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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강해(17)복음의 시작*
사도행전 10장1-8절 / 송태근 목사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 하는 부대의 백부장이더라. 2. 그는 독실한 사람이요 자기의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백성에게 구제물을 많이 주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3. 낮의 아홉시쯤 되어 그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에게 들어와 자기에게 이르되, 고넬료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보매 4. 그가 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나이까? 하니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기도와 네 구제가 올라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었은즉 5. 지금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부르라. 6. 그가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와 함께 묵고 있는데 그의 집은 바닷가에 있느니라.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가 네게 말하여 주리라, 하더라. 7. 고넬료에게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그가 자기 집안의 종들 중의 둘과 또 계속해서 자기를 섬기던 자들 중에 독실한 군사 하나를 불러 8. 이 모든 것을 그들에게 밝히 알리고 그들을 욥바로 보내더라.”(KJV)
할렐루야! 사도행전 10장에 접어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전체 28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요. 28장 가운데 이제 학자들이 견해를 따라서 최대 공약수로 집약한 3대 사건이 있습니다. 여러분 상식에는 어떤 사건이 제일 큰 사건일 것 같습니까? 사도행전 전체를 이렇게 쭉 한번 스케치를 해 보면 어떤 사건이 제일 클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날이 이 지상교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교회 생일’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교회 탄생과 함께 성령이 공식적으로 임하신 사건’입니다. 그전까지는 개인적으로 임하기도 했지만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임하는 사건이 마가의 다락방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교회사적 의미를 갖고 있지요.
두 번째 중요한 사건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두 번째, 시간이 많으면 옆의 분들하고 좀 의논도 시키고 싶은데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빨리 지나갑시다.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사울이 고꾸라진 사건입니다. 그런 기독교의 원흉이었던 그가 그러다가 초자연적인 빛 속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는 거기에서 완전히 거듭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 복음의 이기가 되고, 복음의 도구가 되지요. 이것이 기독교 역사의 두 번째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세 번째, 두 가지는 얼추 사람들이 대답을 하더라고요. 근데 마지막 세 번째는 전혀 예상 밖의 사건이었는지 대답을 잘 못하시는 듯싶습니다. 어떤 사건일 것 같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인 ‘고넬료의 가정에 임했던 복음의 역사’입니다. 아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이 임했다는 것은 뭐 일반 사람이 복음을 들은 일이나 별로 다를 바 없을 텐데, 이 사건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이제 그 부분을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본문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같이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사건의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공통점! 그 공통점이 뭐냐 하면? 전부 이방을 향한 그림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전까지는 유대라는 땅 울타리에 유대주의에 복음이 갇혀서 뻗쳐 나가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이 세 가지 사건은 유대 땅을 넘어서 편견을 넘어서 이방 땅에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중요한 동기를 부여한다는 데 공통점을 갖고 있고, 또 하나의 초점은 뭐냐면 놀랍게도 그 이방 땅 곳곳에 하나님이 부르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걸 지금 늘 쉽게 편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당시 정황만 해도 이것이 상상이 안 가던 시대였어요. 해서 오늘은 우리가 이제 카메라를 두 군데로 포커스를 맞출 겁니다. 하나는, 고넬료의 집에 그리고 고넬료에게 포커스가 맞춰질 거예요. 또 하나는, 렌즈가 베드로 쪽으로 돌아갑니다. 여기 뜬금없이 베드로가 갑자기 등장한 이유는 사실 자연스럽지는 않아요. 그런데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갑자기 사울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다가 툭 베드로가 튀어나오게 돼 있습니다.
이제 그 이유가 사실은 끊어진 이야기가 아니고, 내면 깊이 전부 하나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겁니다. 자 사도행전 10장을 봅니다. 1절, 제가 좀 읽어 나가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가이샤라에 /유다 행정도시지요. “가이샤라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탈리아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잠깐! 이 이탈리아 부대를 설명을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로마군대를 얘기합니다. ‘이탈리아 부대’ 로마 군대를 얘기하는데, 당시 로마 군대는 크게 3편제로 나누어져 있어요.
보통 레기온(Λεγεώνα) 그러지요. 레기온! 어 귀신 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뭐냐?” 주님이 물었을 때 [군대나이다.] 그럽니다. 그 군대라는 말이 [일 레기온] 로마병사 단위를 얘기해요. 6천 명입니다. 이 제일 큰 단위입니다. 레기온, 군단이라 그러지요. 그리고 이것을 열 대로 나눕니다. 그러면 한 대에 한 부대에 몇 명씩 배치가 되겠어요? 열대를 나누면 600명 그 600명을 여섯 부대로 나눕니다. 그러면 한 부대 몇 명씩 분할이 되겠습니까? 100명 그 100명의 리더가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입니다.
성경에는 백부장이 한 4명 정도 등장을 하는데, 대체적으로 평가가 아주 좋아요. 마가복음 또 누가복음, 마태복음에 나오는 백부장은 예수님이 어느 정도로 극찬을 했는가 하면 “이스라엘 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만난 적이 없다.” 할 정도로 극찬을 받았던 인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밝혀지고 독보적인 상징적 인물이 오늘 등장하는 바로 이 고넬료인데 이 고넬료에 대해 성경이 굉장히 자세히 소개를 해요.
자 2절 같이 읽을까요. ➤“2. 그는 독실한 사람이요 자기의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백성에게 구제물을 많이 주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첫째 경건했어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돼 있어요. 그리고 더군다나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어요. 신기하지요? 로마 군인이요 이방 사람인데 그는 어쩌다가 이런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이 신앙이 들어간 경로가 학자들마다 굉장히 궁금증이 유발되었던 것 같아요. 많은 학자들이 고넬료의 신앙의 경로를 여러 가지 입체적으로 추적을 했습니다. 대체적으로 합의된 결론이 뭐냐면? 이 당시 로마는 엄청난 타락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시대건, 어느 국가건 어느 개인이든 공통점이 하나 있지요. 죄악이 깊을수록 그 영혼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이 함께 커지는 법입니다.
여러분 인간도 개인적으로 마찬가지예요.
죄를 지으면 질수록 ‘내가 이래서 안 되는데, 이러다가 얻어맞을 텐데.. 이러다 터지지’ 여러분! 누가 밤새 도박을 하고나서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을 보면서, ‘아 지난밤 의미 있었다.’ 이러는 사람 봤어요? ‘내가 또 미친 짓을 했구나! 내가 또 미친 짓을 했구나!’ 마음 한편에 그 하나님이 창조할 때, 원래의 설계도! 하나님으로 밖에는 채워질 수 없는 그 허공이 있어요. 그 허무가 있어요. 이 당시 로마는 마치 그런 깊은 밤을 향해서 맞아 올 새벽을, 이게 정점에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그 부도덕한 사회와 타락한 음란 문화를 이 백부장은 한복판에서 경험하다가 어느 날, 뜬금없이 전근 발령이 난 겁니다. “유대 땅 어느 한 도시에 지휘관으로 당신은 주둔 하시오.” 발령이 난 거예요. 까탈스러운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유대 땅에 탁 떨어졌는데, 그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지요. 신앙 소식을 듣게 되었겠지요. 그리고 그 하나님을 유대인들과 함께 경외하고 섬기게 되었는데, 한 번도 종교적 경험이 없는 이에게는 이 유대인들의 경건한 생활이 굉장히 충격으로 다가왔을 거예요. 그래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갖게 된 신앙이 얼마나 대단한지 “경건하여 온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를 많이 하고, 늘 기도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고넬료에게 신앙적인 큰 틀이 바뀌는 변화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보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환상의 그림이 이렇습니다.
➤3절, “하루는 낮의 아홉시쯤 되어 그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에게 들어와 자기에게 이르되, 고넬료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보매” 하루는 제 9시쯤 돼요. 여기 플러스 여섯을 더해야 우리나라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오후 3시쯤으로 보면 됩니다. “4. 그가 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나이까? 하니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기도와 네 구제가 올라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었은즉 5. 지금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부르라. 6. 그가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와 함께 묵고 있는데 그의 집은 바닷가에 있느니라.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가 네게 말하여 주리라, 하더라. 7. 고넬료에게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그가 자기 집안의 종들 중의 둘과 또 계속해서 자기를 섬기던 자들 중에 독실한 군사 하나를 불러 8. 이 모든 것을 그들에게 밝히 알리고 그들을 욥바로 보내더라.”
이런 환상들이 잦았던 것은?
하나님이 고넬료의 집에 제9시쯤 후 3시에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어요. 이때는 이런 환상들이 잦았던 것은 성경이라는 충족된 계시가 완성되지 않았던 때이기 때문에 특별한 방법으로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너무도 분명하고 명료합니다. 아주 천국 내비게이션처럼 정확하게 “욥바로 가면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여기 무두장이는 그 옛날 성경에는 [피장이] 라고 돼 있어요.
이것은 가죽 제품을 다루는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천한 직종의 사람이에요. 오늘날 개념이 아니에요. 또 오해하지 마세요. “뭐 가죽제품 다루는 사람이 어쩌고 어째?” 이렇게 오해하면 안 돼요. 이 가죽 제품 다루는 사람은 당시에는 굉장히 천한 직종이었어요. 그런데 “그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베드로라는 사도가 그 사람도 원래 이름은 시몬인데 지금 같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네가 사람을 보내서 그 베드로 사도를 초청해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도록 해라.” 정확하게 어디로, 언제, 왜 가야 되는지? 말씀해 주셨어요.
이제 고넬료는 사람 둘을 불러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하나님이 다시 렌즈를 돌려서 베드로의 이상 속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9절을 보세요. ➤“9. 이튿날 그들이 계속 길을 가다가 그 도시에 가까이 갔을 때에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여섯 시쯤에 지붕에 올라 가니라.” 6시면 정확히 정오입니다. 12시를 얘기하죠.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함에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해 줬던 거 같아요. 준비할 때 황홀한 중에 이상이 보입니다. 황홀한 중에 [11절] “하늘이 열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보자기가 아니에요.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절] ➤“13. 또 한 음성이 그에게 나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자! 이제 보세요. 베드로에게 보여줬던 하나님의 또 하나의 이상은, 하늘로부터 네 귀를 매달아서 늘어뜨리는 보자기 같은 것들이 내려와요. 근데 그 안을 보니까 유대 율법 상에는 부정한 짐승들이, 땅의 짐승들이, 그 안에 버글버글 해요. 근데 음성 속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이것들을 잡아먹으라.“라고 얘기를 합니다. ”잡아먹으라.“ 이때 베드로가 중요한 얘기를 하나 해요.
[14절] 여러분들이 읽어보십시오.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리할 수 없나이다. 내가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매” 예! 먹을 수 없다는 얘기죠. 두 가지를 얘기했어요. “먹을 수 없고, 지금까지도 그런 것을 율법에 따라 내가 지켰고, 먹은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것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딱 거절을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전통, 율법적인 관습, 고집, 경험, 선입관이 다 녹아진 하나의 고백이에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15절] ➤“15 그 음성이 다시 두 번째 그에게 말하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그리고는 그 말귀를 나중에야 알아듣습니다.
자! 여러분 이거를 뭐라고 그러지요? ‘종교적 편견’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상 가장 인류의 해악을 끼쳤던 그것이 뭐냐면 ‘종교적 편견’이에요. 예를 들면 대표적인 것이 ‘십자군’ 같은 사건입니다. ‘십자군’ 히틀러가 왜 나왔어요? 이런 편견 때문에 등장을 한 겁니다. 사람의 편견은 무서워요. 지금도 인도에는 잘게 나누어서는 한 2,300종의 계급이 있다고 해요. 크게는 네 등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제일 상위 계급이 승려, 종교인들입니다. 두 번째가 왕족과 귀족들입니다. 세 번째가 상인들입니다.
네 번째가 인간이 만든 계급
그런데 이 네 계급에도 포함되지 않는 집단이 있어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 언터처블)이라는 부류의 집단이 있어요. 불가촉천민은 밑바닥이라는 의미에요. 거긴 계급에도 안 들어가는 거예요. 일반 사람들과 공유도 할 수 없고, 같은 날의 숨도 쉴 수 없는 짐승 취급받고 대대로 살아가야 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어요. 이 계급 제도는 원래 인도 사람이 만든 게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B.C. 1300년 전,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 1300년 전 전에 외세에 침입을 받아요. 그때 이 특정 권력 집단이 자기들의 권력을 보호하고, 기득권을 대대로 누리기 위해서, 그 땅에다가 계급제도를 설정합니다. 그게 오랜 세월 흘러오는 동안에 가지를 뽑고 내용이 다양하게 만들어져서 무려 네 개의 구분 속에 2,300종이라는 계급이 형성이 된 겁니다. 이 불가촉천민 같은 경우에는 누가 와서 죽여도 법적으로 호소를 못해요.
여러분 혹시 그 케이블 채널 가운데 ‘히스토리 채널’이라고 있습니다. 그건 주로 다큐를 다루는 곳인데 유익한 프로를 많이 하더군요. 거길 보니까 이 불가촉천민에 해당하는 어느 한 아낙네가 남편이 억울하게 죽어요. 그렇게 법적인 보호를 못 받고, 고발도 할 수 없고, 항변도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 리얼한 현장을 카메라 기자가 찍었는데, “복수할 거야, 복수할 거야” 절규를 하고 울부짖는데, ‘야~ 인간의 편견이 이렇게 무섭구나! 이렇게 무섭구나.’
큰 그 대합실 같은데 어느 남여 커플이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었어요. 아주 아름다운 선율로 아무도 머물러 보질 않아요. ‘뭐가 궁에서 나왔나?’ 이렇게 그냥 흘깃 이렇게 쳐다보고 지나가곤 했지 멈추어 서서 그 아름다운 고급 선율을 감상하는 이가 없어요. 힐끗힐끗 쳐다보기 하고만 지나갑니다. 후에 그 밑에다가 그 설명서를 하나 누가 세워 놨어요. “세계적인 콩쿨대회 참석해서 우승을 한 커플입니다. 그래서 누구누구?” 이렇게 설명을 붙여 놨어요.
그랬더니 그다음부터 사람들이 선율 듣고, 그 글을 한번 보고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추어 그 음악을 듣기 시작합니다. 박수가 나오고, 엄지손가락이 지켜 올려지고, “역시 콩쿨대회 우승다운 실력들이구나!” 근데 그 팻말은 사실 가짜였어요. 이 사람들은 세계적인 콩쿨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냥 음악 학도들이었습니다. 사람이 그 세상이 객관적으로 던져주는 정보가 얼마나 맹랑한가를, 그 잘못된 선입견에 의해서 얼마나 주관적으로 편견을 갖게 되는가?
캄보디아 같은 데는 폴포트 정권 때, 한 제너레이션이 날라 갔어요. 하여간 지식인이라면 안경 낀 사람은 무조건 다 잡아다가 죽여서 지금도 그 유해와 유골들이 그 시낸 한복판 어느 학교, 그 교실마다 이렇게 산더미처럼 수북이 쌓여서 지금도 관광객들에 의해서 관광 거리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무지해요. 이게 편견의 열매들입니다. 근데 그 중에서도 가장 편견에 붙잡혔던 민족이 사실은 유대인이에요. 유대인들은 선민이라는 이 편견 때문에 모든 기타 민족들을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개들. 돼지 취급했습니다.
제일 피해를 입었던 족속이 사마리아 족속이에요. 혼혈족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날 때부터 저주를 받고 태어난다.’ 하는 인식 때문에 아무리 고통스럽게 산모가 아기를 낳아도, 이방인들이면, 손 하나 대지 않고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게 유대인들이에요. 이 선민사상이 잘못된 민족주의로 발전을 하죠. 그래서 여러분 스포츠 경기를 하다가 이 경기가 정말 말 그대로 순수한 스포츠의 승패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로 발전할 때 나라 간의 전쟁도 벌어집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이게 인간의 무지와 편견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거예요.
오늘 하나님께서 왜 사울의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뚝 끊기듯 스토리가 끊어져 버리고, 늦다 없이 전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베드로가 등장을 하느냐? 여기 하나님의 큰 세계사적인 그림이 감춰져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땅 끝까지 유대를 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회를 준비하시지요.
그리고 그다음에 사람을 준비하시는데, 크게 두 종류의 인생을 준비하십니다. 유대를 대표로 하는 정통 유대인인 베드로를 준비하시고, 그리고 이방의 그릇을 위해서 사울을 준비하시죠. 그중에 이 베드로를 쓰시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무엇이 필요했는가 하면, 그 속에 종교적인 전통, 고집, 관습, 선입견, 편견, 이것이 부서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이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 속에 옹골차게 녹아져 있던 편견을 여지없이 부셔 뜨리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세요.
[24절] ➤“24 그 다음 날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더라. 고넬료가 자기 친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함께 부르고 그들을 기다리더라.”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자기의 거짓과 편견을 내려놓고, 순종하여 가이샤라 갔더니 고넬료가 자기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엎드려 절하는 기적 같은 꿈 같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아주 오래된 편지 하나를 좀 읽어 드리겠습니다. 120년도 훨씬 넘는 옛날에, 이 조선 땅에 선교사 한 분이 발을 딛게 됩니다. 그리고 1년을 보내게 돼요. 그리고 너무 절망스러워서 미국 선교 본부에다가 기도문 겸 편지를 하나 씁니다. 그게 후에 발견이 돼서, 번역이 되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내용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복음의 내용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한번 제가 발췌를 해서 읽어 드리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편지입니다. 고국 땅 선교 본부에 쓴 글입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 하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사실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은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들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니까 의심부터 하고, 화만 냅니다. 특히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같아요. 이 나라 조종의 내심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를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이게 120년 전 풍경이에요.
이 땅에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것은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뭘 해야 될지 답이 안 나온대요. 그러나 주님! 그다음 말이 기가 막혀요. 그러나 주님! 이 말을 두 번 했더라고요.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줄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 한 백성, 한 자매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반드시 있음을 내가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언더우드! 이분이 연세학당을 세우지요? 이 편지를 보면 ‘인류사는 사실상 편견을 뛰어넘는 역사였어요.’ 제일 무서운 게 종교적 편견이에요. 그런데 언더우드는 포기하지 않고, 편견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복음이 주는 자유를 봤어요. 그리고 이 땅도 언젠가 한 형제 한 자매로 같이 주님 앞에 춤추며 기뻐할 날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겁니다. 그런 한 사람의 순종이 있었기에 이 땅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복락의 강수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기적이에요. 너무 기적이에요. 오늘 베드로는 이렇게 여지없이 평생을 묶여 살았던 그 편견에서부터 무너집니다. 그리고 이 편견이 훗날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 본인도 몰랐지요. 이렇게 쓰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예 종교회의를 보십시다.
[사도행전 15장]은 세계사적인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종교 회의가 벌어진 현장입니다. 몇 개 중요한 종교 회의가 있었어요. 그 중에 한 부분인데 1절부터 제가 좀 설명하면서 드릴게요 [사도행전 15장1절] ➤“1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형제들을 가르치며 이르되,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설명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지인데, 유대로부터 몇 사람이 왔어요. 뜬금없이 뭐라고 주장하고 가르치기 시작하느냐면? “여러분 바울 선생님과 바나바 선생님이 예수님으로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맞긴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저희가 유대에서 왔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어요. 우리처럼 여러분들도 몸에 할례의 표를 받고, 할례를 받아야 그 구원이 완성이 됩니다.” 이렇게 가르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선교지 사람들이 혼란이 일어났겠지요? 제일 격노했던 게 바울이었어요. “아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받은 복음은 그게 아니다.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격렬한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2절을 보세요. [2] ➤“2.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와 그 사람들 사이에 작지 않은 분쟁과 논쟁이 일어나더라. 그들이 이 문제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자기들 중의 다른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올려 보내기로 결정하니라.” 너무 싸움이 컸던 거 같아요. 여기에 기록 될 정도로 싸움이 큰 싸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종교 논쟁은 굉장히 어마어마합니다. 여러분! 자 그래서 사람들이 합의를 했어요. “여보시오, 그러지 말고 이 싸움 끝이 안 날 것 같으니까 우리 이렇게 합시다. 바울, 바나바 당신들 지도자니까 당신들이 직접 본 교회인 그리고 사도들이 남아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이 문제에 대해서 신학적인 검증을 정확히 받아오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본부 교회격인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 문제를 놓고 큰 종교 회의가 벌어져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4절]을 볼까요? ➤“4.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밝히 말하더라.” 아뿔사~ 그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에 검증을 받으러 왔더니 세상에 예루살렘 교회에도 똑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바리새파 중에. 그래서 싸움이 선교지보다 더 커졌어요. 싸움을 종식시키려고 왔는데 이 바나바와 바울이 와서 싸움을 붙였습니다. 결론은 그렇게 됐어요.
6-11절을 볼까요? ➤“6. ¶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일을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함께 오니라. 7. 많은 논쟁이 있은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이방인들이 내 입을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매우 오래 전에 우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주사 그들에게 증언하시며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사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 차별도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 11. 오직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을 줄을 믿노라, 하니라.” 아멘! 이 격렬한 큰 종교 논쟁을 누가 결론을 맺습니까? 베드로입니다.
자 그러면 베드로는 이 정확한 신학적 이해를 어떻게 경험하고 정의할 수 있었을까요? 언제? 고넬료 사건이에요. 자기가 그런 종교적 고집과 종교적 편견과 아집과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한 그 짐승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거듭되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고넬료의 집에 갔더니, 이방인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령이 임하는 광경을 봅니다. 이걸 베드로가 체험적으로 신학적 정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루살렘 최고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이 종교 논쟁에 정확하게 결론을 맺습니다.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방인이나 우리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얻는 것이 같다.” 여기에서 논쟁의 끝을 맺어 버립니다.
자! 여러분! 우리는 더 나아가서 놀랍게도 이 고넬료 사건은 고넬료가 주인공이 아니었어요. 베드로에게 초점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최초로 이 땅에 교회를 설립하시고, 두 사람을 준비하셨는데, 하나는 바로 유명한 사울이었고, 지난주까지 살펴본 사울이었고, 하나는 베드로였습니다. 일부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이 이런 얘기를 해요. “하나님은 민족을 차별하는 것 같다. 혹시 하나님이 민족주의자가 아니냐?
그래서 이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배타적이지 않느냐? 그 이유를 이렇게 댑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도 아시아로,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지만, 그 길을 막으시고 바울의 일행들을 마게토니아 지금의 유럽으로 옮긴 것이 그 증거가 아니냐? 그리고 이제 가설을 얘기합니다. 만약에 그때 바울의 일행들이 마케도니아로 가질 않고, 아시아로 계속 갔었다면 지금쯤 아시아 존의 국가들이 유럽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이렇게 억눌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그만 복음의 물고가 마게도니아 틀어지는 바람에 불행하게도 유럽은 일찍이 복음을 받고 잘 살게 되었고, 아시아는 가난과 질병과 테러와 전쟁 속에 지금도 가장 복음을 받아야 될 선교지로 전락을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가설을 얘기합니다. 가설이에요. 정말 그랬을까요? 우리 성경 한군데를 확인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두루 흩어진 나그네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을 통해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이르도록 선택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글 누가 썼지요? 베드로가 썼잖아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누구에게 썼습니까?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전부 어느 지역입니까? 아시아 지역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베드로는 정통 유대인으로서 편견을 무너뜨리고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겁니까? 아시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어디로 보낸 겁니까? 유럽입니다. 하나님은 유럽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인생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달라서 우리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개념으로 오늘 말씀을 좀 여러분 이해 속에 정리를 해야 됩니다.
첫째는, 내 속에 내 종교적인 습관
내가 이해하고 있는 종교의 틀, 여기에 꽉 가두어져서 한 공동체를 힘들게 하거나 어렵게 만든 경우는 없었는가? 의외로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런 종교적인 틀 속에 갇혀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배타적으로 만들고, 관용을 베풀지 못하고, 어려움을 주는 경우들이 있어요. 오죽했으면 기독교를 가리켜서 ‘무례한 기독교라’는 표현을 할까요? 이게 다 편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이방 땅에 사용하시기 위해서, 아시아 지역에 사용하시기 위해서 먼저 그의 편견을 무너뜨리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그리고 바울은 마케토니아로, 베드로는 아시아로 하나님이 가도록 명령을 하시고 여기 그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중요한 결론을 맺습니다.
첫째, 나에게 이런 편견이 있을 수 있어요. 둘째,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음처럼 여러분들의 일터이든지 삶의 현장이든지, 가정이든지. 캠퍼스의 현장이든지, 정말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는 절망의 현장이 있어요. “이런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적인 신음 같은 것들이 내뱉어지는 땅들이 있을 거예요. 현장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내가 평가할 이유는 없어요. “가라!” 하면 순종만 하면 되는 거예요. 싹이 나고, 줄기를 맺고, 열매를 맺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하나님 몫이에요. 믿습니까? 그래서 이 한 주간에도 여러분들이 현장의 제사장으로, 선교적 제자로서, 일터로, 가정으로, 캠퍼스로, 가서 그 깜깜한 땅에 복음의 씨앗을 트이고, 하나님 앞에 붙잡혀 순종 되어지는 귀한 도구들이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영상 녹취/ 타이핑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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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속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사랑과 행복으로 편안한 삶에 만사형통 하시고 즐겁게 아름다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