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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을 모독하다?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 / 김병삼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입니다. 본문의 말씀 중 23-29절만 봉독합니다. ➤“23.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내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셔 24.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25.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그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셨느니라. 26.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가 있으리로다. 28.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29.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느니라.”(KJV)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자 오늘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한지 25번째, 오늘은 성만찬에 대한 말씀을 나누게 되겠고 이 말씀을 듣고 우리 전 교인들이 함께 성만찬의 의미 있게 참여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잘 듣고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 또 소중한 그런 믿음의 고백이 있는 성만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선경이라고 하는 사람이 [문득 묻다]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제가 기억이 안 나는데 누가 저에게 이 책을 보내 주셔서 보게 되었고요. 이 책은 우리들이 그냥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문득 물음을 묻는 것에 대한 전해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는 그림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찌에 성당 식당에 걸려있는 굉장히 큰 그림입니다. 레오나르 다빈치의 그림 중에 가장 많이 훼손이 된 그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그림을 완벽하게 복원한 후에 미국의 음식 문화 연구가인 존 마리아노라고 하는 사람이 아주 재밌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림을 연구하고 논문을 썼습니다.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메뉴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최후의 만찬에 있었던 메인 메뉴는 장어 요리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왼편 식탁에 접시에 있었던 것은 오렌지 슬라이스를 얹은 구운 장어 요리였습니다. 여러분 실제 거기에는 어떤 음식이 있었을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빵과 포도주였을 텐데 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렇게 그림을 그렸을까? 이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최후의 만찬을 한다면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아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것 같고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들에게 물어봅시다. 오늘 한 끼만 먹고 죽는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뭘 먹고 죽겠습니까? 네 뭘 먹고 다금바리 아니면 뭐 갈비찜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봤어요. 만일 제가 한 끼를 먹는다고 하면 나에게 가장 익숙했던 음식이 아닐까? 제가 해외에 있다 돌아오면 제일 먹고 싶은 게 짜장면, 김치찌개였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 그러면 예수님이 성만찬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면서 제자들에게 비장하게 주셨던 그 음식은 그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그런 음식이었을 것 같아요. 내가 마지막에 먹는다면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이 가장 보편적인 그 음식을 놓고 이 성만찬을 우리 주님이 베풀어 주셨는데 이 성만찬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늘 사도 바울은 참 마음 아프게 이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다 익지를 못해서 여러분들에게 문자로 보내 드렸어요. 성경 본문을 보내 드렸기 때문에 다 읽고 오셨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메시지 성경에 보면 20-21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한번 읽어드립니다. ➤“또한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러 와서도 서로 갈라진 채 있다고 하더군요. 한자리에 모여서 주님의 만찬을 나누기는커녕 오히려 밖에서 많은 음식을 가져와 돼지처럼 먹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따돌림을 당해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걷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서 실려 가기까지 한다더군요.”
제가 지난주에 우리들이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 말씀을 담고 있는 문화를 이해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렸어요. 우리들은 늘 성만찬을 낳으면 조그마한 빵조각과 아주 작은 포도주잔을 생각하지만 실제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성만찬은 그런 성만찬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처럼 큰 교회당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작은 믿음의 공동체 가정에서 성만찬을 할 때는 진짜 그들이 먹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누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모임이 유익한 모임이 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가져와서 돼지처럼 먹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굶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성만찬을 통해서 술에 취해서 술주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이 성만찬이 어떤 의미인데 너희들이 그렇게 술 만찬을 먹고 있느냐는 거예요. 성만찬을 우리들의 함께 음식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성만찬의 자리가 너희들의 욕심을 채우고 욕망을 채우는 자리가 되었다는 거예요. 성만찬 시간에는 누가 많이 가져왔던 조금 가져왔던 무엇을 먹는 사람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 같이 하나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인데 너희들이 먹는 것에 따라 흩어지는 나누어지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거예요.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의 만찬이 되어버린 그 성만찬 이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그 소아시아 도시들은 대부분 어디를 가든지 유대교 회당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시리아와 바벨로니아의 포로를 포로로 잡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남아서 살고 있던 도시의 그들을 위한 회당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회당에도 어떤 풍습이 있었냐면 그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나누고 난 다음에는 늘 음식을 함께 먹는 풍습이 있었어요. 그들은 음식을 집에서 가져왔습니다. 사는 정도가 틀리고 생활이 다 틀리다 보니까 맛있는 음식을 가져온 사람도 있고 조금 덜한 음식을 가져온 사람도 있는데 와서 자기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먹습니다. 이것을 에라노스(Έρανος)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가져와서 먹는 풍습
그 자리에서는 친한 사람이 있고 덜 친한 사람이 있고 좋은 것을 먹는 사람이 있고 나쁜 것을 먹는 사람이 있었어요. 언제부터인가 회당의 모임 가운데서 그들의 모임이 나누어지고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요. 그런데 그 회당에 복음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에 새로운 그리스도의 문화가 생겨지기 시작했어요. 성령을 받은 초대 공동체의 모습에 대해서 사도행전 2장46절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빵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그러니까 이제 초대공동체의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인 공동체는 성만찬을 했는데 지금 우리가 하는 것과 같은 이런 의미가 아니라 그들은 실제 모여서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 것이 식사였다는 거요.
그런데 중요한 말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 것 같아요. 그들은 마음이 맞는 사람이 모여서라고 되지 아니 되지 않고 마음을 같이 하여 모였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임은 어떤 모임인가요? 우리는 회사 사람들끼리 모이기도 해요 우리는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 동호인 그룹들이 모이기도 해요.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와 맞는 취미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공동체 교회 공동체는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모인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 교회에 정체성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배 하는 것
우리들이 매주 성만찬을 나누지 못하지만 우리들이 말씀을 나누고 찬양을 나누고 기도를 나누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회한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교회에 정체성이 어떠하냐? 혹시 여러분들은 여기에 모인 작은 소그룹들 모임을 돌아보며 저는 그런 말을 많이 듣거든요. 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붙여주세요. 저는 저 사람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자연적인 욕구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고 하면 우리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는 공동체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내 삶을 즐기는 내 자유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그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나를 희생하고 내 마음을 맞출 수 있는 공동체가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가요.
여러분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었던 교회를 바라보며 세상이 어떻게 얘기했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2장47절에 보니까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 공동체는 적어도 그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 시작했을 때 세상 사람들이 그 모임을 부러워했어요. 그들을 칭송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교회 공동체의 구원받는 숫자들을 더하여 주셨어요. 오늘 우리가 정말 심각하게 물어야 될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세상과 무엇이 다르냐는 거야? 그래서 에라노스 자기들 마음대로 모여서 즐겼던 그 공동체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가페의 공동체로 바꾸어 주셨어요.
그런데 그 공동체가 시작 된지 제20년이 지나지 않아서 이 공동체가 다시 에라노스 공동체가 되어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며 그들이 모일 때에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눌 때에 한 몸이 되지 못하고 분열이 되고 파당을 짓고 자기의 몸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성만찬을 나누는 것을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욕되게 하는 일이니라 어쩌면 우리 교회를 향해서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무엇하고 이야기할까? 오늘 말씀 중 20-22절을 제가 다시 한번 봉독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아니하노라” 먹는 걸 놓고요. 배가 고프다고 먼저 갖다 먹는 사람이 있었대요. 힘이 없는 사람은 먹을 수 없어서 배를 굶게 되었대요. 너희들이 먹을 게 없느냐? 집이 없느냐? 하나님의 전에 모여서 너희들이 먹고 마시는 너희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거예요.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한다면 우리들이 기다리고 배려하고 마음을 바쳐야 할 터인데 우리들에게 그 마음들이 있느냐 25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가 배운 성만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있는데 먹고 마시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고 마실 때 “너희들이 나를 기념하라” 그러면 예전에는 강대상이 이렇게 큰 게 있었습니다. 강대상에 보면 여러 가지 이제 심볼들이 이렇게 그림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유심히 안 보셨겠지만 대부분의 강대상에는 영어로 하나의 문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을 행하라. 나를 기념하여 우리가 크리스찬 공동체로 여기에 모였을 때, 우리들에게 제일 중요한 게 있는데 뭐냐면 이 모임 때마다 예배를 드리고 만찬을 나눌 때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되는 것이 있어요.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면 결혼기념일을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혹시 결혼 10주년 뭐 좀 해보셨어요. 결혼 25주년에 뭐 하셨어요? 결혼 50주년에 뭐 하실 거예요? 그런 거 안 하고 살면 인생이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잘 하셔야 됩니다. 왠지 아세요. 결혼 생활을 하면서 그 기념일을 지키는 이유는 우리들이 결혼할 때 그 마음을 기억하자는 겁니다. 기념하자는 겁니다.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을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확인하자는 겁니다. 기념일에 의미는 이 성만찬을 하는 우리의 의미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셨던 살과 피를 우리의 가슴속에 다시 기억하자는 거예요.
얼마 전 신문에서 보았는데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입니다 결혼식을 32번이나 한 사람 안 놀라세요. 32번 결혼식 한 사람 그런데 이 사람이 놀라운 건 한 여자와 결혼식을 32번 했다는 거예요. 32년을 살면서 매년 결혼식을 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 결혼식은 우리들이 처음 만나서 언약했던 그 시간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자 하는 거요.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생각했던 그 본질에 충실하다고 하는 거죠 우리가 이 성만찬을 거행하는 우리도 성만찬의 자리로 나아올 때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뭐냐면 우리를 처음 부르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이 기억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던 살과 피 그 값비싼 은혜를 우리들이 다시 기억하자는 거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성만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내가 주께 받은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은 것이 너무너무 감사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것을 나누고 있어요.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이 성만찬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신 그 의미가 누군가에게 얼마나 소중하게 전달될 수 있는가? 그것이 성 많잖아요. 오늘이 성만찬은 오늘 말씀에 보니까 “주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셨다.” 그래요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했더라고요. 온 더 나이트 He was betrate 예수님이 배신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베풀어 주셨어요.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주실 때, 그 중에 예수님을 배신할 제자를 주님이 알고 계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십자가를 다 떠나 있었어요. 바로 예수님을 배신했던 그날 밤, 예수님을 배신했던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주셨어요.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찢기는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흘리는데 언약의 피니라.” 주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시고 장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을 때까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죽으심을 제자들에게 언약으로 주셨어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
“너희들이 무엇을 기억하라고 너희들이 나를 배신했던 그 날조차도 내가 너희에게 살과 피를 주었던 이 날을 너희들이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우리들에게 성만찬을 주셨다는 거예요.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가 어떻게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할까? 오늘 본문 27-29절까지 말씀해 보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빵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빵 먹고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합당하지 않게 성만찬에 참여하면 주의 몸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요.
우리가 합당한 성만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너 자신을 살핀 이후에야 너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이 성만찬에 참여해라” 자기 자신을 살핀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어떤 목사님의 책에 보니까 통곡과 그리고 울음이 회개가 사라져 버린 천박한 오늘날의 기독교라고 하는 말을 쓰고 있어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이 우리가 믿는 이 고백이 너무너무 천박해졌대요. 왜냐하면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를 돌아보는 깊은 회개와 깊은 고통이 없이 우리들이 너무 쉽게 이 성만찬에 참여하며 우리들의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어 버렸다는 거예요.
저는 용서에 대한 그런 말씀을 할 때마다 제 머릿속에 늘 떠오르는 영화가 있어요.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한번 보여드린 적이 있어요. 밀양이라고 하는 영화인데 전도연이라고 하는 배우가 참 열연을 해요. 그 전도연 그 주인공이었던 그 여자의 아이가 살인범에게 살해를 당해요. 그리고 용서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에요. 반기독교적인 영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너무 기독교적인 영화입니다. 저 여인이 아들을 죽인 그 살인자를 용서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그 힘든 마음을 가지고 감옥을 찾아갔어요.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고 그런데 아들을 죽인 그 범인이여 나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다고 환한 얼굴로 나는 이렇게 용서 받았다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며 용서를 이야기할 수 없는 거예요. 그 사람이 정말 용서 받았다면 자기가 죽인 아이의 엄마 앞에서 어떻게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어요. 무릎을 꿇고 빌어야지요. 눈물을 흘려야지요. 통곡해야 해요. 내가 용서받은 것이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라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지를 보여 줘야지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들에게 살과 피를 흘려 주셨다는 그 은혜가 그렇게 값싸고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용서될 때 내 속에 통곡이 나오고 내 속에 하나님을 향한 회개의 고백이 나오지 않는 그 용서가 어떻게 진정한 용서가 될 수 있겠어요.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회는 우리는 용서를 너무 싸구려로 값어치 없는 것으로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며 성만찬에 참회하고 내가 주님의 몸이라고 이야기하며 나가서 또 죄를 지어요 그리고 또 너무 쉽게 용서받고 또 와서 죄를 지어요.
사도 바울이 바라볼 때 아니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볼 때이 성만찬이 그렇게 천박하게 그렇게 값어치 없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데 너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그렇게 욕보일 수 있느냐고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고 하면서 너무너무 이기적이고 너무너무 탐욕스럽고 너무너무 뻔뻔스러울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사도 바울은 성만찬을 모독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0-32절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잘못된 신앙에 대해서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징벌하시는 이유는 세상과 함께 우리로 하여금 멸망시키려 하심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을 징벌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8절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식탁의 교제 성만찬을 놓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무섭게 질책하는 이유는 너희들이 사생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친아들이기 때문이니라. 오늘 우리들이 이 말씀을 나누며 우리들이 주의 식탁 앞에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가볍게 살았느냐고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을 질책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사생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회복해야 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굉장히 인상적인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의 제사를 드리러 갑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하루 길쯤 왔는데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는 줄 알았는데 하룻길쯤 와서 보니 예수님이 없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찾으러 다시 하룻길 왔던 곳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참 신기한 것은 그들이 하루 길을 걸려서 예루살렘에 갔는데 예수님을 찾은 것은 사흘이 지난 후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인상적인 구조를 보았어요. 그들은 예수님을 찾으러 갔는데 그들이 생각하던 곳으로 찾아갔으나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고 사흘 동안 헤매며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가야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들이 살던 자리에서 내게로 돌아오라. 하룻길을 갔을지 모르지만 너희들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더 아픈 시간들과 더 큰 회개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우리들에게 그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세요.
오늘이 성만찬은 오늘 주님 앞에 주님을 떠났던 정말 은혜를 가볍게 생각했던 우리들이 주님 앞에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며 여기에 나오는 시간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이성만찬에 초대하려고 합니다.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라고 오늘 성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제가 십자가에 우리들의 기도 제목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맡기자 라고 했는데 잠깐 방법을 좀 보시고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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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의 모든 희망은 언제나 오늘 부터 입니다.
언제나 함께하는 마음과 좋은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건강 하시고 행복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우와~~ 참으로 놀라운 복음의 글 감사합니다.
감동과 은혜가 넘치는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잠 10:32).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