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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2강*징계가 복이다.
로마서1장24–28절 / 이찬수 목사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로마서 1장 하반부에 보니까 [바꾸었느니라.] [내버려 두사.] [바꾸었느니라.] [내버려 두사] [바꾸었느니라] [내버려 두사] 이 3번에 걸친 이 표현들 이것들은 이 최악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인간 타락의 악순환을 설명하는 표현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이 반복되는 이 표현들을 보면서 히브리서 12장8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8 모든 사람이 징계를 받으므로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가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
또, 구약의 신명기 8장5절도 ➤“5. 또 너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징계하듯 {창조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징계하심을 마음속 깊이 생각할지니라.” 사실 우리가 뭔가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데도 아무런 고통도 없고 가책도 없고 징계도 없고 그러면 한번 우리 돌아 보셔야 됩니다. 이 성정 들이 지금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 하신다는 겁니다.
구약의 인물 요나도 바로 그 케이스인데요. 여러분 다 하시지만 요나서 1장3절을 보십시오. ➤“3 그러나 요나가 {창조주}의 앞을 떠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일어나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이에 그가 {주}의 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그 안으로 들어 가니라.” 어떤 상황인가 하면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사명을 주셔서 가지고 니느웨로 가라 그렇게 명령 하시는데 요나가 그기에 정면으로 반발하면서 못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 다시스 라는 곳은 지도를 보면 하나님이 가나안 명하신 니느웨에 정반대 방향이에요. 그리고 요나서 1장3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라는 이런 표현을 2번이나 반복해서 지금 기록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상황은 그냥 어쩌다가 불순종하는 게 아니고 착심이 하고 대놓고 지금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불순종하는 상황인데 아니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렇게 편리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느냐?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는지라 이게 여러분 보기에 요나 입장에서 이 기분 너무 좋은 것 아닙니까? 아니 하나님께 반발에도 되네 불순종해도 일만 잘 풀리네! 이게 그런 상황이에요.
그 다음 나오는 요나서 1장4절을 보니까 ➤“4 ¶ 그러나 {창조주}께서 큰 바람을 바다로 보내시매 바다에 강력한 폭풍이 일어나서 그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으므로” 이것 역시도 지금 겉으로 보기에 요나가 풍랑을 만나 가지고 죽을 고생을 하고 이 경우 목숨을 보장 받을 수 없는 절망에 빠지는 일인데요. 이 두 사건이 겉으로 보기에는 이런 제 느낌을 주는 사건인데 우리 우리는 그 결과를 다 알지 않습니까? 이 조금 영안을 열고 깊이 사실을 들여다보니까요?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건 겉으로는 너무너무 행운 세상 말로 이 재수 좋은 날이다, 이런 날도 있네! 그렇지만 알고 봤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그 배가 이 사건은요, 요나를 더 불순종과 타락과 변질로 이끄는 무서운 흉기 같은 상황이고요. 4절에서 풍랑이 라는 건 겉으로 보기에는 방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기분 좋았던 아주 요나 마음을 그냥 기분을 잡치게 만들고 고통으로 몰고 가는 아주 악한 그 고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요나서 1장4절에서 요나가 만났던 그 풍랑은 요나가 더 큰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을 막아주는 변장하고 찾아온 하나님의 복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문제가 뭐냐 이게 영안이 어두워져 벌여 가지고요 우리는 그때 보이는 그 밖에는 못 보는 거요. 그냥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면 막 그게 막 왜냐? 대박이고 풍랑이 오면 이거는 뭐 그냥 아주 그칠 수 없는 일이고 이렇게 밖에는 볼 수 없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조금 더 깊이 영적인 눈을 뜨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고 하면 오늘 본문말씀 로마서 1장24-25절에 나오는 이 말씀입니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들 마음의 정욕을 통해 부정함에 내주사 그들이 자기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자]보다 창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느니라. 그분은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이시다. 아멘.”
이게 겉으로 보기에 이렇게 편한 게 있습니까? 야만 마음대로 살고 바람을 피고 막 그냥 탈세하고 뭐 그냥 돈 돈 하면서 남의 눈에 피눈물을 얘기해서 사기치고 그래도 안 들키고 아무 승승장구 보다 이게 굉장히 좋은 것 같지만요. 그럼으로 해서 이것 때문에 그 인생이 파멸하는 거예요. 오늘 이런 말씀들을 앞에 놓고 우리는 히브리서 12장6절 ➤“6.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친히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시느니. 하셨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실 제가 이게 뭐 농담 반 진담 반 인데요. 어떨 때 보면 그 정치꾼 목사들 있잖아요. 막 교회 돈을 그냥 자기 주머니 있는 것처럼 펑펑 쓰고 막 거짓말을 그냥 뭐 식은 죽 먹듯이 하고 이런 목사님들을 보면요. 어떨 때는 좀 부러워요. 아 이게 농담 반 또 진단만 인데요.
징계가 복이다.
이 세상살이 그렇게 그냥 거짓으로 포장되고 이런 사람은 뭐 잘 살고 뭐 아무런 가책도 안 느끼고 사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뭐 그거에 비해서 적금 안 한 거 아니 뭐 이 세상에서 뭐 그 정도 융통성 없이 되나? 이런 일을 하고도 막 잠이 안 오고 괴롭고 마음에 힘들고 불편하고 이게 제대로 된 신앙에는 모습 아닙니까? 제가 목사로 살아가면서 오죽하면 그 정치권 목사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겠냐고. 제대로 된 이 목회자 제대로 된 크리스찬은 세상사는 것이 많이 불편해요.
뭐 수시로 징계 하시니까 계속 징계 하시니 그러고 보면 여러분 구약에서 이 하나님의 징계를 제일 많은 많이 받은 백성이 누굽니까? 하나님 모르는 이방 민족의 아니잖아요. 구약에서 최고로 징계를 많이 받은 백성이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이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 이게 바로 히브리서 12장7절 말씀 ➤“7.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우리의 언약 쪼끔만 잘못을 저질러도 양심 느끼고 마음이 괴롭고 잠이 안 오고 그리고 또 실제로 뭐 쪼끔만 옆길로 가면 막 바로 하나님의 징계가 들어가면, 세상살이는 그게 좀 불편하지만 무슨 자부심을 느낍니까? “나 하나님의 아들 맞구나! 하나님 자녀 맞구나!” 미리 말씀을 지금 하고 있는 거요.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 본문에서 3번씩이나 반복되는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가 이 끝으로는 편리해 보이지만 이건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부분을 좀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그 자녀들에게 징계를 주신다 말씀 하시는데요. 그럼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징계를 통해서 뭘 깨닫기를 원하십니까? 뭘? 주식이 동원 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세 가지로 제가 정리를 해봤는데요.
첫째로,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는 그 첫째 [자각하기]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해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자각하기를 깨닫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21장1절을 보십시오. ➤“1.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일어나 다윗을 선동하여 이스라엘의 수를 세게 하니라.” 이게 지금 어떤 상황인가 하면요 다윗 왕이 지금 인구조사를 단행했습니다.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나라도 5년에 한번 아주 정밀한 인구조사를 하는 것처럼 왕으로서 인구조사를 지시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끝으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거기에 초점을 두시는 게 아니고 왜 하느냐? 그 마음의 동기를 하나님이 중요하게 보시거든요.
그래서 성경을 보니까 다윗이 인구조사 않은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인구조사를 하게 된 동기가 뭐냐? 1절에서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일어나” 무슨 상황인지 아시겠지요. 다윗이 교만해 가지고 인구조사를 통해서 자기과시를 거기의 드러내고자 하는 잘못된 동기가 있더라는 거요. 그래서 마귀의 충동질에 넘어가서 한 게 인구조사라는 거예요.
여러분 저는 이런 게 너무 불편해요. 아 제가 미국에서 직장생활 하고 또 비지니스 할 때는 동기고 뭐고 없음에도 돈 많이 벌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젊은 시절이니까 또는 돈 많이 벌어 가지고 40살 한국에 가서 고아원 차리고 양로원 차려야 되니까 돈 돈 하면서 열심히 돈 벌기를 원했는데요. 그러다가 목사가 되고 나니까 뭐가 불편하며 뭐 설교 잘하는 하나님 안보세요. 사람을 얼마나 모았나? 하나님 관심도 없었어요. 제가 저렇게 열심히 목회하는 의도가 뭐냐? 그 중심이 뭐냐? 그게 바르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실패자요. 다윗이 지금 그런 부분에서 이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랬더니 바로 하나님의 징계가 들어옵니다. 7절을 보십시오. ➤“7.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을 치시매 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하였으므로 크게 죄를 지었나이다. 그러나 이제 간청 하옵나니 주의 종의 불법을 없이 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어리석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이 일로 이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법이요.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공식을 발견해야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옆길로 가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징계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징계를 징계로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 가지고 바로 그것에 대하여 반응합니다. 회개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는 지금 이 다윗이 회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구조를 보면서 이건 너무 대조되는 한 모습이 떠오르는데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집트의 파라오 왕의 모습이에요. 이 파라오 왕 그 모습을 성경이 어떻게 묘사 하느냐?
출애굽기 7장13절 보십시오. ➤“13. 그분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으니 {창조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
이게 지금 파라오왕의 마음 상태에요. 그런데 여러분 이게 이제 성경이 번역이 바뀌어서 그런데요, 제가 중 고등학교시절에 개역성경에는 출애굽기 7장13절에 파라오의 그 상태를 묘사할 때 이 파라오의 아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여 할 때 [완악하여] 여러 옛날 개역성경에는 마음이 강팍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강팍이요. 이 단어는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 이런 뜻을 가진 단어요. 그래서 제 머리 속에 구약의 파라오 왕 하면 떠오르는 게 저는 강팍이라는 단어요. 강팍, 힘을 줘서 말해야 강팍한 인간, 이 파라오가 그렇게 강퍅함이요.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 얼마나 많이 그 파라오 왕하고 또 그 이집트의 임했습니까? 그런데 다윗과 파라오 왕 의 공통점이 뭐냐면 둘 다 옆길로 갔다. 이 공통점이 인데 차이점이 뭐냐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 하나님의 자녀인 다윗은 바로 반응이 있어서 회개하는 자리로 같고 파라오 왕은 그 무서운 수많은 심판 가운데에도 돌이킴이 없었습니다. 망할 때까지 다는 거요. 이 차이예요.
여러분 누구라서 이 세상 살다가 일시적으로 옆길로 갈 때가 없습니까? 누구라서 이 세상 살다가 강팍해 지지 않을 때가 없습니까? 누구라도 이 세상 살다가 여러분 엉뚱하게 죄짓고 잘못된 길을 헤매지 않는 때가 없느냐? 다윗도 그랬고 많은 성경 인물도 그렇고 저도 마찬가지에요. 저 역시도 목사가 된 이후로도 안 들켜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순간 강퍅한 지 아십니까? 오죽하면 이 단어를 다 찾아보았겠어요. 그러나 파라오 왕하고 저하고 차이가 뭐냐 물으면 감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 역시도 수 없이 강퍅한 순간이 많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때마다 회개하고 돌아오고 징계가 없어도 새벽에 묵상 하다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러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십니까? 하나님의 징계가 있어야 되요. 그리고 징계를 징계로 느낄 수 있는 영적인 민감하기 필요한 거요. 우리만 얼마나 미련한지 제가 우리 교역자들에게 구호처럼 외치는 게, 민감할 때, 민감하고 둔감 할 때, 둔감하자. 한 성도 섬기고 이럴 때는 더 민감하게 성도를 봐야 되는데 그런데는 둔하기 짝이 없고 누가 나보다 설교도 자라나 이런 거 좀 둔해도 괜찮은데 민감해 가지고 그 인생이 피곤한 거 아닙니까?
제가 이제 교육자들에게 따라 하라는데요. 여러분은 따라 해 보시겠습니까? [민감할 때 민감하고, 둔감 할 때, 둔감 하자] 여러분 민감해 줘야 될 때는 민감한 게 좋구요. 둔감해줘야 할 때는 둔감 한 게 좋은 거요.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가 돼 가지고 별 중요하지 않은데 민감해지고 맨날 상처 받고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징계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징계를 통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자각하기를 원하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 원하시는 게 뭐냐? 회복하기에요.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해 우리가 회복되기 원하십니다. 저는 히브리서 10장-12장에 나오는 이 징계라는 단어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은 이 징계나는 표현이 막 계속 반복되는 대목이 나오는데 자 한번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징계라는 단어를 추가하면서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10절까지 같이 있습니다. “6.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친히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시느니라. 하셨느니라. 7.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8. 모든 사람이 징계를 받으므로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가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 9. 또한 우리에게 있던 우리 육체의 아버지들이 우리를 바로잡아도 우리가 그들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우리가 더욱 복종하고 이로써 살아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10. 진실로 그들은 며칠 동안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시나니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즉 계속 이 [징계] 라는 단어가 반복이 되는데 중요한 게 뭐냐? 여러분 여기서 반복되는 이 징계는 단어는 원어로 보면은 파이듀오(Τιμωρία) 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의 원래 뜻은 아이를 양육하기 이런 뜻이요. 맨 앞에 나오는 히브리서 12장6절 말씀을 원어에 가깝게 의역하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자녀다운 모습으로 만드시기 위해 징계하신다.” 이 징계는 우리 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저주를 내리는 게 아니에요. 파이듀오(Τιμωρία) 그 사랑하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시는 그래서 옆길로 가던 거기서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행하시는 거기에 징계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히브리서 12장11절에 수없이 반복되는 그 징계, 징계, 징계에 징계, 이 말씀들에 결론은 한번 보십시오.
➤11절 “11. 이제 어떤 징계도 그 당시에는 기쁘게 보이지 아니하고 슬프게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것으로 인하여 단련된 자들에게 그것이 의로움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
징계의 유익이 말하는 거 아닙니까?
불행한 것은 오늘 우리 시대가 오늘 본문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이 [내버려 두사] 영적인 이단 병이 걸려 가지고 이 하나님의 사랑의 매 럴 인식하지를 못한 되는 거예요. 이게 몇 년 전에 일인데요. 제가 이제 그 정기검진 종합 검사를 제가 받았는데 이 결과를 보러 병원에 갔더니 의사분이 심각한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제 이 걷기 설명을 해주시는 그 여의사 분이 와서 이거는 저 심장 내과로 가셔야 된다고 그러면 뭐라고 소견서를 써 줘 가지고 제가 좀 긴장을 했어요. 제 병명이 무 통증 협심증이래요. 통증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조금만 아프면 통증은 복입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압박을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의 매, 이걸 우리가 느껴야 우리가 살게 되는 거예요.
구약의 인물 중에서 예레미야는 이 부분에 하주 민감했던 인물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 예레미야애가 3장1-6절을 보면 이 백성을 향한 무서운 하나님의 징계가 얼마나 예레미야를 고통 하게 만들었는지? 자 보십시오. ➤“1. 나는 그분의 진노의 막대기로 인하여 고난을 본 자로다. 2. 그분께서 나를 인도하사 어둠 속으로 데려가시고 빛 속으로 데려가지 아니하셨으며 3. 친히 돌이키사 확실히 나를 치시고 자신의 손을 돌리사 종일토록 나를 치시다. 4. 그분께서 나의 살과 피부를 낡게 하시고 나의 뼈들을 꺾으시며 5. 나를 치려고 산들을 쌓으시고 쓸개와 산고로 나를 에워싸시며 6. 죽은 지 오랜 자들 같이 나를 어두운 곳들에 두셨도다.”
여러분이 예레미야의 민감한 영성의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실은 예레미야가 지어진 거 아니잖아요. 그 죄짓는 악한 것들은 뻔뻔 해가지고 어떤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는데 예레미야는 지금도 너고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이 징계에 이 상황 앞에서 그 징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럼 18절을 보십시오. ➤“18. 내가 이르기를, 나의 힘과 나의 소망이 {창조주}를 떠나 사라졌다, 하였도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레미야 감정의 모순이 뭐냐면 참 아이러니 한 것이 방금 자기가 하나님의 징계로 소망이 끊어 질만큼 고통을 호소하는데요. 그런데 바로 그 다음 19-21절부터 보십시오. ➤“19. 내가 나의 고난과 나의 재난 곧 쑥과 쓸개를 기억하며 20. 내 혼이 여전히 그것들을 기억하므로 내 속에서 겸손하게 되었도다. 21. 내가 이것을 내 마음에서 생각하므로 내게 소망이 있도다.” 뭐라고 결론을 짓습니까? 예레미야가 뭘 이야기 합니까? 지금 한편으로 아파요. 고통이 너무 심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로 난 소망이 끊어졌다. 그렇게 토로하고는 바로 그 다음에 예레미야가 뭐라고 말합니까? 그런데 내가 지금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소망이 끊어진 이 상태가 사실은 내게 소망이다 이해가 되세요.
예레미야가 왜 그런 고백을 하느냐? 지금 이스라엘 민족의 범죄 함으로 하나님이 분노해서 우리를 멸 하시려고 징계 하시는 게 아니고 예레미야가 내가 깨달은 게 뭐예요. 신약으로 말하면 주께서 사랑하는 자녀 빠르게 깨우쳐 아름다운 길로 가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변장하고 찾아온 복인 걸 자기가 알기 때문에 범죄 한 자기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가 너무 너무 견디기 어려워 죽을 것 같은데 소망이 끊어졌는데 그 징계로 인한 소망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사실은 이게 우리의 소망이다. 여러분이 깊은 깨달음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징계도 없어 얼마나 살기 좋은지 아니 내 멋대로 살아도 나는 아무 일이 없더라. 주일을 범하여도 아니 뭐 문제가 생기나? 아내 말고 딴 여자들 사랑하니 바람을 피워도 들키기를 하나? 여러분 그 상태가 가장 무서운 저주의 상태에요.
마지막.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해 변환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해 우리의 잘못된 에너지가 건강한 에너지로 변환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여러분 지난 주 제가 로마서 1장24절에 그 원어로 설명해 드렸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여기에 나오는 이 정욕을 원어로 에피투미아(Επιτούμια) 라고 한다고 했는데요. 이 단어의 부정적인 뜻으로 쓰여 지면 성적인 타락을 포함한 금지된 것을 탐하는 악한 마음 이렇게 해석이 되는데 이게 긍정적으로 쓰여 지면 열정, 소원, 이런 뜻으로 쓰여 지는 단어요. 그러고 보면 이게 뿌리는 같은 거 같아요. 이게 지금 부정적으로 쓰여 가지고 성적인 타락을 포함한 금지된 것을 탐하는 악한 마음이라 그랬는데 여러분 바람을 피고 계시는 분 대답을 보세요. 그거 열정 없이는 못합니다.
우리가 직계 어른 사람은 마음은 있어도 그 귀찮아서 못해요. 한 집도 지금 귀찮아 죽겠는데 두 집을 오가면서 이거 열정 없이 못하는 거 아닙니까? 아 우리 같은 사람은 집의 있는 여자 하나도 감당을 못해 가지고 쩔쩔 매면서 야참 신부님이 부럽다 이렇게 하고 사는데 무슨 열정이 넘쳐 가지고 또 다른 한 여자에게 그 바람을 필 수 있는 건 어 정말 그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 대목은 존경을 이것도 열정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그 악한 곳에 열정을 쏟는 그 에너지의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로 변화가 되면 그 악한 열정이 있어야 열정으로 바뀌어 진 것이요.
제가 참 재미있는 구조를 발견했는데요. 데살로니가 2장17절에 보면 바울이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변화 바꿔줌으로 악한 열정이 변화가 끝난 뒤에 바울은 그 열정이란 것으로 바뀌어져 가지고 이렇게 여러분 형제를 세우고 살려주고 형제들을 위한 쪽으로 그 열정에 에너지가 쓰 이들은 것입니다. 무서운 흉기가 되고요.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의 통제 안에 놓이게 될 때 선한 열정으로 바뀌어 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전언을 세 가지 말씀을 드렸는데요.
하나님이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징계만 세 가지 목표를 한다. 하나는 자각하기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자각하기를 원하시고 두번째로 회복하기 잘못된 길에서 되더라. 다른 길로 돌아가기를 원하시고 세 번째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변환하기 우리의 악한 열정을 선한 열정으로 바꾸기를 원하신다 이 말씀을 드렸는데요. 사실 오늘 그 설교 제목이 좀 독특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로마서를 기록한 다음 길이에요. 여러분 어떤 상황이 있어요. 결론을 맺으면서 여러분 혹시 우리 중에 지금은 요나서 1장3절에 상태에 빠져 계시는 분 없습니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 무언지 설에도 안 들키고 뭔 짓을 해도 그냥 승승장구고 뭔 짓을 해도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오는 것 같은 이런 세상 말로 운수대통에 길을 걷는 분께서 주님 이름으로 경고하는데 그게 여러분 가장 무서운 저주의 상태에요. 이 끝 요나서 1장4절에 나오는 “{창조주}께서 큰 바람을 바다위에 내리시면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여러분! 인생의 내가 거의 깨지게 된 분들 여기 많이 계시잖아요? 그래서 아프고 힘들지요. 죽을 거 같고 예레미야 말처럼 소망을 잃어버린 거 같지요. 예레미야가 깨달은 그 깨달음처럼 여러분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 아파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그 상태가 사실은 그게 진짜 소망의 상태요. 이걸 자각한 계기로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그 우리도 바울처럼 나는 복음이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복음을 사랑합니다. 날 다시 돌아가게 해 준 이 복음을 신뢰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하나님 다윗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엉뚱한 길 잘못된 길, 옆길로 갈 때마다 내버려두지 마시고 징계 하셔서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 내도록 복을 내려 주시기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중에 징계 중에 있어 예레미아 처럼 소망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 중에 있지만 영안을 열고 보니 그것이 바로 내 소망 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 한편 아프고 상하고 마음이 무너지지 만 또 다른 마음 한편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발견하고 함께 기뻐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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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