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등장하는 대목에는 늘 성령님이 역사하신다. 마가복음 1장 10절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재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한 오늘 우리가 묵상할 중점적인 본문이 9장에서는 용모가 변화한다. 이것은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뻘래 하는 자가 희게할 수 없을 만큼의 광채가 난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 세상과 구별되는 다름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는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이 고백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에 흠집을 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만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나의 소속이 하늘에 있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이다.
둘째날 마가복음 말씀묵상
은혜체험 후, 사역하라
1.은혜체험 후, 제자들을 교육하셨다(9:9-13)
2.은혜체험 후, 병자를 고치셨다(9:14-29)
3.은혜체험 후,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9:14-29)
놀랍게도 은혜받으면 그 실천이 따라와야 한다. 은혜를 체험한 후, 행동으로 바로 뛰 따르지 않으면,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제 은혜를 받으면, 한 주일을 은혜롭게 지내는 것 까지 신경써야 한다. 그러므로 은혜 체험 자체보다, 우리는 그 다음 실천을 늘 생각하여야 한다. 그런데 역으로 실천만을 신앙생활 가운데서 신경쓰고, 은혜체험이 없으면 그러한 신앙인은 탈진한다. 우리는 지금 봉사가 힘들어졌는가? 그러면 우리는 은혜 체험이 우리 가운데 있는가를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 은혜를 체험하는 일이 없이 우리가 봉사를 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죽이는 일이다.
셋째날 마가복음 말씀묵상
진정한 제자들
1,어린아이들-가식에 대한 순수의 승리(9:35-37)
2,바디매오-정상에 대한 불구의 승리(10:46-52)
3.세 여인-강함에 대한 약함의 승리(16:1)
진정한 제자들이란 유명함에 그 기준이 있지 않다. 진정 제자들이란 무명한 것 같으나 유명한 자들을 의미한다. 정상이 최고 불구는 그 다음이라는 의식도 제자들을 구성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정상적인 생각은 아니다. 주님은 역전의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상식을 넘어선 방식으로 역사하신다. 남자만 인간으로 취급되던 그 당시 분위기에서 여인들이 세 제자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하는 생각은 대단히 혁명적인 생각이다. 주님은 사람을 쓰실 때, 우리의 판단을 넘어선 그 어떤 주님만의 기준으로 움직이신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인가?
넷째날 마가복음 말씀묵상
큰 자는 누구인가?
1.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가 큰 자이다(9:33-37)
2.물 한그릇의 작은 봉사라도 하는 자가 큰 자이다(9:41-42)
3.천국을 기준으로 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을 결단할 수 있는 자는 큰 지이다(9:43-50)
우리는 영접의 범위를 한정짓는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큭인 것을 아는가? 진정 큰 사람은 어린 아이 하나라도 진심으로 영접한다. 오늘 본문은 그런 영접을 실시할 수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영접한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밀이 영접의 범위 가운데 있다. 우리는 이름이 나는 봉사만 봉사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진정 봉사는 무엇일까? 물 한그릇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에게 공급하는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잇는 취선을 다하되, 드러내지 않는 봉사를 하여야 한다. 이것이 큰 일이다. 봉사를 하여 놓고 우리는 우리의 중심으로부터 올라오는 "인정받고 싶다"는 유혹을 이겨야 한다. 결국 천국이 기준이 되어 이 세상에서의 삶을 판단하며, 정리할 수 있는 자가 큰 자이다. 그는 큰 잣 대를 가지고 인생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판단기준은 천국인가? 이 세상인가?
다섯째날 마가복음 말씀묵상
주님의 직접성
1.모세를 거치지 않고, 이혼 문제를 직접 판단하시는 예수님(10:1-12)
2.제자들을 거치지 않고 어린아이를 용납하시는 예수님(10:13-16)
3.울법을 거치지 않고 복음으로 부자에게 질문하시는 예수님(10:17-31)
주님은 모세가 세워놓은 이혼에 관련된 율법을 넘어서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하나님이 짝 지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는 원칙을 천명하신다. 이는 모세를 넘어서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다.
마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로 어떤 대상들이 접근할 때, 자신들을 거쳐야(filtering)할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 부분을 책망하셨다. 어느 누구라도 직접 예수님에게로 올 수 있으며, 특히 어린 아이들은 직접 주님에게로 올 수 있는 참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십계명이라는 율법적 기준을 다 지켰어도, 복음적인 기준인 사랑에 실패하였다면 영생과 거리가 생긴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부자 청년을 통해 가르치고 계시다. 우리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주님이 세워 놓은 복음적인 기준, 사랑이란게 있다. 이 기준에서 우리는 온전하여야 한다.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님은 수난예고를 하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자리 싸움을 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답답한 일이다. 그들은 고난이 생략된 채로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죽임당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부분열의 분위기를 내보이고 있다. 예수님은 고난을 앞두고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예수님에게 위로가 되는 삶을 살 고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주님에게 힘이 되고, 주님이 내 덕을 보시도록 하는 노력을 우리는 감당하여야 한다.
일곱째 날 마가복음 말씀묵상
바디매오의 믿음
1. 겉옷을 내어 버리고- 생존 수단의 포기(10:50)
2.그가 심히 더욱 소리질러- 간절한 소원(10:48)
3.저가 곧 보게 되어 기에서 좇으니라- 고난의 길에 동참(10:52)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렸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예수님에게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겉옷은 거지였던 그에게 오늘 저녁 이불이 되어야 하는 절박한 품목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과감하게 내버린다. 그는 소리지름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 그는 인생의 간절함이 있었다. 믿음은 인생에 대한 간절함을 동반하여야 진실한 믿음이다. 그는 목적을 이루고 난 뒤, 고난의 길에 동참한다. 주님과의 고난의 길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