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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8강)*신앙행위
야고보서 1장26-27절 / 신윤식 목사
➤<성경> “26.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신앙심이 있어 보이되 자기 혀를 제어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 행위는 헛것이니라. 27. [하나님] 곧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 행위는 이것이니 즉 고난 중에 있는 아버지 없는 자들과 과부들을 돌아보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더럽혀지지 아니하는 것이니라.”(야고보서 1:22-25 KJV)
신앙행위=경건(敬虔)
<설교.說敎> 본문말씀을 보면 경건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데, 신앙 행위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외형적인 모습과 실천일 것입니다. 경건한 삶을 말할 때 여러분이 쉽게 떠올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외형적인 모습과 종교적인 삶의 실천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러한 것은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습이라면, 기독교 신앙을 초월해서 어디에서든 경건으로 여기는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참된 경건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 행위는 신앙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보면 “26.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신앙심이 있어 보이되 자기 혀를 제어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 행위는 헛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경건하다고 여겼습니다.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 애를 썼던 사람들이고, 그 생활 역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하고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누가 봐도 신앙인다움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혀를 재갈 먹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갈이라는 것은 말을 못하게 입을 막는 용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통제하기 위해서 입에 물리는 재갈을 말합니다. 즉 혀를 재갈 먹인다는 것은 그 혀가 주인의 통제를 받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혀를 재갈 먹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본성에 따라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가령 누가복음 18장9절부터 보면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 자신의 실천을 자랑하고 높이면서 자신들이 세리나 창녀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혀를 재갈 먹이지 않았을 때 나오는 인간의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기준을 분명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거의가 종교적 삶과 말씀의 실천일 것입니다. 즉 열심 있는 교회 생활과 착한 일을 앞세워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타인의 의를 판단하게 합니다. 의의 기준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신앙은 저 사람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타인의 신앙을 무시하고 판단하는 말을 내뱉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인에 의해 통제되는 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 교회는 바리새인을 양산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 종교적인 실천과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치는 세리는 사라지고 바리새인만 가득한 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신을 신앙행위가 좋다고 여겨도 그 혀가 재갈 먹이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라면 모두 헛된 신앙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행위는 외형적 실천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행위를 특별한 행동과 실천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행위는 외형적인 것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신앙행위는 무엇일까요?
➤27절을 보면 “27 [하나님] 곧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 행위는 이것이니 즉 고난 중에 있는 아버지 없는 자들과 과부들을 돌아보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더럽혀지지 아니하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대로 하면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도와주면 그것이 참된 신앙 행위이라는 것입니까? 결국 구제하는 것이 신앙해위이라는 것입니까?
당시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땅이 있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아와 과부는 땅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닙니다. 땅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과부라고 해도 돈 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고, 고아라고 해도 부모로부터 유산을 받아서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27절의 내용은 단순히 고아 과부와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신앙행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명기 16장9절부터 보면 절기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성중에 거하는 노비, 레위인, 나그네, 고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맥추절이나 추수절을 지킬 때는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땅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열매는 땅이 없이는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열매를 얻었다는 것은, 그들의 땅이 있다는 것이고 그 땅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얻은 것임을 잊지 않아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이 없이 이집트의 노예로 살았던 것이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곧 노예이며 고아고 과부였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나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신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앙행위입니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경건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힘없는 약자들을 불쌍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불쌍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외형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타인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비교하고 차별하는 말은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행위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즐기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본성과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래방 안 가는 것이 세속에 물들지 않는 신앙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처럼 돈을 힘으로 여기지 않고, 돈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처럼 살려고 하지 말고 세상에 지지 않으려고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곧 세속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행위는 세상의 경쟁에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곧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존재임을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야 말로 세속이고, 이 세속에 물들어 사는 것이 헛된 신앙행위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경건은 자신의 불쌍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거 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깨달은 은혜와 자비하심이 이웃에게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행위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신앙해위를 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님좋다오
첫댓글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