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시는 글은 📸 스마트폰(smartphon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로마서講解(37)*주의 긍휼하심
로마서 9장14-18절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있을 수 없느니라. 15. 그분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시나니 16. 그런즉 이와 같이 그것은 원하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달리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며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17. 성경 기록이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내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너를 일으켰나니 이것은 내가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두루 밝히 알리려 함이니라, 하시나니 18. 그런즉 그분께서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또 강퍅하게 할 자를 친히 강퍅하게 하시느니라.”(롬 9:14-18 KJV)
하나님의 선택
지난번에 저희들은 메시야를 준비하기 위해 선택된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거부하고 배척하고 죽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당을 자연스럽게 보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보니 자기가 이제껏 살아온 삶이 너무 부끄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들을 온 가족이 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이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 가족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는데 나는 예수님을 만났는데 우리 가족은 어쩌면 좋으냐? 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우상을 섬기고 세속적인 가족들이 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겠습니까?
지난번에 살펴본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데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했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잘못되었는가? 그 약속은 폐기되었는가? 사도 바울의 대답은 한 마디로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도 않았고 약속은 폐기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의 자녀인지 약속의 자녀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중에 약속의 자녀가 있고 육신의 자녀가 있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자녀는 무엇입니까? 동물들이 서로 만나서 새끼를 낳는 것처럼 인간이 서로 만나서 낳은 아기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왜 사는지를 모릅니다. 인생을 그냥 오다가다 만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인연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생의 의미를 말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약속의 자녀는 무엇입니까? 약속으로 태어난 자녀를 말합니다. 예언으로 태어나는 자녀를 가리켜 우리는 약속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게 씨를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약속을 하고 나서 25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라의 경수가 끊어졌습니다. 아브라함도 아기를 낳을 나이가 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폐하여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여자가 아기를 가질 수 없다 할지라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 아이가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약속이 있는 아이입니다. 예언이 된 아이입니다. 그러면 이스마엘은 어떤 아이입니까?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에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낳은 아이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합니다. 큰 아들의 이름은 [에서]이고 작은 아들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보다 에서가 훨씬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에서를 택하기보다 야곱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놀랍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민도 아닙니다. 율법을 받은 백성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은 모두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불교의 영향아래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1백년 전만해도 흑암에 앉아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 사기꾼이요, 다 도둑이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에는 죄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간을 택하셔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십니까?
여러분이 믿음을 통하여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연히 태어난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이방인의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여러분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약속하시고 예언하셔서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라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약속의 자녀만이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불의하신가?
사도 바울의 두 번째 질문은 14절에 있습니다.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있을 수 없느니라.” 육신의 자녀가 있고 약속의 자녀가 있다면 누가 육신의 자녀가 되고 누가 약속의 자녀가 됩니까? 선택 이라는 말 자체가 불공평합니다. 내가 누구를 선택했다. 라는 것은 특혜입니다. 선택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편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잘못하시는 것 아닌가? 하나님이 정의롭지 못한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스마엘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스마엘을 버리시는가? 하나님은 불의하시지 않은가? 여기에 우리가 찾아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시다면 왜 그렇게 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사람의 예를 듭니다. 한 사람은 [모세]요, 다른 한 사람은 [파라오]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 폐하여졌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예를 통해 우리에게 설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세와 파라오의 예를 들어 선택의 문제 구원의 문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15 그분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시나니”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32장과 33장입니다. {창조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해 내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만나를 주셨습니다. 마실 물이 없었기 때문에 생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를 산으로 불러 십계명을 돌 판에 새겨 주시고 40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에게는 원망과 불평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만사가 다 불평이고 불만입니다. 좋은 것도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은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할 때 배운 것입니다. 즉 이집트의 문화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 때 모세가 돌 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모세는 내려오며 보니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얼마나 모세가 분노를 했던지 그는 하나님께 받은 돌 판을 깨버렸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 쌍의 부부가 결혼을 해서 임신을 했습니다. 아내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남자는 밖에서 외도를 합니다. 이 아내가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것과 마찬가지로 모세는 산에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도 화가 났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시면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생각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서 광야에서 다 죽였다고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좋으니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잘못을 한 아이를 채벌하는 아버지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화를 푸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15장 말씀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3장 19절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에게는 공의 와 사랑 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 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셨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너무 함부로 정의를 말합니다.
여러분도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을 조심해서 하십시오. 정의와 공의를 말하려면 여러분이 먼저 죽어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남에게 욕을 하는 사람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죽음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공의로 대하시길 원하십니까? 사랑으로 대하시길 원하십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공의로 여러분을 대하신다면 살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공의가 아닌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구원은 공의가 아닙니다.
구원은 사랑입니다. 긍휼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산 것이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앞에서는 살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공의를 말한다고 세상이 공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사나워 집니다. 운동권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공의요, 정의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정의와 공의를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사랑해야 공의가 생깁니다. 용서하고 사랑할 때 정의가 일어납니다. 정의만을 이야기 하면 살벌해집니다. 사정을 하면 세상이 깨끗해질까요? 아닙니다. 뒤로 물러갈 뿐입니다. 숨을 뿐입니다. 칼이 없어지면 또 나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죄인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보면 죽여야 합니까? 살려야 합니까? 만약에 죄인을 살리면 하나님에게는 공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을 보면 죽여야 합니까? 살려야 합니까? 살려야 합니다.
죽으심 통하여 공의를 이루심
이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키시기 위해 하나님은 스스로 죽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여러분이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족시키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신 것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공의가 아닙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나지만 [에서]가 아닌 [야곱]과 같은 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택하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23-24절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인간을 본질상 진노의 자식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사형선고를 받은 존재입니다. 밧줄이 목에 걸려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자들이 본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사람이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시간의 문제입니다. 언제든지 인간은 죽을 수 있습니다. 죽지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왕의 특사가 말을 타고 옵니다. 멈추시오. 아무개의 죄는 사해졌소. 이렇게 해서 살아난 사람이 여러분과 저입니다. 왕의 명령으로 우리 목에 있던 밧줄이 풀러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옆에서 죽게 된 사람이 이건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불의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우리는 다 죽은 사람들인데 구원을 받았다면 이것은 은혜요, 복입니다.
16절을 봅니다. ➤“16. 그런즉 이와 같이 그것은 원하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달리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며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공의의 하나님으로부터는 구원받을 자가 없습니다. 구원은 내가 원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에 죄인이 나는 사형 받고 싶지 않다. 나는 이렇게 죽을 수 없다. 라고 한다고 사형을 면할 수 있습니까? 내가 사형을 받기 싫다고 해서 사형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은 내가 원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구원은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노력으로 사형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무죄요” 라는 한 마디 말로 사형을 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원해서도 아니요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올림픽 때 높이뛰기를 보며 신기해했습니다. 금메달을 받은 사람은 2m가 넘게 뛰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높이 뛸 수 있는지 저는 아마 그 절반도 뛰기 힘들 것입니다. 넓이 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단뛰기를 하면 9m나 뛰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뛰어봤자 벼룩입니다. 그렇게 높이 뛴들 인간이 창공을 날겠습니까? 수영선수가 금메달을 아무리 많이 받은 들 태평양을 건너겠습니까? 인간의 선(善) 이라는 것은 높이뛰기 하고 수영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한강이나 현해탄은 건널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구원받는 것은 태평양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보다 좋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보다 좀 낫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 선행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선행을 보시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교만해서 남보다 잘생기고 남보다 키가 크고 남보다 공부 잘하고 남보다 좀 잘되면 얼마나 떠드는지 이것이 인간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원은 내가 잘나서 받는 것이 아니요. 내가 뜀박질을 잘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사도 바울은 [모세]에 이어 [파라오]의 이야기를 합니다. 17-18절입니다. ➤“17. 성경 기록이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내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너를 일으켰나니 이것은 내가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두루 밝히 알리려 함이니라, 하시나니 18. 그런즉 그분께서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또 강퍅하게 할 자를 친히 강퍅하게 하시느니라.”
여기 은혜 받는 사람과 대조되는 비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입니다. 바로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멸망의 역할을 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파라오가 모세처럼 좋은 일을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불행했던 사람이 바로 카리욧 유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카리욧 유다는 3년 반 동안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고 함께 먹고 자고 했으면서도 버림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그런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파라오가 그런 사람입니다. 파라오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파라오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았다면 열 가지 재앙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라오가 강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파라오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강퍅한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이 막지 않으신 것입니다. 바로는 강퍅했지만 하나님이 파라오를 보호하셔서 살아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말씀을 듣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셔서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던 두 강도를 생각해봅시다. 두 강도는 똑같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상황도 같았습니다. 멀리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예수님이 곁에 있는데도 예수님의 좋은 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예수님의 좋은 점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선택입니다. 예수님이 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구원받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3년을 살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베드로와 카리욧 유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구원받고 카리욧 유다는 자살을 했습니다. 여러분 카리욧 유다에게도 회개할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기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파라오에게도 회개할 기회가 10번 이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무릎 굻었으면 자랑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8 그런즉 그분께서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또 강퍅하게 할 자를 친히 강퍅하게 하시느니라.”
파라오와 모세에 대한 결론이 18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회개할 기회가 있음을 인하여 감사하십시오. 지금 예수님께 돌아오면 약속의 자녀가 됩니다. 회개하면 복 된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라는 말씀은 누구를 말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모세를 말합니다. “또 강퍅하게 할 자를 친히 강퍅하게 하시느니라.”는 누구를 말합니까? 파라오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의 음성에 예민하시기 바랍니다. 왜 깨닫지 못할까요? 참으로 가슴을 칠 노릇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왜 예수님을 모를까요? 우리 자식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불의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불의합니다. 불합리한 인간이 보기에 하나님이 불합리하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불합리하거나 불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긍휼이 많은 것이 잘못입니까?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이 잘못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갖지 않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꼬집고 비판하는데 일생을 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잘못을 매일 기록하신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긍휼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석양에 지는 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 어쩌자고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까? 어떻게 제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왜 나 같은 인간에게 영원을 주셔서 그것을 사모하게 하십니까?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 이런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크신 이름을 찬양합니다. 구원 받은 것을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깊고 오묘하며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용조목사 저서 로마서강해 타이핑 / 김은영 목사-
|
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잠 5:19).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