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서 진행되는 모임들이 연기 혹은 축소되거나 아예 취소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혼식도 온라인으로 진행하며, 함께 모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는 일도 있음을 뉴스를 통해서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함께 지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들에 대한 장례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문을 받지도 못하고, 가까운 친지만 모여 장례를 치루는 일이 우리 가운데에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그것은 우리나라의 사정이었습니다. 아직 코로나의 영향이 강력한 나라에서는 그 마저도 어려워 가족들도 함께 하지 못하고, 또 장례를 진행할 수 있는 장소와 인력조차도 마련되지 않아, 장례를 아예 치루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세계 곳곳에서 지금 현재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가장 쓸쓸한 장례식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에는 조문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장례예식을 치르지도 못하고 바로 무덤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제자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자신이 쓰려던 새 무덤에 장사를 지낸 것이 다였습니다.
태어날 때도 그 누일 곳이 없어서 구유에 뉘였는데, 그 장례 또한 너무나 초라하였습니다. 이 땅에 오실 때와 더불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뭇 사람들은 이렇게 어려운 환경 가운데 태어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또 살아가면서 어려움 가운데 지내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인생무상을 떠올리는 죽음 앞에서의 안타까움에 대해 한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초라함과 쓸쓸한 장례 앞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장례가 화려하다고 죽은 자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쓸쓸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장례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죽음 앞에서도 또 어떠한 장례의 모습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그 어느 해 보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과, 십자가 사랑에 대해서 가슴 깊이 깨닫는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고, 또 모진 고통을 이겨내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으며, 끝까지 사랑하심을 죽음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례마저도 너무나 초라하고 쓸쓸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소망이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소망은, 부활의 산 소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고귀한 죽음을 떠올리며, 우리의 삶을 묵묵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마 8:20)하시며, 홀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주님을 묵상하며, “어제보다 오늘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었는데, 정작 주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머리 둘 곳 없이 홀로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셨음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삶과 죽음 앞에서 한탄을 하지만, 주님께서 걸으신 길은 결코 그것이 끝이 아님을 믿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갖고 이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자 합니다. 주님 함께 하여 주시고, 죽음에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승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