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미사 후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제게 다가와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제가 2004년에 신부님을 갑곶성지에서 처음 뵀었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으세요.”
이 말씀은 좋은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당연히 좋은 의도가 담긴 말씀으로 감사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20년이나 지났는데, 제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20년이 지나면 외모가 바뀌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뀌지 않았다면 어디 아프거나 문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생각이 바뀌지 않고 행동도 똑같다면 이 역시 커다란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야지만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분의 말씀은 저 듣기 좋으라고 하신 것이겠지만,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혹시 아무런 변화 없이 또 변화하려는 노력도 없이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더 나은 ‘나’가 되도록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결같은 모습보다는 좋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변하는 우리가 될 때, 이것이 주님의 뜻에 더 다가서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모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들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쪽으로 한결같은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한결같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율법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면서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의 기준에 따라 큰 죄인이 되고 말았지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 이 사랑은 없어지고 오히려 활자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단 한 명도 제외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피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욱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게 되고, 비로소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뜻에 더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다(양귀자).
사진설명: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자유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감사합니다...신부님...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