야지’ 하는 욕심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어그러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거꾸로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공한 목사란 아주 오랫동안 한 교회 공동체에서 사역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교회당을 부흥시킨 목회자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제자들을 빨리, 그리고 잘 양육해 놓고 새로운 과업을 향해서 훌훌 떠나는 사람이 훌륭한 사역자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처럼 교인들에게 실증이 나서 교회 공동체를 옮기거나, 더 크고 좋은 공동체를 찾아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다른 사역을 위해 영적 자녀들에게 교회 공동체를 맡기고 다른 곳을 향해 떠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문제는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나 외에 더 잘 할 사람이 없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당 안에서도 보직을 가지고 자신이 하던 일을 놓지 않기 위해서 싸우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조금 더 목회를 하기 위해 자신의 나이를 속이기도 합니다. 목회가 생계의 수단이 되어 호적의 나이를 가지고 뻔히 아는 나이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가장 성숙해야할 목회자 중직들에게서 성숙하지 못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목회자인 저에게 가장 도전이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저에게 주어진 기득권, 제가 이루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목회의 열매들을 언제든지 버릴 준비들이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 의미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미련 없이 자신의 터전을 떠났던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의 사역에 충실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과 결심이 설 때, 비로소 성숙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녀는 부모를 떠날 때 어른이 됩니다. 염려하는 마음은 있으나 믿고 자식을 보내줄 수 있을 대 성숙한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옛날 며느리가 들어오면 곳간의 열쇠를 맡길 수 있는 시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성숙함은 우리의 사역을 물려줄 사람을 찾고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무엇인가를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우리는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손을 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있을 때입니다. 다음 세대와 다음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언제든지 자신이 가지고 누리던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여러분의 사역과 위치를 넘겨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사역을 포기 하거나 방관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여러분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집착’ 아 아닌 ‘내려놓음’의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안주’가 아닌 ‘새로운 출발’을 위한 내딛음이 필요합니다. 한 주간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집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양보하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과연 하나님에게도 소중하며, 가족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중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때임을 생각할 때, 최선을 다해 헌신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을 가지고 여러분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위한 배려는 올바른 결정은 여러분을 성숙시켜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지경을 넓혀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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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기에 세상에서 얻는 것은 모두"덤"이다
욕심내지 말고 마음 비우는 오늘 이시길 바라며 늘~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