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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기쁨
빌립보서 4장4절 / 김병삼 목사
➤“4.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KJV)
올해 말씀 성경 봉독을 하면서 제일 많이 나온 단어가 뭐였지요? 기쁨, 기뻐하라.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 오늘 제목이 뭐겠습니까? 기쁨에 대한 것이요. 제가 성품에 대한 설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은 이제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서 [기쁨도 성품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좋을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이 기쁨에 대한 이야기들이 꽤 잘 자리를 잡으며 좋을 것 같아요.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감사도 그렇고 용기도 그러고 오래 함께 나누는 이 기쁨 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요 우리들이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보느냐? 사실 이것이 우리들의 성품 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수년전부터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우리 교회가 주관하는 설교 대회가 있었어요. 그때 설교를 했던 한 학생이 했던 내용 가운데 제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려고 해요.
남편을 일찍 잃고 딸 하나를 이렇게 키우고 사신 어머니가 있었어요. 딸에 대해서 굉장히 이렇게 관심도 많이 가지고 잘 키웠는데 희망이 하는 원대로 딸이 대학 교수가 되었고 이 딸은 어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어느 날 딸이 엄마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엄마 엄마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그랬더니 엄마가 이야기하기를 “내 평생소원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교회에 가고 신앙생활을 하는 거다.” 그 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함께 교회를 가게 됐어요.
그런데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에 차량안내를 하는 곳부터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예배를 마치고 밥을 먹는데 식당에서 먼저 먹겠다고 다투는 사람들을 보고 또 지나가면서 들어보니까 누군가 이렇게 험담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집으로 오게 돼서 집에 오자마자 이 딸은 엄마에게 얘기합니다. “엄마 나 다시는 교회 가지 않고 싶은데요.” 엄마가 이유를 물으니까 교회당에서 본인이 봤던 이야기들을 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엄마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엄마는 수십 년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 얼굴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너는 처음 교회당 가서 참 많은걸 봤구나!”
오늘 우리들이 예배를 하는데 여러분들이 무엇을 보느냐? 따라 오늘 여러분들의 하루 여러분들의 성품이 모든 것들이 결정 되는 거지요. 제가 지난주 주신 말씀을 통해서 잠깐 이렇게 이제 스치고 지나갔던 이야기들인데 성숙한 성품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기쁨과 감사가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오늘 우리들이 기쁨의 성품이 기쁨에 프레임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본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인격적인 사람 좋은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환경에 의해 지배를 갖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거지요. 제가 우리 교인들과 함께 수많은 선교지들을 다녔습니다. 대개 선교지들은 환경이 많이 연약해요. 여러 선교지에 가면 가장 어려운 게 어떤 건가요? 사실 먹는 게 참 힘들어요. 뭐 우리들에게 이렇게 적절하게 좋은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그 현지인들과 함께 먹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저를 보면 어쩌면 목사님은 어디 가든지 그렇게 뭐든지 잘 드세요. 목사님은 선교가 체질인가 봐요? 이런 얘기를 종종 해요. 저는 선교지에 가면 그냥 음식을 다 섞어다가 비벼 가지고 잘 먹습니다. 아! 맛있다, 맛있다. 그리고 먹으면 교인들의 오 그게 맛있어요, 맛있어요, 제가 그렇게 먹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저도 못 먹겠다고 얘기라면 모든 사람들이 다 힘들어지는 거야! 내가 저부터 맛있다, 맛있다. 그리고 먹는 거예요.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팁을 하나 알려드리면 제가 같이 밥을 먹는데 맛있다, 맛있다. 그러면 굉장히 힘들게 먹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아 내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결심에 대한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오늘 이 빌립보서를 어디에서 쓰고 있냐면 감옥에서 쓰고 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로마서 말씀도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썼던 거요. 그런데 로마서를 보면 우리가 유명을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이 있지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그런 글을 쓰고 있어요. 이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뭐라고 얘기하면 빌립보서는 끊임없이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어떻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었을까? 사도 바울은요? 예수님 때문에 기뻐했고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고 있었어요.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어떤 편지를 써요? 감옥에서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나에게 고상, 가장 고상하다고 했으므로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 사도 바울의 성품을 결정짓는 이 기쁨에 비결은 분명히 환경에 대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거지요.
우리가 잘 아는 말씀 하박국 3장 17-18절 말씀입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같이 봉독해 보겠습니다. ➤“17. ¶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수고의 열매가 없고 밭이 먹을 것을 내지 아니하며 우리에서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 떼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전히 {창조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로다.”
여기에 나오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뭐예요. 그의 인생의 최악의 상황인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하박국 기록자가 “나는 여전히 {창조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로다.” 그가 그의 인생을 나에게 무엇이 있는가? 라는 프레임으로 본 것이 아니라 구원에 프레임으로 그의 인생을 보는 것, 오늘 사도바울을 보니까 그게 편지들을 보면 사도 바울의 성품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편지들 가운데 보면 배우고 익히고 노력했다는 내용들이 여기저기 나오고 있어요.
➤빌립보서 4장 11-13절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내가 배웠으니 12.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른 것과 배고픈 것, 풍부한 것과 궁핍당하는 것을 다 배웠노라. 13.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기쁨 이라고 하는 것을 어느 날 기도하다가 기쁨에 은사를 딱 줄여서 그냥 기뻐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그 비결을 배웠다고 얘기하는 걸 꽤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빌립보서 4장9절 해보니까 “9. 너희가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그것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기쁨의 프레임을 우리들의 가지기 시작할 때 우리에게 오는 유익이 뭐예요.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자기 말씀을 들으면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도전을 받아야 될게 뭐지 모르지만 하나님 저에게 지금 어떤 상황이 밀려오고 있는지 모르지만 자에게 평강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기쁨으로 살기 위해 기쁨에 장애물들을 제거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기쁨의 감정을 개발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기쁨의 장소를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는 기쁨에 적(敵)인 염려를 정복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영적인 훈련을 통해 기쁨에 거룩한 습관을 습득 한 사람이었어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영적인 성품으로 우리들이 만들어 갈 수 있고 우리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구나!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기뻐했다면 우리도 지금 우리들의 삶의 한 가운데서 기뻐할 수 있겠구나! 우리들이 이 기쁨의 비결은 무엇일까? 자 여러분들은 이제 만나교회당에서 이렇게 예배를 하고 저는 이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어요. 참 우리들에게 큰 복의 하나 있다? 그게 뭐냐면 제 표정이 아주 좋은 거여요. 잘 대답하지 어떻게 생각하지요.
전 모르겠어요. 제가 목회를 한 30여 년 하는 동안 옛날 사진과 요즘 사진을 이렇게 비교해서 보잖아요. 지금이 훨씬 나아요. 나은 게 뭐냐면 표정이 나요. 제가 30여년 목회를 하는 동안 저에게 정말 한 가지 복이 있다면 제 표정이 참 좋아질 거예요. 여러분 참 신기하지 않아요. 하나하나 뜯어보면 볼게 없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너무 괜찮지 않아요. 그런데 제일 괜찮은 게 뭐예요. 제가 여기에서 기쁨에 표정을 가지고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복일까? 만일 제가 여기서 말씀을 나는데 인상을 쓰고 맨 날 그냥 심각하게 그렇게 설교하고 있다면 우리 예배를 드리며 이 시간들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힘겨울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우리들의 기쁨에 선택합니다. 제가 10시 예배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떠나게 될 텐데 우리 자녀들이 영정사진으로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야~! 우리 부모님은 평생 기쁨 가운데 사신 분 야 저 얼굴에 기쁨이 있어!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인생을 승리한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기쁨의 성품을 가질 수 있을까요.
첫 번째가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라고 말하고 있어요. 환경은 늘 변하는 거여요. 여러분 우리들의 삶의 우리들이 원하는 환경에 있을 때가 얼마나 될까? 이 환경은 늘 변하는 거요. 그런데 한 가지 불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살기로 결심 할 때 예수님 안에 사는 우리가 우리들의 삶에 성품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사람.
존 템플턴 이라는 사람이 쓴 성공론에 보면 아브라함이 링컨의 대한 이야기가 있을 링컨의 대한 많은 일화들이 있지요. 링컨은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역시 많은 정적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의 그 내각에는 늘 대통령이 말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게 왜 저 사람을 링컨은 계속 쓰는가? 연말 친구가 링컨에게 물었대요. 져 힘들게 하고 늘 반대하는 저 사람을 왜 계속 그렇게 쓰고 있느냐? 링컨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청년 시절에 어떤 농가를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을 때, 거기에 늙은 말을 알아보았는데 늙은 말 등에 말파리가 있어서 얼마나 그 말을 괴롭게 하는 지금 말파리를 쫓아내려고 하는데 농장 주인이 링컨을 말리더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저 늙은 말을 움직이게 하고 저들 그 말을 살아있게 하는 게 저 말파리라고 말파리가 괴롭게 하지 않으면 말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게 링컨에게 굉장히 큰 조언이 되었다니까요?
아~! 나를 힘들게 하고 나에게 눈에 가시처럼 보이는 그 사람으로 인하여 내가 살아있을 수 있는 거구나! 그가 그의 성품을 만들어준 것이 그에게 누가 어떤 사람의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그의 삶에 중요한 성품을 만들게 되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변하지 않는 성품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만일 환경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면 우리는 변하지 않는 그런 인품을 가질 수 없어요. 한 가지 우리들이 주안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우리들의 삶의 원칙이 주 안에서 주안에서 라고 하는 프레임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우리의 삶을 보기 시작할 때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이렇게 있는 거지요. 이렇게 얘기하는 저에게는 어떤 환경이 있을까요?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들고 설 때 제 삶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잘 아시지요. 저에게도 염려가 찾아와요.
여러분들이 겪는 여러분들의 인생에 똑같은 문제들처럼 저에게도 그런 문제들이 찾아와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제가 말씀을 들고 서서 여러분들 설교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 제가 그 염려와 세상의 것들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주 위해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마음으로 서 있는 거지요. 만일 제가 그런 감정과 환경에 따라 늘 좌우 되면서 여기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이 말씀이 들어올 수 있겠습니다. 자 우리들이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겠다.
둘째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자 사람은 우리들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고 우리들에게 슬픔을 제공하기도 해요. 그런데 슬픔을 주는 사람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사람이 어느 때는 기쁨을 주기도 하고 이 사람이 어느 때는 슬픔을 주기도 하지요.
지난주에 mmp 목사님들 하고 제가 1박2일을 같이 지낸 일이 있었어요. 목사님들이 질문도 하고 제가 대답도 하고 제가 목회선배이니까 한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셔요? “목사님 교인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됩니까?” 그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있어요? 교인 때문에 무척 힘들구나! 제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어요. 어디까지 믿어야 되나요? “교인들을 믿지 마세요.” 제 대답은 간단했어요.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을 믿지만 제가 만나교회 목회를 하면서 세 가지가 올 때마다 큰 이야기가 있어요.
여러분 만나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동안 여러분들 절대로 동산 목사님들을 믿지 마세요. 그리고 담임목사를 믿지 마세요. 우리 목회자들도 여러분들 안 믿어요. 우리는 서로 안 믿어요. 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니까, 또 우리들이 사람을 믿으면 그 믿음이 깨어지면 그 사람에 의해서 우리들의 감정들이 너무 많이 좌우되는 거예요.
오늘 말씀 준비하면서 제가 생각났던 게 여러분들 아시잖아요? 제가 할아버지가 된 거지요.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알아요. 손자가 생기면 사람이 이상하게 변합니다. 오! 저도 손녀가 태어나고 제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어요? 어우 우리 손녀딸, 노란 비타민 아! 이게 표현할 수가 없는 기쁨인 거예요. 그런데 이놈이 우리아들 가족이 다 떠났어요. 못 보니까 슬픈 겁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쁨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슬프고 아플 수 있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자녀에게 얻었던 그 기쁨들이 나에게 채워지지 않을 때 자녀로 인해 우리들에게 슬픔과 근심이 찾아오기도 우리들이 깨달아야 되는 것이 우리가 사람에 의해 좌우되기 시작하면 이것은 우리가 기쁨을 얻을 수 없는 입니다. 또 우리들이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말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이 우리는 되게 있어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2절에서 이렇게 편지를 하고 있어요. ➤“2. 내가 유오디아에게 간청하며 순두게에게 간청하노니 이것은 그들이 [주] 안에서 같은 생각을 품게 하려 함이라.”
유오디아와 순두게 라고 하는 아주 열심히 크리스트 인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니까 둘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야. 둘이 너무 열심히 해서 싸우는 거야. 사도 바울이 뭐라고 얘기해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사도 바울이 중요한 이야기를 내외 여러분 여러분들의 마음을 합쳐서 열심히 일 하십시오. 이거 불가능하다는 데, 그 결국 그 둘이 잘 지내려면 어떻게 주 안에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랑하십시오.
그 사람 때문에 우리들의 힘들어 하는 이유는 뭐냐면 저 사람이 내 맘 같지 않음, 저 사람이 내 맘만 같으면 뭐가 힘들겠어요. 우리 엄마 아빠는 나를 너무 이해를 못해 주는 거 에요. 우리 자식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 때문에 우리들이 힘들게 된 거지요. 우리들이 알아야 될 거 뭐 있어요. 내 마음 같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주 안에서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 우리들의 신앙인으로써 성품을 만들어주는 거구나!
빌립보서 2장5절 말씀을 보니까 ➤“5.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또 우리들이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가져야 되는 게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마음을 갖는 거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프레임으로 우리들은 세상을 보는 거지요. 자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요? 그러나 용서라는 말을 할 때 우리들이 흔히 이런 때였습니다. 용서를 베푼다. 그랬더니 용서를 생각할 때는 내가 어떤 위치에서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자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마태복음 18장21절에서 예수님께 물어요.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하리까? 일곱 번까지 하리까?” 이 말 가운데는 뭐예요 이렇게 베드로가 생각하는 종교적인 기준이 율법적인 기준이 있어서 내가 몇 번 정도 용서하면 될까요? 아한 일곱 번 쯤 용서하면 될까요?
그때 예수님이 말씀 하세요.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 용서라도 않은 것은 어떤 종교적인 생각을 해도 내 생각을 가지고 여기까지 용서해.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용서는 그렇게 베푸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용서 너희들 한없이 용서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으로 용서 하는데 그 용서는 네가 용서 해주는 그 사람을 위해 베푸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용서하는가? 용서는 베푸는 게 아니야 내가 용서할 때 그 사람에게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나에게 기쁨이 찾아 온 거다.
성품의 사람이 갖게 되는 가장 큰 유익은 기쁨을 우리들이 소유 할 수 있게 됩니다. 용서할 때 우리들이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는 이름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이른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 하니까 한번 딱 용서하고 내가 기쁨의 성품을 가져 싸움은 좋을 때 그거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 했는데 우리들이 힘든 게 뭔지 아세요. 나는 용서 했다고 생각하는데 다 잊었다고 생각하는 사실 우리의 기억 속에 다 남아있어요. 그래서 내가 용서 했는데 어떤 게 한번 나를 탁 건드리면 그 일이 막 생각한다는 것, 또 이해하게 된 것도 생각나네. 어? 그거 생각나 그러면 미치겠는 거예요.
나는 용서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생각 날 때마다 힘든 것, 예수님께서 이른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는지 말씀은 아! 이런 의미 누나! 나는 용서 했다고 생각해 낸 내 기억 속에 또 그 일들이 생각 날 때마다 또 용서 아! 그렇구나? 이 용서를 통해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기쁨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영성. 훈련이구나? 그 일들이 생각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 용서 하면서 그땐 우리는 그 기쁨을 우리들이 경험하기 시작할 때 이 기쁨의 성품이 우리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잊고 용서하자.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우리들에게 떠오를 때 또 용서하며 하나님 임신의 기쁨을 우리들이 경험하며 우리들에게 만들어지는 성품의 과정들 그러고 보니까 이름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용서하라고 하는 게 말씀은 무리의 영성 우리의 성품을 만들어 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 번째 염려하지 않기로 결심 할 필요가 있어요.
그럼 염려하지 않는 제일 중요한 비결이 뭔지 아세요? 뭘까? 염려하지 않는 비결 알려드릴까요? 사람들만 끝이 없거든요. 별로알고 싶지 않아 염려하지 않는 비결을 알려드릴까요? 염려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염려하지 않는 최고의 비열이 뭐라고요? 염려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 이 굉장히 이상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팔리는 약이 신경안정제라 그래요. 요즘 아무튼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들 불안한 일들이 굉장히 많은 거지요. 또 요즘 사람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병 가운데 하나가 공황장애 이예요.
그러니까 대충 이렇게 잘 해결되지 않는 우리 질병의 진단을 받는 게 되게 공황장애니까 이 중에도 많은 분들이 공황장애 라는 진단도 받고 약을 먹고 있을 거고요. 저도 굉장히 오래전에 그때는 공황장애 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보편화되기 전에 저는 공간 장애라는 병명을 찾기까지 가 굉장히 힘들어서 그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이 공황장애 라고 하는 게 이게 영어로 공황장애(恐慌障碍, 영어: panic disorder)이 어떻게 공항상태에 들어가는 병이 우리를 공격하고 택하는 것이요. 공황상태로 접어들면 너무 힘들어요.
굉장히 중요한 일은 공황장애는 죽어도 안 죽어요. 그런데 공황장애가 오면 죽을 것 같아요. 굉장히 심하게 되는 거예요. 공황장애가 찾아왔을 때 저는 보통의 앓는 공황장애 보다 훨씬 더 좀 심하게 공황장애가 와서 참 많이 힘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힘들었던 게 그 병명을 찾기 위해서 제가 힘든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들을 나는데 검사하는데 제일 힘든 검사가 뭐였냐면 MRI를 찍는 거지요. 이제 통 속에 들어가서 그 소리들을 들으며 그런데 거기 있으면 죽을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수면으로 검사를 하기도 하고 또 거기에서 못하겠다고 하면 손을 들면 꺼내 주는데 거기에 있는 그 순간이 견디기가 힘듭니다. 내가 왜 이럴까? 라고 생각해 보니까 어렸을 때 저에게 상처입니다. 6살 때, 다른 일들은 기억이 안 나지 않는데 그의 저에게 굉장히 강렬한 기억이 있던 거지요. 제가 충남논산은진 이라는 곳은 저희 아버님이 논산훈련소 군목으로 계실 때 제가 6살 때, 저희 형이 저보다 7살 위에요. 굉장히 장난을 저희 형이 심하게 쳤던 것 같은 저에겐 참 좋은 형인데 그때 여섯 살 때, 저를 저희 형이 집 창고에 다가 가두어 놓고 저를 놀렸어요. 쥐다 여섯 살 난 저에게 [쥐다.] 크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 창고의 문이 이렇게 있고 여긴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제가 그 유리를 팔꿈치로 깼어요. 그런데 지금도 아주 선명 한데 유리가 딱 깨지면서 이렇게 올라가면서 햇볕에 확 비쳤던 모습, 그리고 유리가 여기 가서 꽂혔어요.
지금도 여기에 이제 상처가 있으며 여섯 살 때 입었던 상처가 있어요. 그 좁은 창고 같은 데서 “쥐다.” 라고 하는 것에 놀랐던 그것 때문에 저는 이렇게 폐쇄 공포증 같은 것이 좁은데 들어가면 참 힘들어요. 제가 이게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선생님 하고 이렇게 상담을 하다 보니까 제일 무서운 게 뭐냐면? 한번 어택이 오면 것을 이렇게 촉발시키는 어택이 오면 뭐가 생긴다면 예기 불안 생긴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밤길을 가다가 강도를 맞나요. 그럼 이 사람의 상처가 되서 밤길을 갈 때마다 또 강도를 만날까봐 무서운 거예요. 공포가 밀려오는 거 에요. 그래서 그 병은 언제나 않는가? 걸어도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않을 때가 돼야 낳는 거예요. “그 약을 그때까지 먹으라.” 제가 공황장애에 그 힘든 시간 가운데 제가 이길 수 있은 첫 번째는 뭐냐면 의사선생님이 이야기 한 이 병으로는 죽어도 안 죽습니다. 이게 약을 먹고 빨리 회복이 되십시오.
또 하나는 제가 이 힘든 시간의 주일마다 이 강단에서 야 되는데 저는 이 패니어 어택이 설교 하다 왔거든 저에게 두려움이 뭐였냐면? 아 설교 하다가 또 공황장애가 오면 어떡하지 설교 하다 죽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하지? 그게 무서웠어요? 그거를 이기는데 2년이 지났어요. 제가 이 설교단에 올라 올 때마다 이 밑에 앉아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는지 “하나님 저를 좀 붙잡아주세요. 저 설교 하다 공황장애 오면 첫째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요. 제 인생에 가장 간절하게 기도했던 때가 그 2년이었어요.
그래서 그 기간 동안 저는 매월 기도원에 가서 2박3일 동안 기도하고 말씀 듣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저를 붙들어 주세요. 약도 잘 먹고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제가 이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이 공항장애 죽어도 안 죽는 건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는 여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 내가 염려하지 않기로 결심하며 그 시간들을 신앙, 그러면 의부증, 의처증, 이런 의심들이 뭐여요.
우리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며 의심하는 것, 의심 하는데서 염려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결실 할 수 있는 것, 하나님 저에게 염려가 찾아옵니다. 저에게 불안이 찾아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저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기를 원하는데 어떤 근심과 걱정이 와도 어려운 일을 당해도 걱정 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저를 지키실 것을 믿으며 염려를 내려놓겠습니다.“
그 결심을 우리들이 하는 찬양 하나 생각나네요. ♬너 근심 걱정 와도/ 너 근심 걱정 와도 어려운 일 당해도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 당해도 슬픈 일이 와도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주님의 사랑 속에 거하라. 그의 평화 속에 유하라 그분의 영원 속에 자유 하라. 주 지키리. 주님의 사랑 속에 거하라. 그의 평화 속에 유하라. 그분의 영원 속에 자유 하라. 주 지키리.♪
여러분들이 부르는 찬양에 가사 하고 여러분들 표정이 너무 안 맞아 엄청 우리가 참 신기하지요.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리들이 변화 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듣는 것과 우리들이 결심 한 대로 살지 않는 거야 여러분 이 찬양을 부르며 우리들의 하나님 앞에 이 표정이 찬양 따로 우리들의 표정이 좀 바뀌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염려하지 않는 비결이 뭐라구요. 염려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넷째. 물질에 흔들리지 않기로 결심 하는 거예요.
자 우리를 힘들게 하는 다는 일 가운데 하나지만 제일 중요한 게 사실 물질에 대한 문제지요. 경제적인 압박이 오면 참 힘들어요. 우리 가정의 평안을 빼앗아 갈 수도 있어요. 사실 물질 때문에 우리들이 평안함을 누르기도 하고 쓸데없는데 어려움을 누르기도 하고 물질이 우리들의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신앙의 눈으로 물질을 보게 될 때에 중요한 관점이 있는데 가난은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는 있지만 가난 때문에 우리들이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빌립보서 4장19절에 ➤“19.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것을 채우실 것, 그러니 지금 이 물질에 연약함을 가지고 그것에 좌우되지 마. 하나님께서 채우실 거야! 예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거야! 라는 그 믿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조금 전에 보았던 빌립보서 4장11-13절 다시 봅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내가 배웠으니 12.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른 것과 배고픈 것, 풍부한 것과 궁핍당하는 것을 다 배웠노라. 13.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상상을 한 번 해 봅시다. 사도바울이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어!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요.” 라고 편지 하는 이 사도바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저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미소를 뜨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을 것 같아요. 조금 과정에서 얘기한다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얼굴에 광채가 않았을 것 같아요.
왜? 기쁘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솟아나는 그 기쁨을 가지고 내가 물질에 좌우되지 않을 수 있는 내가 그 믿음을 소유했다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기쁨을 가지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 모습을 바라보며 바울이 깨닫게 되는 게야! 사도바울은 참 성숙한 크리스토 인이야 크고 보니까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이 목회자가 된 저에게 늘 하셨던 말씀 목회자는 모래 바닥에 코를 처박고 죽어도 교인들에게 돈 없다는 얘기 하는 것 아니다. 그게 이런 의미였구나!
만일 제가 돈이 없다고 여러분들에게 징징징징 대면서 설교하고 목회하고 있다면 그 얼마나 힘들까? 결국 나에게 돈이 있고 없고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가 풍성함으로 하나님께 고백하며 물질에 의해 좌우되지 아니하고 그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아 이게 기쁨의 성품 성숙한 성품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물질에 의해 좌우되지 않기로 우리들이 결심할 수 있는 자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희생을 통해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기쁨을 통하여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떤 감정이 더 사랑 로맨스 로맨틱 사실 진짜 사랑을 내보내면 사랑은 참 많이 아픈 거예요. 그 사랑은 절대로 희생이 역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우리들이 사실 사랑 이라고 생각할 때 잘못된 생각들 로맨틱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진짜 우리들이 사랑을 한다면 희생과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고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요.
요한복음 3장16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이시는 희생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 그 사랑의 마땅한 희생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어요. 우리들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들이 그 사람을 위해 희생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희생하지 않는 사랑은 절대로 기쁨이 존재하지 않아요. 오늘날 이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들이 기쁨을 빼앗긴 이유가 무엇인가요? 희생 하려고 않는 것, 누구나가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쁨을 잃어버리는 거지요. 우리들이 친절한 기쁨을 소유하기 위해서 이 사랑의 희생이 따른다고 하는 것은 우리 알지 못하면 이 기쁨을 우리들이 소유할 수 없는 것,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아이를 잘 낳지 않는다고 그러잖아요. 이렇게 가면 대한민국의 언제 사라질지도 모른다. 라는 이야기를 젊은 사람들이 아기를 잘 낳지 않는 이유가 이 계산이 안 된다는 것, 내가 이 아이를 나서 이런 세상에서 이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다는 걸, 계산이 안 된다는 계산이 안 되니 계산을 하니 희생이 불가능하고 희생의 불가능하니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거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럼 우리 세대에는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데 계산이 돼서 낳고 키웠을까? 생각하면 우리도 계산이 안 되는 시대를 살았어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자식을 키우는 데 쉽지 않고 부모의 희생이 필요한데 자식을 키우면서 깨닫게 되는 게 자식으로부터 누리는 기쁨이 자식아 없었더라면 내가 이 기쁨을 알 수 있었을까?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그런 얘기했지 자식의 은혜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식이 은혜와 제품입니다. 부모의 희생이 없었다면 그 자식을 통해 누리는 기쁨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가 계산 적으로 생각하고 계산적으로 살아가고 희생 하지 않으니 우리들의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들 기억하세요. 사랑은 희생하지 않는 자에게 기쁨으로 절대로 찾아오지 않는다. 계산 하는 자에게 사랑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가정이 깨어지고 결혼이 깨어지고 우리들의 삶에 관계가 깨어지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쾌락을 누리려고 하니 기쁨이 존재하지 합니다. 우리들에게 이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기에 합당한 희생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 바르고 바로 그 희생을 통해서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있다고 하는 것,
우리들에게 어떻게 이 기쁨이 채워줄 수 있을까요?
사랑이란 사랑을 참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자식에게 사랑이 많이 필요합니까? 사랑하는 거야! 희생 하는 거요. 내 아내에게 사랑이 많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 사랑을 채워 주기 위해서 내가 희생 하는 것, 어느 날 내 부모님을 보니 아 저렇게 늙으셨구나! 마음이 아픈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을 많이 사랑해 주기 위해서 내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 때 찾아오는 게 희생, 이게 힘들다는 걸 알지요. 이렇게 우리들이 이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너무 우리들이 부족한 존재라는 걸 알지요. 어떻게 의미들이 그래서요 우리들이 뭐예요. 예배 하는 것이요. 이 시간에 말씀을 듣고 찬송 하며 기도하면서 하나님 부족한데 제가 오늘 예배 하면서 염려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사랑이 필요한 그 사람에게 내가 이 희생 내가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그래서 희생의 예배 가운데 우리들이 염려를 다 내려놓고 십자가 아래 내가 하는 이 영역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기쁨을 회복해서 나가는 거야! 그런데 세상에 나가서 또 한 주간을 살다보면 힘든 거예요. 그래서 또 기쁨을 잃어버려요. 또 우리는 무거운 짐을 가지고 와요. 그럼 또 오늘 예배 하면서 또 결심하는 거요. 그래 염려하지 않기로 펼친 내가 물질에 의해 좌우되지 않기로 결심해! 내가 사람에 의해 내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거야! 그리고 예배하고 결심이 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의 영성이 만들어져 가는 거예요. 이 영성이 연습 되고 훈련되고 우리의 성품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요.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예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기쁨의 성품이 나타나야 되는 것, 이게 한 번에 완성 되지 않지만 우리 10년 20년 30년 후에 우리의 사진을 보면 자 그래 내가 이렇게 변화 됐구나! 라고 알 수 있는 성품의 변화들이 우리 가운데 길어 나야 되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세상을 나갈 때 회복된 기쁨을 가지고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여러분들의 모습들을 바라보며 야 참 기쁘다. 감사하다. 잠! 성숙하고 나가는 모습들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많이 불렀던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신 있으랴? 큰 근심거리 가지고 온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자 오늘 여러분들의 근심과 아픔을 다 십자가 아래 어떻게 내려놓자 뭐예요. 그리고 기쁨으로 나가야 해요. 기쁨의 성품을 여러분들이 회복하고 다 하잖아요 한 번으로 되지 않지만 매일 매일 매주, 매주 이 영성이 우리들에게 훈련 되어서 그 기쁨이 여러분들의 성품이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여러분들의 염려를 내려놓기로 결심하셨습니까? 자 그럼 세상을 나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기쁨이 충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축도로 마치겠습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인도하시는 근심 걱정 와도 큰 근심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이 날은 지킬 것입니다. 오늘 주에 평안과 주위에 진리와 자유 가운데 거하기를 소원 합니다. 다짐하며 이 세상으로 나가는 주님으로 살아가는 모든 백성들을 위해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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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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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음이 즐거워야 행복해 진다고 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모든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게 되므로
얼굴엔 늘 미소를 짓게되고 밝고 유쾌하게 된답니다.
얼굴에 환한 웃음과 함께 오늘도 멋지게 시작하시고요.
항상 웃음이 있는 그런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