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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든 것같이
요한복음 3장14-19절 / 호일맥 목사
➤“14.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15.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6.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18. ¶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 19.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4-19 KJV)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만남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처음 보는 상황을 보면 그의 신분이 있으니 밤에 조용히 찾아와서 장황한 인사를 늘어놓으면서 예의를 갖추고 체면을 차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던 니고데모가 어느 사이에 예수님의 말씀과 그 인격, 그 매력에 흡수되어 완전히 빠져들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유대 나라의 종교적 정치적 고관이었던 그가 이제는 마치 어린아이가 호기심으로 인해 어른들에게 “이것은 무엇인가요? 왜 그렇지요?” 하며 줄곧 질문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예수님으로 부터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모르느냐?” 하는 말씀까지 듣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거듭남의 교리를 말씀하시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수 있습니까? 하는 것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는 두 가지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질문은 사실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나온 질문인 것입니다. 만약 이 질문을 지식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렇게 유치한 질문이 있을 수가 없겠는가? 영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참으로 순진하고 깨끗한 마음에서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하는 질문을 두고 재해석을 해 본다면 “사람이 워낙 고질적인 인간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하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우리 주위에서도 보면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교양도 있는데 그 사람됨이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성격이나 생각하는 바가 잘못 고질화되어 자신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을 괴롭힘에도 영 바꾸어지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관한 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변화하기가 힘든 일입니다. 흔히들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관념이나 성격, 체질, 등을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깨끗이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 대해서 남에게 대해서나 마찬가지로 "구제불능인가 보다"라는 낙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덤에 갈 때까지 못 고칠 것
♦제가 아는 어떤 여자 분은 남편이 술 마시고 니나노 술집 다니는 것으로 낙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밤에 비명 소리가 들려서 뛰쳐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 되는 분이 술 먹고 부인을 들어와서 때리니 아이들이 다 울고 아내는 도망을 갔는데 못 찾는 것입니다. 순진한 나는 부인이 도망을 갔으면 술 깰 때까지 찾아 주지 말아야 하는데 그 밤에 사명감으로 찾다 보니 닭장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겁을 먹고 “제발 못 찾았다.” 하라고 사정을 하여서 닭장을 나오면서 [괜한 짓을 했네!] 후회를 했습니다. 사람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육신적으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달라질까요?”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50-60년이 된 이 고질병도 달라 질 수가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님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는 하지 못해도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하신다는 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에 육으로서는 아무리 결심을 하고 교양을 쌓아 보아도 육이지만 [영]은 성령님으로 나는 것이기에 오직 위로부터 나는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거듭나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의 배경?
“어찌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 하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집약하면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리라” 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앞에서 주신 말씀과 종합해 보면 성령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만이 사람이 영적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 외의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고질화된 인간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민수기 21장4-6절 말씀에 ➤“4. ¶ 그들이 호르산에서 이동하여 홍해 길로 에돔 땅을 돌아가려 하였으나 그 길로 인해 백성의 혼이 심히 낙담하여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며 말하되, 어찌하여 당신들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와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거기에는 빵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혼이 이 푸석푸석한 빵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창조주}께서 불 뱀들을 백성 가운데로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죽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로부터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 길을 거처 요르단 강 가까이에 까지 이르러 가나안을 정탐까지 하였으나 저들의 불신앙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홍해의 광야 길로 돌아서 가게 하십니다. 저들이 그 날짜를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40년에 걸쳐 1세대가 다 죽기까지 광야를 헤매게 하십니다. 이렇게 됨으로 더욱 지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길이 못마땅하여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여 먹을 것도 없는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창조주께서 인도하시는 길이요, 하나님께 필요해서 주시는 과정인데 이 백성들은 그것이 못마땅하여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8-11절에서 “8.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쓰러졌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또한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이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뱀들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또한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이 불평하다가 파멸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불평하지 말라. 11. 이제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났으며 또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창조주를 시험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
여러분 죄를 범함에도 믿는 사람이 범하는 죄가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죄, 즉 절도나 강도, 사기, 살인 등의 이러한 범죄는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달리 믿는 사람들이 범하는 죄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예 믿지 않는 사람은 원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도 없는데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기에 또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에게 이 두 가지의 결정적인 죄가 있음을 기억하고 거기 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지경에서도 창조주를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하나님의 훈련 코-스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십시다. 길로 인하여 마음 상해하지 말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동(東)으로 인도하시든 서(西)로 인도하시든, 가난으로 인도하시든 부로 인도하시든, 어느 길로 인도하시든 원망하지 마십시다.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마십시다.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래도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목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을 원망 하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불 뱀을 보내시어 물려 죽게 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렇게 불 뱀으로 되어있지만 어떤 성경에는 날아다니는 뱀으로 번역된 것도 있습니다. 이 뱀은 땅으로 기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면서 마구 무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피할 길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물리면 그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불을 먹은 것처럼 목이 타면서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부어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불 뱀이라고 한 것인데 아무튼 이렇게 무서운 뱀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어서는 사람들을 물어 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깨닫고 모세가 백성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뱀들이 물러가게 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창조주는 믿음을 보십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래 너희들이 이렇게 참회하니 내가 용서하겠다. 이제 다 용서한다.” 라는 식으로 일괄적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간단한 지시입니까? 그러나 그것을 쳐다보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저 간단히 쳐다보면 될 것을 그것을 안쳐다보고 죽을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이와 같은 경우는 구약성경 열왕기하 5장에 기록된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문둥병이든 시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 가서 문둥병을 고쳐줄 것을 부탁하자 엘리사선지는 요르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몸이 깨끗하여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대노(大怒)하여 우리나라에는 더 좋은 강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여기까지 와서 저 보잘것없는 요르단 강에서 목욕을 할 것이 무엇이냐며 돌아갈 것을 재촉합니다.
이때에 그의 지혜로운 종이 나아만 장군께 간청하기를 이 보다 더 큰일을 명하여도 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몸을 씻으라는 이 간단한 일을 하지 않고 그냥 갈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말합니다. 종의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이 그 말이 옳다는 생각으로 여겨서 요르단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잠그고는 어린아이의 살결같이 깨끗하여졌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저 시선만 높여 간단히 쳐다보면 될 것을 안쳐다보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 뱀의 독으로 시각을 다투는 지경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명하여도 해야 할 것인데 '쳐다보라'는 이 간단한 것을 쳐다보지 않고 죽는다면 그것은 죽어도 싼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마디로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꼭 그와 같습니다.
믿음으로 창조주만 바라보면 되는 것을 안쳐다보고 죽는 것입니다. 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땅만 보고 기어 들어가면서 원망을 하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사죄와 용서가 있고 약속이 있지만 이 허락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쳐다보는 조건이 수행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내 생각을 벼려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구리 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뱀은 뱀이되 진짜 뱀이 아니고 가짜 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뱀은 악의 상징이요 사탄과 마귀의 상징입니다. 이는 에덴동산의 사건에서부터 이어져온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장대에 달려있는 뱀은 뱀의 모양은 있으나 뱀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으나 죄인은 아니며 저주받은 자의 모습으로 죽었으나 저주 받은 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구리 뱀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실 신앙의 눈으로 깊이 쳐다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건이 아니라 사탄이 십자가에 속박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봄의 법칙
구리 뱀을 장대 위에 매달고 그리고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쳐다보라는 말씀이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쳐다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된다. 안 된다] 구원 받을 것이다. 못 받을 것이다.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라고 하는 것을 말하거나 물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쳐다보라면 쳐다보는 것입니다. 분명 거기에 확실한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내게 효력을 발하는데 있어서는 내가 쳐다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내놓을 수 있는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아닌 바라보는 믿음,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보면 내용도 많고 소원도 많습니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하면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이 말 외에 다른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을 쳐다보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은혜로,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으며,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나의 영광을 위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드러내기 위해 사는 그것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비라보면서 생각할 것은 옛사람인 나는 저 죽은 구리뱀과 함께 죽었음을 깨닫고 그 구리뱀과 나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와 하나가 된 사람은 말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무슨 말을 하고 불평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죽었고 그런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본다면 여기에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지금 이내 다 죽은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뱀에 물렸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다 죽을 것이므로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살 것이다.” 라고 하는 생명의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쳐다보라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는 자에게만 살게 되는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의 조건! 바라보라!
이것은 종말적인 메시지요, 마지막 통첩입니다. 쳐다보면 살고 쳐다보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이제 와서 쳐다보지 않기 때문에 새삼스레 죽는 것이 아니라 뱀에게 물리는 순간 이미 죽은 것입니다. 본문 말씀18절에 보면 ➤“18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22-24절 말씀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고 하십니다. 이 귀중한 모든 말씀을 비유로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 구리 뱀 이야기입니다.
구리 뱀을 매달아 놓고 바라보라! 그러면 살 것이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치를 따지지도 말고 변명을 하지도 마십시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쳐다보면 그렇게 바라보는 중에 십자가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내게로 전달되어 상상 밖의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 예배당은 나오는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대전으로 출장을 갔는데 고속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어느 여자 분이 꼭 그 시간에 버스를 타야 일을 본다고 다음 버스표를 내놓으면서 양보를 부탁하기에 양보하고 30분후에 다음 차를 타고 가다보니 먼저 자기가 타고 가려던 버스가 사고가 났는데 자기가 탄자리가 맨 뒷자리인데 크레인 차가 고속버스를 뒤에서 박아서 자기가 타고 가려던 자리와 근방에 몇 명이 처참하게 죽은 것을 보고 크게 놀란 후에 감사와 감격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바라보라고 하셨으니 바라보면 거기에서 신비로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능력이나 계산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도 누구이든 나는 구제불능인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고질적인 구제 불능한 것도 성령과 십자가의 능력 앞에서만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의 능력 앞에서 녹아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독사의 독에 의해서 온 몸의 열기가 불덩이 같고 몸이 부어 당장에 터져 죽을 지경이라 하더라도 바라만 보면 신비롭게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묻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것이 가능한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가능성을 물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에 우리의 전부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 살게 되자 마치 구리 뱀에게 무슨 마력(魔力)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그 뒤에는 구리 뱀을 성전에 갖다 놓고 구리 뱀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리 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라본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고 이것을 우상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18장4절에 보면 모세가 만들었던 구리 뱀을 부수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결코 구리 뱀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구리 뱀을 매달라는 것이요,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이와 같은 어리석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두고 다시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소중한 진리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네가 개인의 죄가 사해져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 싶으냐? 그렇다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십자가에 들릴 것이니 그 때에 너는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영적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를 바라보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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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끝이 내일의 처음입니다. 오늘 무엇을 했느냐가 내일을 결정합니다.
오늘 바쁜 일을 미루면 더 바쁜 내일이 되고, 오늘 바쁜 일을 처리하면
여유로운 내일이 됩니다. 오늘도 좋은 생각들, 마음들을 가지고 보내도록해요.
꽃길만 걸으시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주인공으로 출발하시는 하루 되세요.💖
말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