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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장 1~7절/ 구원의 근거가 되는 믿음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길을 지나가시다가 한 맹인을 고쳐 주는 사건인데 단순히 예수님께서는 맹인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복음서 여러 곳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시고, 귀먹은 자를 고치시기도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사건들 중에서 어떤 사건은 병자가 예수님께 먼저 고쳐주시기를 구해서 고쳐 주신 적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그에게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전혀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8장의 내용들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뜻 보아서는 앞의 상황과 연결이 된다는 것을 못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전반부에서는 예수님께서 진리와 생명과 빛이 되심을 선포하셔서 인간들의 반응을 기록하였고,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한 맹인을 붙잡으시는 장면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건은 단순한 이적사건이 아니라, 구원의 사건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무엇을 하시기 위해서 보내셨는가 하는 설명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야말로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가장 대표적인 설명이요, 기억해야 될 표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주제보다 구원의 근거가 되는 은혜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만난 맹인은 날 때부터 맹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라는 말은 자신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원래 보다가 맹인이 되었으면 빛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답답함이 더욱 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고 함은 빛이 있다는 사실 자체조차 알지 못하고 있기에 오히려 답답하지가 않습니다. 전혀 답답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맹인을 고치신 사건이 9장에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앞에 8장의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진리와 구원을 제시하셨을 때 어떠한 대접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더니 사람들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라라 하느냐“(요8‘33)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말을 깨닫지 못하며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요8;43) 하시니 유대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인데 어찌 우리에게 마귀의 자녀라고 하십니까?'(요8;44)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니다, 너희의 아비는 마귀니라'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자, 유대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너를 보니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요8;48) 이 대답은 사람들이 말싸움을 하다가 수세에 몰리면 빈정거리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자 다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왜 안 듣느냐(45절) 나는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말하고 있는데 너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왜 내 말은 듣지 않느냐?(42절) 지금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는데, 아브라함은 나를 보기를 그렇게 고대하였으며, 마침내 나를 보고서는 그렇게 기뻐하였었는데, 너희는 왜 안 믿느냐'(39~40절) 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행동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돌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59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더라."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바로 9장이 기록된 배경입니다.
요한복음 9장은 8장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혼돈을 일으키는 것은 '은혜'라는 단어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과 진리와 생명에 대한 말씀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주의 깊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믿는 것이 조건이 되어 구원을 얻었다면 이미 구원은 은혜가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구원을 설명하셨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거나, 우리가 결단해서 예수님을 믿기로 하여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감각도 없었고 요구도 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하여 요한복음 9장은 요한복음 8장이 전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죄인으로 태어나는 자연인에게 빛을 비춰주었더니 사람들은 빛을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죄인입니다.'하고 항복하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서만 고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12절에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말씀하셨더니 사람들이 그 빛을 따름으로 어둠의 생활을 청산한 것이 아니라 빛을 끄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동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궁리만 하는 것이 죄인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들은 죄인들이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1, 24)하면서 꾸짖었습니다. 이 같은 지적을 당하자 그들의 반응이 '옳습니다.'하면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예수님을 돌을 들어 죽이려 했다는 것이 복음서의 기록입니다.(요8;59)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어떻게 구원을 설명하셨는가의 기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설득하고, 설명시키고, 진리를 펼쳐보이자 사람들이 그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얼마나 끔찍하게 반대하였으며, 어떻게 그 빛을 꺼서 생명의 역사를 세우지 못하게 결의했는가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란 당신께서 죽으셔서 고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9장 6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 내용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사건이 여기에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도 있고,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도 있었지만 이상한 방법으로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말씀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구원 문제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구원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넣기 위해서 이런 특별한 방법을 쓰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방법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흙에 파묻히는 존재가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땅에 침을 흙에 뱉어서 이겨 진흙을 만들어 눈에 붙이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어서 흙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가장 비하된 위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으신 것은 그 자신이 흙속에 묻힐 것을 행위로써 나타내고 계십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인간의 눈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자신의 요구와 결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9장 1절을 볼 때,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예수님께서 붙잡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맹인이 예수님을 붙잡은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객관적 진리를 설명하고 내놓으시지만, 거기에 대하여 올바른 반응을 보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방법이란 9장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친히 붙잡으셔서 고치시는 방법밖에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는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빛이 있는 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누가 지나가는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누가 붙잡아야만 됩니까? 예수님께서 붙잡지 않으시면 붙잡힐 수가 없습니다. 이 사건에서 재미있는 점은 맹인이 스스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요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구원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알게 된 자들의 집단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얻어진 지위요, 신분입니다. 우리 중에는 누구도 구원해 달라고 먼저 예수님께 외친 자는 없습니다. 스스로 회개하여 용서받은 자도 없고, 주를 믿겠다고 홀로 결심하여 주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은 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 문제에 대해서 틀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자신의 결심과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받은 구원이라면 그것은 은혜가 이미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무엇이 구원인지를 알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더욱이 구원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존재라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요 지적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아무도 구원이 필요하다는 감정이 없었습니다. 욕구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회개를 했다거나,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고 느끼셨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을 듣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을 여는 행위가 우리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두들기지 않는 문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문을 열고서,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주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더 하사 찾아오셔서 당신이 문을 열어 응답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하여야 하지만 바빠지는 세상에게 너무 길어서 다 말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믿으시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시오!'라는 말속에는 앞에서 설명한 긴 의미가 녹아져 표현된 말인 것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등의 말도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한 마디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진리의 말씀과 생명의 말씀을 설명하였는데도 모두의 반응이 이를 갈면서 돌을 던지려고 하는 행위밖에는 더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을 기록한 목적은 바로 그 다음 9장의 내용으로 진입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성장은 출생 이후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9장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너희들은 이것을 분명히 알라. 너희가 지금 이 믿음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이 어떻게 하여 가능했는지 아느냐? 그것은 너희들이 스스로 믿었기 때문도 아니요, 어느 날 결심하게 되었기 때문도 아니라,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예수님께서 붙잡아 눈을 뜨게 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전적으로 은혜에 의하여 붙잡힌바 된 신분임을 잊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이 부분입니다. 요즘 불교계에서도 포교 방법을 바꾸어 옛날과는 달리 아주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름에 불교학교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찬불가를 가르치며 산속의 풍경 좋은 곳에서 나와 심지어 아파트촌에까지 침투해 들어와 불경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불경을 가르치는 집에 가 보면 분명히 불경을 가르치는데 거기에는 성경책도 꽂혀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도 도를 찾는 하나의 방법으로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도를 깨우치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지목하고 붙잡아 데려오지 않는 한,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도를 갈고 닦으며 득도의 길을 가는 때는 이미 구원을 얻은 신분이 된 다음부터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공로로 은혜를 입으면 그 순간 바로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숙시키는 기간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이후에라야 비로소 성숙한다는 것입니다. 이 성숙의 과정에 바로 득도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채우고 내 인생을 그 앞에 헌신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획득했기 때문에 출발되어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으로 말하자면 출산되었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러나 세상의 일반 종교가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떤 제시된 도를 그가 얼마나 수용하고 이해하여 해탈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기독교를 볼 때에도 도를 제시한 것 중의 하나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8장의 사건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기독교의 진리와 내용을 제시하면 인간은 그것을 깨우치고 뉘우치는 존재가 아니라, 도리어 돌을 들고 달려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의 도는 사람들이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죄를 지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권위적인 차원에서 우리처럼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지적이 없으며,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항복해야 된다는 말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아픈 이야기도 없고 오로지 잘난 사람이 되라는 말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논쟁을 벌이면 늘 기독교가 손해를 봅니다. 기독교는 편협하며 배타적인 종교가 되고 불교는 도량이 있는 종교가 됩니다. 여러분, 마음이 바다같이 넓어지는 것 같은 것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눈을 뜨지 않은 사람에게 제시한다면 기독교는 요한복음 8장과 같이 배척하고 돌을 드는 반응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종교는 수용을 받을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일차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은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 은혜가 왜 도입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같은 말씀이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요한복음 9장 4절에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은 번역상 잘못이 있습니다. 단수로서 '내가 하여야 하리라'가 옳습니다.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꼭 하여야만 한다.' 라는 것이 옳습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동사를 'must'(해야만 한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꼭'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을까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를 빛으로 꺼내 놓으셨지만 반응은 반대였으며, 생명으로 꺼내 놓으셨어도 반대하였고, 자유로 꺼내 놓았어도 반대하였기에 사람들의 현실과 현주소를 꼬집자 더더욱 반대하였습니다. 천국을 약속하였어도 반응하지 않았고, 진리와 사실을 증명해도 반응하지 않았으며, 마지막으로 그들이 누구인가를 지적하자 더욱 역반응을 나타내었으니 인간들에게는 더 이상 제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8장이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 쪽에 반응을 요구할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구하자면 어떤 방법이 남아 있습니까? 인간 쪽에서 안 된다면 그 반대편에서 강제로라도 끌고 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맹인 된"사람을 보고 '내가 붙잡고, 내가 고치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꼭' 해야겠다는 것은 상대방을 설득하고 가르쳐서 항복을 받아내는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상대방의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왜 그토록 기독교가 은혜를 강조하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예수님께서 꼭 하셔야 하는 그 유일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으로서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구원하시고 결정하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꼭 하셔야 되고 예수님을 보내신 이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는 그 일은 인간이 반응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독자적으로 하시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구원받은 자답지 못하고 살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그 방법 외에는 없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셔야만 되는 그 방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는 방법을 말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반응을 촉구하였으나 반응이 정상적으로 일어나지 않자 그 차선책으로 죽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이미 처음부터 죽으러 오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오해를 잘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즉, 인간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제대로 설명만 하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가 훨씬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유가 그러한 부분입니다. 통일교는 '예수님께서 구원을 설명하시러 오셨는데 그게 제대로 안되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제대로 못한 설명을 제대로 하기 위해 제2의 예수인 '문선명'이가 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럴듯하면서도 터무니없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죽으러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변경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건에서라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표하시곤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떡을 떼어 주심으로 죽음을 예표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면서 떡을 떼어 주셨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구원을 제시해도 알아들을 존재들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인생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오고, 나올 때마다 늘 졸리지만 어떤 이상한 힘에 의해서 나옵니다. 눈으로 보기에 역겨운 것들이 있지만 주일이면 또 나오게 되고, 주일을 그대로 지나치면 불안하니까 나와서 졸고, 비록 읽지는 않지만 보이는 곳에 성경을 비치해 놓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렇게 바뀐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다만 구원 얻은 자답지 않을 뿐입니다. 이 사실들을 이해하기가 그렇게 힘이 듭니다.
남보다 내가 낫다는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구원시켜 달라고 하였습니까? 여러분이 죄인임을 스스로 알고 회개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은 이차적인 차후의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일반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너무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뿐이지 '예수 믿으시오!'라는 말이 반응을 요구하는 표현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 외에는 구원할 방법이 없다는 수사학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나를 믿으라는 선포 속에는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신 것같이 저 영혼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이 '나는 이렇게 믿었는데, 너는 왜 안 믿느냐'는 차원에서 강압적으로 우기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는 얼마나 자랑을 일삼고 비교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 그 떳떳함으로 으스댄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는 '저 같은 것을 구원하셨단 말입니까? 전 한 번도 손을 내밀지 못했는데도 이 자리로 이끌어 내어주셨단 말입니까?'하는 이 감격입니다.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을 볼 때마다 죄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저 사람과 내가 무엇이 다르기에 나를 이렇게 데려다 놓았습니까? 저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저보다 낫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지위로 보나 모든 면에서 저보다 훨씬 나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저를 불러서 고쳐 주셨음에 그저 감사 감격할 따름이나이다.' 하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인도하셨습니다.
기독교에 이상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교회에 살그머니 발을 내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선뜻 항복까지는 못하고 몸만 참석하고 있는데 먼저 믿어 신앙생활에 좀 경건하다고 하는 자들이 마구 자랑을 해댑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는데, 오히려 이상한 사람을 만나자 상처와 충격을 받고는 다시는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누구의 잘못일까요? 사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성질의 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본성적으로 뻐기고 으스대고 자랑하는 일에 익숙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는 얼마든지 성숙되지 못한 불안정한 신자들을 만날 수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오히려 온전한 신자들만 만날 수 있는 교회라는 것이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자체가 그런 본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는 59절이라는 긴 분량으로 이에 대하여 끈질기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인간이 누구냐? 언제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정당하게 반응하였느냐? 정당한 반응은 이미 구원 얻고 난 다음의 차원이 아니냐?' 라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라는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나의 조건과 수준에 관계없이 하나님 쪽에서 나를 붙잡으시고 은혜를 베푸시어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서 인도하신 것에 대하여 감격과 감동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