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에 숨은 영웅 사호공 오익창 역사기록. ................................................................. 일기에 없는 의병의 참전
명량해전에 피난민으로 구성된 의병(義兵)이 참전했을까? 《난중일기》에는 피난민 의병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면, 피난민들이 이순신 부대의 후방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행록》과 이순신과 동시대 사람인 이항복이 지은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가 대표적인 기록이다. 《이충무공행록》에는 명량해전 전에 백성들이 이순신의 수군에게 군량과 옷감을 제공했으며, 명량해전 때에는 “(피난민들의) 배를 시켜 먼 바다에 늘여 세워 후원하는 배처럼 보이게 해 놓고 공(이순신)이 앞으로 나가 힘써 싸웠다”고 나온다. 이항복이 남긴 글에서도 “공(이순신)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으로 인해 먼저 피난민들의 배로 하여금 차례로 물러나 진을 치게 해 이들을 가짜 군사(疑兵, 의병)으로 삼고,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맨 앞에 나가 있었다”라고 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피난민들의 일부는 이순신의 당부에 따라 산위로 피난을 했고 전투를 직접 목격하면서 응원했고, 다른 일부는 피난선을 타고 이순신의 후방에서 이순신의 수군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이순신을 지원한 피난선의 수는 기록(《선조수정실록》, 《난중잡록》, <고통제사이공유사(이항복)>, <오익창전(서명응)> 등)차이는 있지만 최소 100척 이상이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1533~1592)의 후손 고정헌이 1799년에 간행한 《호남절의록》에는 단순히 의병(疑兵)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명량해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피난민들의 사례도 나온다. 마하수는 두 아들 성룡·위룡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고, 문대상과 김영수도 전사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감(造船監)으로 전선을 제작했던 김세호도 전사했다.
...............................................................................................................................................................
명량대첩 과 사호오익창 선생 공적.
명량대첩은 이순신장군이 13척의 함대로, 왜군 330여척의 함대을 물리친 기적의 전쟁이였다. 전쟁이 끝난후에 이순신 장군은 천행 (행운) 이였다. 라고 난중일기에 기록하였다. 명량 대첩 에서 사호 오익창은 어떤 역활을 하였는가? 명량해전이 있었던 100 년후, 1700 년대에 조선 조정의 대신들과 유림의 선비들이 함께 사호 오익창의 명량해전 공로을 많은기록으로 상세하게 남겼다. 홍문관대제학 서명응이 보만제 집에, 수원성을 쌓은 재상 체재공이 번암집에, 오익창사호집에 명량해전의 어려웠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鳴梁海戰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孫左賓客 徐命膺撰
丁酉統制使李舜臣 率舟師 禦倭奴於閑山島 當元均敗衂之餘 收合煨燼戰艦僅十有二 而嶺湖士大夫浮海逃亂者千餘艘 欲散而之諸島 公奮曰賊兵衆 統制之兵寡 其敗可立而待也 統制敗則我之藩籬撤矣 雖欲各保孤島 得乎 毋寧幷力合勢 爲統制聲援 有可以苟全之路 藉令俱死 亦有爲國效忠之名也 衆曰善 遂爲文布告諸舡 於是千艘揚帆 俱列統制舡後 聯成水寨 陣勢甚壯 公乘輕舠 往來統制船 與籌畵軍事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方秋風高 海氣凛凛 徹人肌骨 統制軍皆被褐呼寒 糧且盡 公以忠義激諸船人 各出襦衣米斛 滿載一船 躬卛至統制軍 軍皆感悅
初 公之避兵也 隣里人盡棄所旨蓄之冬瓜 委諸道 公則一一收載小舟隨於後 人莫測其意 至是統制軍 與倭奴戰酣渴甚 公割冬瓜分與之 使救其渴 倭奴善鳥銃 每兩陣相對 鐵丸亂落如雨 我軍遇卽斃倒 人皆惴惴 無以禦 公收諸船 得絮衾百餘 漬水張之 丸不能透 統制益推公智慮 爲小冊紀公實績 待他日事竣 欲讓功於公 未幾殉節未果上 寇退 朝廷以公爲濟源道察訪 當是時 大明援兵尙駐湖南 餽餉一不均 守令之爲差員者 被箠罵十而八九 觀察使韓孝純 卽以公爲差員 每當支放 公未嘗布筭 但從袖中屈指默數 升龠無所遺 天將以爲神 大加敬重 經年責應 一不被其詰
尋歷義禁府都事 司憲府監察 工刑曺佐郞正郞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명량해전
숭정대부 행호조판서 겸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세손좌빈객 서명응(徐命膺) 짓다.
정유년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한산도에서 왜놈들을 방어하는데, 원균(元均)이 패배한 직후라서 불에 타버린 전함들을 거두어 모으니 겨우 12척만이 있었다. 영호남(嶺湖南)의 사대부들 중에 바다를 항해하여 난리를 피하는 자 천여 척이 흩어져서 여러 섬으로 가려고 하자, 공이 분발하여 말했다. “적병이 많고 통제사의 병사는 적어 금방 패배하고 말 것이다. 통제사가 패하게 되면 우리의 울타리가 철거될 것이니, 비록 외딴 섬에서 저마다 보전하고자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힘을 모아 합세하여 통제사를 위해 성원(聲援)한다면, 온전히 살 길이 있을 것이니, 가령 모두 죽을지라도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명분은 있게 될 것이오.” 모두가 좋다고 응하였다. 마침내 글을 지어 여러 선박에 포고하자, 이에 천여 척의 배들이 출항하여 모두 통제사의 배 뒤에 늘어서서 물위의 성곽 모양을 연이어 이루니 진영의 형세가 매우 웅장했다. 공이 날렵한 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군사의 일들을 계획하니, 통제사가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고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에게 자주 찾아 왔다. 가을에 바람도 거세지고 바다의 기운이 쌀쌀하여 사람의 살갗과 뼈에 스미는데, 통제사의 군사들은 모두 갈옷을 입고 추위를 호소하고 양식도 다 떨어지자, 공이 충성과 의리로 여러 배에 탄 사람들을 격려하고, 각기 저고리와 쌀가마를 내어서 한 배에 가득히 싣고서 직접 거느리고 통제사의 군대에 이르니 군사들이 모두 감복하고 기뻐하였다. 당초에 공이 피난할 때 이웃마을 사람들이 비축해둔 동아[冬瓜]를 모두 버려 길에 쌓인 것을 공이 일일이 거두어 작은 배에 싣고 뒤를 따랐는데 사람들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통제사의 군대가 왜놈과 한창 싸울 때 매우 목이 말랐는데 공이 동아를 잘라서 나누어 주어 갈증을 구하게 하였다. 왜놈들이 조총(鳥銃)을 잘 쏘았는데 매번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면 철환(鐵丸)이 비 오듯이 어지럽게 떨어지고, 우리 군사들이 맞기만하면 바로 쓰러져 죽었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방어할 길이 없었는데, 공이 여러 선박을 수습하여 솜이불 백여 개를 얻어 물에 적셔서 펼치니 철환이 침투하지 못하였다. 이에 통제사가 공의 지혜로운 사려를 더욱 추대하여 작은 책자를 만들어 공의 실제 공적을 기록하였고, 다른 날에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공에게 공로를 양보하고자 했으나 얼마 안가서 순절(殉節)하여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왜구가 물러가자 조정은 공을 제원도(濟源道) 찰방(察訪)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명나라의 지원병이 호남에 여전히 머물렀는데 지원물품이 한결같이 고르지 못하여 수령이 보낸 파견관리[差員]가 매질과 꾸지람을 받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관찰사 한효순(韓孝純)이 바로 공을 파견관리로 임명하니 매번 녹봉을 지급하게 될 때가 되면 공이 셈을 한 적은 없었으나, 소매 안에서 손꼽아 셈한 것이 승약(升龠)1) 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명나라 장수가 신기하게 여겨 크게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여러 해 동안 책임지고 물품을 내주었는데 한 번도 힐책을 받지 않았다. 이윽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공조(工曹)․형조(刑曹)좌랑(佐郞)․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1) 승(升)은 한 되, 약(龠)은 한 홉의 십분지일. 여기서는 작은 양을 뜻함.
鳴梁海戰
輔國崇祿大夫 知中樞府事 兼 禮曹判書 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舘事 弘文舘提學 藝文舘提學 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孫左賓客 奎章閣提學 蔡濟恭 撰.
宣祖丁酉, 忠武公李舜臣, 以統制使禦倭於閑山島, 時當元均新敗, 戰艦財十有二, 賊船蔽海以集. 時南中士大夫之避賊亂, 以海爲歸者, 舡可以千數, 見統制軍弱, 皆欲散而之四. 公泣謂衆曰, 公等散, 統制無援矣. 統制無援, 賊必輕視我, 乘勝而進, 是無國也. 安有無國, 而民可以獨全也哉? 衆亦泣, 齊聲曰然. 於是連舡, 綴統制軍後, 以助聲勢, 軍聲復振. 統制軍寒, 則諭 諸舡, 脫衣而授之. 統制軍罹賊丸, 士卒無人色, 則諭諸舡, 進絮衾百餘, 漬水以張, 俾丸不得徹. 方其酣戰也, 櫓卒渴, 無以制舡. 統制急不知爲計, 公取東苽舡以沃之. 先是, 公避寇而跳也, 棄家藏不顧, 拾村里所棄東苽, 盈舡而後止. 人怪之, 至是始服其智慮焉. 統制奇其才, 欲薦之朝, 會統制歿, 公亦匿不言. 然朝廷聞公名, 除濟源察訪. 當是時, 天兵軍湖南, 折辱接待官吏, 吏無有得免者. 觀察使檄公主放料, 公不布籌, 密有心計, 毫 未嘗有差, 天將皆嘖嘖焉. 歷宗簿寺直長, 義禁府都事, 司憲府監察, 工刑二曺正佐郞.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명량해전
보국숭록대부 지중추부사 겸 예조 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손좌빈객 규장각 제학 채제공(蔡濟恭)이 짓다.
선조 정유년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통제사로 한산도에서 왜적을 막았는데 그때 원균(元均)이 막 패한 때여서 전함이 겨우 열두 척 뿐이었고 적선은 바다를 덮을 정도로 모였다. 그때에 남쪽의 사대부가 피난하여서 바다로 몰려든 사람의 배가 거의 천척을 헤아렸는데 통제사의 군대가 약한 것을 보고 모두 사방으로 흩어지고자 하였다. 공이 여러 사람들에게 울며 말하기를 “공들은 흩어지나 통제사에게는 원조가 없다. 통제사에게 원조가 없다면 적은 반드시 우리를 경시할 것이니 적이 승기를 타고 진격한다면 이것은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다. 어찌 나라 없이 백성이 홀로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니 여러 사람이 또한 울면서 일제히 “그렇다.”고 소리쳤다. 이에 배를 연결하여 통제사 군선의 뒤에 이어 소리를 질러 전세를 도우니 군대의 사기가 다시 진작되었다. 통제사의 군대가 추위에 떠니 여러 배에 사람들을 타일러 옷을 벗어 주도록 했다. 통제사의 군대가 적의 탄환을 근심하여 군졸들이 낯빛을 잃으니 여러 배에 요청하여 솜이불 백여 개를 구해주고 물에 적셔서 걸어두게 하니 탄환이 뚫지 못하였다. 바야흐로 전쟁이 한창일 때 노를 젓는 군졸이 목이 타 배를 움직일 수 없었다. 통제사가 다급히 여기며 어떻게 할 줄 몰랐는데 공이 동아[東苽]를 실은 배를 끌어다가 목을 축이게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이 적을 피하여 도망가면서 집안의 기물은 버리고 돌아보지 않고서 마을에 버려진 동아를 주워 담았는데 배에 가득 채우고서야 그쳤다.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지혜에 감복하였다. 통제사가 그의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조정에 천거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통제사가 죽게 되고 공도 또한 숨기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의 명성을 듣고 제원도(濟源道) 찰방에 제수하였다. 이때에 명나라 군대가 호남 땅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접대하는 관리에게 곤욕을 치르게 했는데 면할 수 있는 관리가 없었다. 관찰사가 공을 임명하여 군량을 배분하도록 시켰는데 공이 산가지도 늘여놓지 않고 속셈으로 계산하였는데 조금도 어긋난 적이 없으니 명나라 장수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종부시 직장,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공조와 형조의 정랑과 좌랑을 역임하였다.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鳴梁海戰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李華鎭撰.
丁酉倭亂, 李統制使舜臣, 摠舟師, 禦賊於閑山島. 時, 當元均新敗之餘, 戰舡纔十二隻. 而南中士夫避亂諸舡, 多不可勝數, 見其舟師之孤弱, 皆欲散投於諸島, 以爲各自謀生之計. 公倡于衆曰, 國家存亡, 在此舟師之勝敗, 而今者, 賊舡蔽海, 統制所領之舡則甚尠. 不但衆寡之不敵, 賊必小覷, 而有輕我之心, 豈不危哉? 今我避亂諸舡, 各有資粮弓矢, 一齊排列於戰舡之後, 一以爲其聲援, 一以助其資粮, 則遏彼長駈之銃, 固我相依之勢, 一片江淮, 庶爲保障之地. 今若各自爲心散入於諸島, 則統制之勢, 必孤矣. 統制不利, 則賊必乘勝而進, 其如國事何哉? 國事一去, 則遠近諸島, 其能免魚肉之禍哉? 設或免禍, 獨不羞於苟活乎? 先以利害誘之, 又以義理曉之. 仍卽發文通告諸船, 諸船中士夫, 皆以同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亂諸舡, 布陣於戰艦之後, 以助其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畵,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時當暮秋, 海風日高, 舡中將士, 猶着夏服, 而軍需且乏, 統制深以爲憂, 計無所出. 公先脫襦衣, 且出米斛, 因通諭諸舡, 使之相助, 則諸船之人, 各出衣粮. 滿載一舡, 親領而進, 主將大喜, 擇着一領, 分給將士. 十二舡軍卒, 得免飢寒, 皆樂爲用. 兩軍鏖戰之際, 銃丸如雨, 無以遮禦, 公收於諸舡, 得絮衾百餘, 漬水以掛, 丸不得透焉. 始公避寇登舡也, 捨其家藏, 而多取村人所棄東苽, 滿載別船一隻, 而行人皆未曉其意. 及其舟師力戰之時, 櫓卒渴甚無水可救, 公引東苽舡, 分饋諸卒, 以解其渴, 人於是始服其智慮之兼備也. 統制心信而誠服, 軍中大小事, 悉與之相議. 每稱曰, 若夫成功, 則皆君之力也. 仍作冊記之, 以爲他日讓功之地, 惜乎, 統制徑殞, 終未能上徹, 而公亦自晦, 故世不得盡知之. 寇退之後, 朝廷以公有聲望, 特除濟源道察訪. 時, 天兵留鎭於湖南, 其數多. 恐喝亦甚, 接待之官, 免其笞罵者, 十無一人. 道臣韓孝純, 以公爲唐軍, 放料差員, 公素善算法, 袖手心計, 毫釐莫漏. 韓觀察常加歎, 賞曰, 不煩布算, 料量不差, 督郵1) 算學, 何其神也? 每至放料, 少無盈縮, 天將以下, 亦皆驚歎而加敬. 其他治法軍謀, 一詢於公, 無不逐節而合宜, 韓公尤重焉.
殘驛得蘇, 疲卒賴安, 至今濟源道上有公遺愛碑. 其後歷宗簿寺直長, 義禁府都事, 司憲府監察, 工刑曺正佐郞,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명량해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이화진(李華鎭)이 짓다.
정유왜란이 일어났을 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지휘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을 방어하였다. 이때는 원균(元均)이 패배를 한 뒤여서 전함이 겨우 12척 뿐이었다. 남도 사대부들의 피난 가는 여러 배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수군들의 고립되고 약한 모습을 보고 모두 여러 섬으로 흩어져 각자 삶을 도모할 계책을 하고 있었다. 공은 사람들에게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이 수군의 승패에 달려 있는데 지금 적들의 전함은 바다를 덮었고, 통제사가 거느린 배는 매우 적습니다. 비단 중과부적일 뿐 아니라 적이 반드시 얕잡아 보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피난선에는 각각 식량과 활과 화살이 있으니 일제히 전함의 뒤편에 배열하여 한편으로 소리를 질러 응원하고 한편으로 식량을 대준다면 저들의 승승장구하는 총구를 막고 우리는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견고히 하여 자그마한 강회(江淮)가 거의 지키고 막는 곳이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각자 마음대로 여러 섬에 흩어져 들어간다면 통제사의 형세는 반드시 고립될 것입니다. 통제사가 불리하면 적은 반드시 승승장구하여 진격할 것이니 나랏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랏일이한 번 내버려지면 원근의 여러 섬이 어육(魚肉)의 화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화를 면한다고 해도 홀로 구차히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며 먼저 이해를 따져 설득하고 또 의리로 깨우쳐 주었다. 이어서 곧바로 여러 배에 글을 보내어 두루 알리니, 여러 배안의 사대부들이 모두 같은 도의 사람으로서 평소 공을 공경하고 감복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한 목소리로 서로 응하고 이의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일시에 피난 가던 여러 배들이 전함의 뒤에 포진하고는 소리를 질러 응원하였다대부분 전쟁에 .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것이 많았다. 이때 늦가을을 맞아서 바닷바람이 날로 거세지는데 배 안의 장수와 병졸들은 아직도 여름옷을 입고 있었고 군수품이 모자라 통제사가 몹시 걱정했으나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공은 솔선해서 저고리[동옷]를 벗고 또 쌀가마니를 내고서 여러 배의 사람들에게 글을 보내어 설득시켜 돕자고 하였더니 여러 배에 탄 사람들이 각각 옷과 식량을 내었다. 배 한 척에 가득 싣고서 직접 이끌고 나아가니 주장(主將)이 매우 기뻐하며 한 벌을 골라 입고서 장수와 병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2척의 군졸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니 모두 싸울 것을 즐겨하였다. 양군이 격전을 벌일 때에 총환이 비처럼 쏟아져 막을 방법이 없었는데, 공이 여러 배에서 솜이불 백여 개를 거두어 들여 물에 적셔 걸어두니 총환이 뚫지 못했다. 그전에 공이 왜구를 피해 배에 오를 때 집안의 세간은 버리고 마을 사람들이 버린 동아[東苽]를 많이 가져다가 별도의 배 한 척에 가득 실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수군이 힘을 다해 싸울 때에 노 젓는 병졸들이 갈증이 심해도 먹을 물을 구할 수 없었는데 공이 동아를 실은 배를 가져와 여러 군졸들에게 나누어 먹여 그 갈증을 풀게 하니 사람들이 이에 비로소 공이 지략을 겸비한 것에 탄복하였다.
통제사가 마음으로 믿고 진실로 탄복하여 군중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함께 의논하면서 매번 칭찬하기를 “만약 공을 이룬다면 모두 그대의 힘이오.”라고 하면서 이에 책을 만들어 기록하여 뒷날 공(功)을 양보할 증거로 삼으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통제사가 일찍 죽게 되어 끝내 위에 보고되지 못하였고 공도 또한 스스로 숨겼기 때문에 세상에서 다 알지 못하였다. 도적이 물러간 뒤에 조정에서 공이 성망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제원도(濟原道) 찰방(察訪)에 제수하였다. 당시 명나라 군대가 호남에 머물렀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았다. 횡포가 심해 접대하는 관리가 매나 욕을 면하는 경우가 열에 한 명도 없었다. 전라도 관찰사였던 한효순(韓孝純)이 공을 당군(唐軍)에게 군량을 내주는 담당관으로 삼았는데, 공은 평소 계산을 잘해서 팔짱을 끼고 암산으로 계산해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한 관찰사(韓觀察使)는 항상 감탄하며 칭찬하기를, “번거롭게 산가지를 펼쳐 놓지 않고도 양을 헤아리는 데 어긋나지 않으니 독우(督郵)1) 의 산학(算學)이 어찌 그리 귀신같은가?”라고 하였다. 매번 군량을 줄 때마다 조금도 남거나 모자람이 없으니 명나라 장군 이하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면서 더욱 공경하였다. 그 밖의 일을 처리하는 법이나 군대를 지휘하는 계책을 한결같이 공에게 물어보았는데, 절차를 쫓아서 알맞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한공(韓公)이 더욱 중하게 여겼다. 황폐한 역사(驛舍)에 다시 생기가 돌고 지친 병사들이 힘입어 안정하게 되니 지금까지 제원도(濟源道)에는 공의 유애비(遺愛碑)가 있다.그 뒤에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공조(工曺)와 형조(刑曺)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鳴梁海戰
通訓大夫前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洪重鉉撰.
丁酉倭亂, 李統制使舜臣, 摠舟師禦賊於閑山島, 而時當元均新敗之餘, 戰艦纔十二隻. 南中士夫避亂船, 多至千餘艘, 而見其舟師之孤弱, 皆欲散投於諸島, 以爲各自謀生之計. 公倡于衆曰, 國家存亡, 在此舟師之勝敗, 而今者賊舡蔽海, 統制所領之舟則甚尠. 不但衆寡之不敵, 賊必小覷而有輕我之心, 豈不危哉? 今我避亂諸舡, 各有資粮弓矢, 一齊排列於戰舡之後, 一以爲其聲援, 一以助資粮, 則賊無輕視之患, 我有相依之勢. 今若各自爲心散入於諸島, 則統制之勢, 必孤矣. 統制不利, 則賊必乘勝而進, 其如國事何哉? 事敗之後, 則假令偸活, 反不如死, 又况諸島獨免魚肉之禍哉? 先以利害諭之, 又以義理曉之. 仍卽發文, 通告諸舡, 諸舡中士夫, 皆以同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亂諸舡, 布陳於戰舡之後, 以助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畫,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時當暮秋, 海風日高, 舡中將士, 猶着夏服, 而軍需且乏, 統制深以爲憂, 計無所出. 公先脫襦衣, 且出米斛, 仍通誘諸舡, 使之相助, 則諸舡之人, 各出衣粮. 滿載一舡, 親領而進, 主將大喜, 擇着一領, 分給將士. 十二舡軍卒, 得免飢寒, 皆公之力也. 兩軍鏖戰之際, 鐵丸如雨, 無以遮禦, 公收於諸舡, 得絮衾百餘, 漬水以掛, 丸不得透焉. 始公避寇登舡也, 捨其家莊, 而多取隣人所棄東瓜, 盈載別舡一隻, 而行人皆未曉其意. 及其舟師力戰之時, 櫓卒渴甚無水可救, 公引東瓜舡, 分餽諸卒, 以解其渴, 人於是始服其智慮之兼備也. 統制心信而誠服, 軍中大小事, 悉與之相議, 每稱曰, 若夫成功, 則皆吳上舍之力也. 仍作冊記之, 以爲他日讓功之地, 惜乎, 統制經殞, 終未能上徹, 而公亦自晦, 故世不得盡知之. 寇退之後, 朝廷以公有聲望, 特除濟原道察訪.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명량해전
통훈대부 전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홍중현이 짓다.
정유왜란이 일어났을 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지휘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을 막고 있었는데 이때는 원균(元均)이 패한 뒤여서 전함이 겨우 12척 뿐이었다. 남도 사대부들의 피란선이 천여 척에 달했는데 수군이 약한 것을 보고 모두 여러 섬으로 흩어져 들어가 각자 삶을 도모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은 사람들에게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이 수군의 승패에 달려있는데 지금 적들의 전함은 바다를 덮었고, 통제사가 거느린 배는 몹시 적으니 중과부적일 뿐 아니라 적이 반드시 얕잡아 보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어찌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피난선에는 각각 식량과 활과 화살이 있으니 일제히 전함의 뒤편에 배열하여 한편으로 성원하고 한편으로 식량을 대준다면 적들이 가벼이 볼 근심이 없을 것이고 우리는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각자 마음대로 여러 섬에 흩어져 들어간다면 통제사의 형세는 반드시 고립될 것입니다. 통제사가 불리하면 적은 반드시 승승장구하여 진격할 것이니 국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쟁에 진 뒤에 가령 구차히 살 수 있더라도 도리어 죽는 것만 못할 것인데, 또 하물며 여러 섬들이 유독 어육(魚肉)의 화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먼저 이해를 따져 말하고 또 의리로 깨우쳐 주었다. 이어서 곧바로 여러 배에 글을 보내어 두루 알리니, 여러 배안의 사대부들이 모두 같은 도의 사람으로서 평소 공을 공경하고 감복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한 목소리로 서로 응하고 이의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일시에 피난 가던 여러 배들이 전함의 뒤에 포진하고는 소리를 질러 응원하였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이때 늦가을을 맞아서 바닷바람이 불고 해가 높은데 배 안의 장수와 병졸들이 아직도 여름옷을 입고 있었는데 군수품이 모자라 통제사가 몹시 걱정하면서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공은 솔선해서 저고리[동옷]를 벗고 또 쌀가마니를 내고서 여러 배의 사람들에게 글을 보내어 설득시켜 돕자고 하였더니 여러 배에 탄 사람들이 각각 옷과 식량을 내었다. 배 한 척에 가득 싣고서 직접 이끌고 나아가니 주장이 매우 기뻐하며 한 벌을 골라 입고서 장수와 병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2척의 군졸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힘이었다. 양군이 격전을 벌일 때에 철환이 비처럼 쏟아져 막을 방법이 없었는데, 공이 여러 배에서 솜이불 백여 개를 거두어 들여 물에 적셔 걸어두니 철환이 뚫지 못했다. 그전에 공이 왜구를 피해 배에 오를 때 집안의 세간은 버리고 마을 사람들이 버린 동아[東瓜]를 많이 가져다가 별도의 배 한 척에 가득 실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수군이 힘을 다해 싸울 때에 노 젓는 병졸들이 갈증이 심해도 먹을 물을 구할 수 없었는데 공이 동아를 실은 배를 가져와 여러 군졸들에게 나누어 먹여 그 갈증을 풀게 하니 사람들이 이에 비로소 공이 지략을 겸비한 것에 탄복하였다.
통제사가 마음으로 믿고 진실로 탄복하여 군중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함께 의논하면서 매번 칭찬하기를, “만약 공을 이룬다면 모두 오상사(吳上舍)의 힘이오.”라고 하면서 이에 책을 만들어 기록하여 뒷날 공(功)을 양보할 증거로 삼으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통제사가 일찍 죽게 되어 끝내 위에 보고되지 못하였고 공도 또한 스스로 숨겼기 때문에 세상에서 다 알지 못하였다. 도적이 물러간 뒤에 조정에서 공이 성망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제원도(濟原道) 찰방에 제수하였다.
고증자료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제 52집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은 수군(바다) 전쟁의 천재 (영웅) 였다. 선비 사호 오익창 은 어린시절부터 천재였다. 14세에 대유 의 칭송을받았고,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명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바다 전쟁의 천재(영웅)가 13척의 함선과 부족한물자, 지원세력의 부족으로 300여척의 왜군함대 와 전쟁을 해야하는 필사의 어려움에 처하자. 선비 사호 오익창 이라는 천재가 나타나서 피난선 일천척을모아, 바다에 웅장한 성곽을 만들고, 수천명이 응원하여 병사들의 사기을 진작시키고, 물자을 긴급하게 공급하여 어려웠던 명량해전의 이순신장군을 돕게된다. 명량해전의 기적같은 승리는, 이순신장군 을 돕는 선비 사호오익창의 천재적인 재능에 힘입어서 기적같은승리, 위기을 넘기는, 행운의승리을 하게된것이다. 명량해전에 대한기록이 50여년이 지난후에 조선의 조정에 알려지고 사호집에 유명인들의 많은기록이 남겨지게된다. 1700년대에 이기록 들을 모은 책이 보만제 집, 번암집, 사호집에 남겨지게 되었다.
사호 오익창 선생의 거북선 창제에 대한 기록 ..................................................................................................
사호집 에는 사호 오익창 선생이 거북선을 최초로 창조하였다는 6인의 기록이 있다. 6인의 기록은 다음과같이 기록되어 있다.
1) 創造龜船 거북선을 창조하다 2).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거북선을 창조할때 공의 지휘가 많았다 3).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4). 無用軒后之舊制, 始創龜舡, 給餽多年 거북선 처음 만들다. 5).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통제사가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고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에게 자주 찾아 왔다.
서명응 기록 (1716 숙종42-1787 정조11)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孫左賓客 徐命膺撰
丁酉統制使李舜臣 率舟師 禦倭奴於閑山島 當元均敗衂之餘 收合煨燼戰艦僅十有二 而嶺湖士大夫浮海逃亂者千餘艘 欲散而之諸島 公奮曰賊兵衆 統制之兵寡 其敗可立而待也 統制敗則我之藩籬撤矣 雖欲各保孤島 得乎 毋寧幷力合勢 爲統制聲援 有可以苟全之路 藉令俱死 亦有爲國效忠之名也 衆曰善 遂爲文布告諸舡 於是千艘揚帆 俱列統制舡後 聯成水寨 陣勢甚壯 公乘輕舠 往來統制船 與籌畵軍事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方秋風高 海氣凛凛 徹人肌骨 統制軍皆被褐呼寒 糧且盡 公以忠義激諸船人 各出襦衣米斛 滿載一船 躬卛至統制軍 軍皆感悅
모두가 좋다고 응하였다. 마침내 글을 지어 여러 선박에 포고하자, 이에 천여 척의 배들이 출항하여 모두 통제사의 배 뒤에 늘어서서 물위의 성곽 모양을 연이어 이루니 진영의 형세가 매우 웅장했다. 공이 날렵한 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군사의 일들을 계획하니, 통제사가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고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에게 자주 찾아 왔다.
이화진 기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이화진(李華鎭)이 짓다.
仍卽發文通告諸船, 諸船中士夫, 皆仁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亂諸舡, 布陣於戰艦之後, 以助其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畵,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이어서 곧바로 여러 배에 글을 보내어 두루 알리니, 여러 배안의 사대부들이 모두 같은 도의 사람으로서 평소 공을 공경하고 감복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한 목소리로 서로 응하고 이의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일시에 피난 가던 여러 배들이 전함의 뒤에 포진하고는 소리를 질러 응원하였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것이 많았다.
홍중현 기록 ( 1660-1726) 通訓大夫前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洪重鉉撰.
통훈대부 전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홍중현이 짓다.
仍卽發文, 通告諸舡, 諸舡中士夫, 皆仁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亂諸舡, 布陳於戰舡之後, 以助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畫,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이어서 곧바로 여러 배에 글을 보내어 두루 알리니, 여러 배안의 사대부들이 모두 같은 도의 사람으로서 평소 공을 공경하고 감복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한 목소리로 서로 응하고 이의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일시에 피난 가던 여러 배들이 전함의 뒤에 포진하고는 소리를 질러 응원하였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신선부 기록 ( 1667-1744 ) 不煩子房之前籌, 默運心算, 無用軒后之舊制, 始創龜舡, 給餽多年, 旣致華人之加敬.
장자방(張子房, 유방의 책사 장량)같이 셈대를 앞세우는 번거로움도 없이 머릿속으로 계산하였고, 황제 헌원(黃帝軒轅)의 옛 제도232)도 필요없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여러 해 동안 군량을 배급함이 정확하여 명나라 군이 더욱 공경하였네.
정유주. 주세기 기록 况且丁酉之亂, 一國魚肉, 八路鳥竄, 李統制舜臣, 摠舟師於閑山島, 禦强寇於鏖戰. 而時丁元均僨績之餘, 只有戰艦十餘艘. 兵孤勢弱, 聲援且絶, 公於是乎激勵孤忠, 倡發大義, 通告于避亂諸舡士夫曰, 今日國家之存亡, 在此統制之勝敗. 各使資粮弓矢, 排列於戰舡之後, 以助其舟師之聲勢, 則賊無輕視於統制之兵, 而統制之兵, 亦不孤矣. 假令統制不利, 則諸島避亂, 獨免魚肉乎? 生而苟活, 反不如死
云爾. 則諸船士夫, 一時相應, 避亂舡千餘艘, 果爲聲援. 公時乘片舸 往來統制之營中, 征謨師畫, 日夜講論, 至若龜舡, 創制指揮. 旋蓬而絮衾漬水, 掛舡避丸, 東苽救渴, 櫓卒汔濟. 李統制至誠倚重, 歎服才德, 乃曰, 若夫成功, 則皆是吳上舍之力也. 書庸識哉, 以爲他日讓功之地, 而惜乎, 天不佑我統制徑殞, 事未上徹, 公亦自晦. 만약 통제사의 군대가 불리하다면 여러 섬으로 피난한들 홀로 어육이 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서 구차히 사는 것은 도리어 죽는 것만 못할 뿐입니다.”라고 하니, 여러 선박에 사족들이 일시에 상응하여 피란선 천여 척이 과감히 성원하였습니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군영을 왕래하며 전쟁하고 군대를 부릴 계책을 밤낮으로 논하였고, 거북선에 있어서도 만드는 과정을 지휘하였습니다.
신선부 기록 ( 1667-1744 ) 不煩子房之前籌, 默運心算, 無用軒后之舊制, 始創龜舡, 給餽多年, 旣致華人之加敬.
장자방(張子房, 유방의 책사 장량)같이 셈대를 앞세우는 번거로움도 없이 머릿속으로 계산하였고, 황제 헌원(黃帝軒轅)의 옛 제도232)도 필요없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여러 해 동안 군량을 배급함이 정확하여 명나라 군이 더욱 공경하였네.
신선부(申善溥) 신선부. 인물. 1667년(현종 8)∼1744년(영조 20). 본관은 고령(高靈)천여(天如) 우참찬 신공제(申公濟)의 후손으로, 부친은 행 통례원인의(行通禮院引儀) 신호(申滈)이다. 당시(唐詩)와 진(晉) 나라 시대 필법에 능하고 그림도 신묘하여, 세상에서는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국초 이래 삼백년 동안에 나오기 드문 인재였으나, 20세 이후에는 붓을 잡지 않아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또한 손(孫)‧오(吳)의 책 병법서를 좋아하여 공수영진(攻守營陣)‧기정합산(奇正合散)‧천시음양(天時陰陽)의 법에 대하여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신선부(申善溥) 1667년(현종 8)∼1744년(영조 20). 본관은 고령(高靈)천여(天如) 우참찬 신공제(申公濟)의 후손으로, 부친은 행통례원인의(行通禮院引儀) 신호(申滈)이다. 당시(唐詩)와 진(晉) 나라 시대 필법에 능하고 그림도 신묘하여, 세상에서는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국초 이래 삼백년 동안에 나오기 드문 인재였으나, 20세 이후에는 붓을 잡지 않아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또한 손(孫)‧오(吳)의 책 병법서를 좋아하여 공수영진(攻守營陣)‧기정합산(奇正合散)‧천시음양(天時陰陽)의 법에 대하여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모든 기형의품(璣衡儀品), 보시종(報時鐘), 전진(戰陣) 기계, 배, 수레 등과 그 외에 이용하는 도구를 모두 옛 법제를 이해하였고 때로는 새로운 뜻을 찾아내어 완성한 것이 많았다. 그것들을 모두 시험해 보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서른 살이던 1696년(숙종 22)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49위로 합격하였으나 마흔이 되면서는 과거시험 보는 것을 그만두고 순창(淳昌)으로 낙향하여 귀래정(歸來亭) 남쪽에 띠풀로 집을 짓고, 소요하다가 향년 78세로 일생을 마쳤다. 아들로는 신뢰(申洡), 신만(申澫),신현(申灦)을 두었는데, 맏아들 신뢰는 종가(宗家)의 신선영(申善泳)에게 양자로 가서 신경준(申景濬)신경준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여암유고(旅菴遺稿)』에 실려 있다.
천여.신선부 거북선 창제 기록. 신선부는 사호 오익창 사후, 30여년후에 태어난 사람으로 천재적인 기술자로써 많은기계 와 배 들을 창안하고 만든사람으로 사호오익창 의 인물과 공적을 상세히 알고있던분으로 사호 오익창 사당의 상량문을 쓰면서 사호 오익창이 거북선을 설계하고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분명하게 기록한 사람이다. 중요한 점은 신선부는 많은기계와 배을 창작한 사람으로 거북선 창작의 기술부분 설계부분을 이해하고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창제의 가치을 기술적으로 이해하고 공적을 인정할수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춘분으로 볼수있다. 더욱이 천여,신선부 는 기계을 창작하는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고 계산과 설계에 천재적소질이 있는점 천재성 성격 소질이 사호 오익창과 비슷한점이 있었기에 사호 오익창의 거북선창조의 공적의 가치을 누구보다도 잘이해하고 진실되게 이해할수있는 사람으로 거북선 창제의 역사을 기록하여 역사에 남겨지기을 바랬던것으로 보여진다. 더하여, 손자병법 오자서병법 등에 능통하였다고 하니 80여년전에 있었던 국난 수난의 임진왜란을 잘알았고 신선부는 임진왜란 전쟁의 상세한상황 이순신장군 바다의전쟁에 대하여서도 상세하게 연구하고 자료도모았을것이다. 여기에 이순신장군의 거북선의 역활도 해전의병법으로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이해하였을것이다. 명량해전에 대하여서도 상세히 알고 사호 오익창의 역활과 공적과 공과을 이해하고 잘알았을것이다. 병법에 능통한 천여,신선부의 사호 오익창의 거북선창작설 기록은 1680년대에 임진왜란 이후 80여년정도 지난후 여서 상당히 많은 정보와 기록이 있었기에 이기록들을 종합하여 사호 오익창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창제하였다 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사호 오익창 사당 상량문에 기록을 남긴것으로 보인다.
사호 오익창 선생의 거북선 창작 기록을 남긴 6분들의 사회적 신분들이 다채로운것을 보면 위로는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재상. 좌승지. 홍문관교리. 기술자. 사림의 유생들. 까지 임진왜란 100년후에 1700년대에 많은 분들이 거북선 창작을 기록으로 남긴것을 종합해볼때에 조선왕조시대 에는 사대부 유림. 유생들이 향교에서 공부하며 지식과 정보을 널리 공유하였던 시대 였기에 1600년중반에서 1700년 후반까지는 정보면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창작은 많은사람들이 참여하였으나 사호 오익창이 거북선을 최초로 설계하고 창조하고 만드는데 제일의 공로자 라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 창제의 역사 기록 . 거북선 창제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 .................................................................................................................
2003년 7월 10일부터 전남매일에서 거북선이 대굴포에서 제작되었다는 기획특집에서는, 거북선은 고려말부터 남해안과 영산강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의 기습공격에 대비한 공수 전용 전함으로 대굴포에서 처음 제작되었으며, 태종 15년 병조의 좌대언으로 있던 나주 출신 탁신의 상소에 의해 성능이 강화되고 외형이 개조되었고, 나주 노안 출신 신숙주에 의해 중국, 일본, 유구국 선박의 장점을 살려 거북선을 재개량했으나 왜구의 소멸로 인해 그 효용이 떨어져 200여년 세월이 흐르다가 왜적의 침입을 예견한 곤재 정개청(주 : 1588년 곤재의 도이장욕설-島夷將慾說- 상소문을 말한 것 같음)과 그의 문도인 송제민, 오익창 (吳益昌), 나덕신(羅德愼), 나덕명(羅德明) 등 양명학자와 나대용(羅大用), 박만천(朴萬天), 나치용(羅致用), 이설(李渫) 등 영산강 인근 출신 무관들에 의해 영산강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에서 다시 건조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 송제민의 해광집,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과 번앙집,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 임환의 습정유고(習靜遺稿), 임전(任錪)의 명고집(鳴皐集), 나대용, 박만천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고 하였고, 대굴포는 고려말 나주시 문평 출신 정지(鄭地)와 전북 부안 위도 출신 이희가 왜구 방어책 10조를 통해 전함 제작의 최적지로 지목하였으며, 바다에 인접한 선소보다 내륙에 있는 대굴포의 선소가 왜적의 급습을 방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고, 고려말에 제작된 구선(龜船. 거북선)이 200년이 지난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오익창,나대용, 송제민 등에 의해 재 건조될 수 있었던 것은 전함 제작과 해전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정지의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던 광산탁씨, 홍주송씨, 예안이씨, 광산김씨, 나주나씨, 금성나씨, 담양김씨, 무안박씨, 함평이씨, 함양오씨, 양성이씨, 고령신씨 등을 통해 거북선 설계도 또는 제작 기술이 전승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한다고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1591년 2월 13일에 전라좌도수군절제사(정 3품)에 임명되었고, 난중일기에 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사용할 돛베 29필을 조달 받았다고 했으며, 동년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실험을 했다고 하였다. 부임 1년만의 단 시일에 거북선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믿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1591년 이전에 연구 또는 제작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함평문화원장 이현석. 전남매일사회부장 정철. 한국족보학연구소소장 양권승박사. 기고문에서)
명량해전 기념공원에 무명의 피난민 수천명의 공적기념비 ............................................................................................................................
명량대첩기념공원 우수영관광지에는 전시관 조각상 기념비가 있읍니다. 명량해전의 기적의승리에 크게 기여한 일천척의 피난선. 죽기을각오한 수천명의응원. 식량 옷 식수등 물자지원.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242호로 지정된 사호집. 오선생 참전자료들 정조시대 재상 체재공 기록.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서명응기록. 홍문관교리 홍중현 기록. 승정원 좌승지 이화진기록 등. 역사적으로 검증되어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제 제242호로 지정되었는데 전라남도의 해남군 우수영 관광지 명량해전 기념공원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242호의 명량대첩 기록이 전혀없고 기념비도 없고 명량해전기념전시관에도 기록물도 없고 흔적도 없읍니다.
해남명량해전장에 조선의 운명을 지킨 이순신장군의 필사의 기적의승리. 역사의 현장을 찾아오는 학생들. 명량대첩 축제장의 200만명 관광객 들에게 명량해전에 참전한 피난선 일천척지원의 상세한기록을 알려서 명량해전의 진실한 역사. 기적의역사. 행운의 역사. 한민족 단결의역사 을 생동감있게 알려서 관광객들에게 감동을주는것이 옳은길이라 봅니다. 우수영관광지 명량대첩기념공원에는 명량해전의 어떤 기념물이 있는가? 박물관 전시실에 많은기록물이 있고 야외에는 기념탑과 조각상이 있읍니다. 다음과같은 기념조각상이 있읍니다.
1). *폐선수리상 칠천량 패전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선은 부서진 판옥선 12척 뿐이었다. 이 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명량해전을 가능케 해준 정충량,김세호 등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의 공을 기린 상입니다. 그래서 우수영에 페선1척이 수리해 보태어져13척이 됐다고 한다. 2). *마씨오부자상 부친 마하수(馬河秀)부친이 적선에 포위된 통제사를 구원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복수를 맹세하고 적이 패퇴할 대까지 결사의 항쟁을 한 부자의 공을 기린 상이다. 3). *울돌목 쇠사슬 울돌목 해안 양쪽에 쇠사슬을 매어놓고 일본전선을 유인하여 쇠사슬을 잡아당기면 일본전선이 쇠사슬에 걸려 뒤집히게 했다는 설화에 따라 복원하여 만든 것이다. 4). *오극신 부자 참전상 해남출신 오극신 계적 부자가 의병으로 참전하여 싸우다가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한 상이다. 5). *양씨숙질 조씨부자 참전상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 숙질이 의병으로 참전하여 명량해전에서 적을 무찌르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 전사하여 공을 기린 상이다.
우수영 명량해전 승리의 기념탑 으로 명량해전의 진실한 역사 일천척의 피난선 (수천명)이 필사결전의 13척의 이순신장군 전함과 함께 죽기을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응원하고 지원하는 장면을 기념탑으로 만들어 주세요. 이 기념탑은 명량해전의 진실한 역사가 세계 해전의 역사에 전례가 없는 13척의 해군전함과 피난선 일천척 피난민 수천명이 필사의 단결된 한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응원하고 싸워서 전쟁을 승리하게 만든 기적의 승전기념탑이 될것입니다.
한민족의 피난선 일천척(수천명)이 필사결전의 병사들과 함께 죽기을 각오하고 바다에 배로 성곽을 만들고. 배수진을치고 북을치며 왜군전함수에 놀란 병사들의 사기을돗우며 전쟁을 응원하는장면. 선비 사호오익창 선생의 활약상을 기념비 기념탑으로 만들어주세요. 명량해전 의 역사가 세계 해전의 역사에 길이 남을 피난선의 피난민 수천명이 죽음을각오하고 필사의 이순신 전함을 응원하는 전쟁. 기적적으로 승리하여 명량해전장의 해군과 참전한 수천명의 피난선 피난민들이 승전의 기쁨에 서로 얼싸안고 얼마나 울었겠는가? 죽음을 각오한 전쟁. 승전의 기쁨은 어떻 했겠는가? 감동의 기쁨의 눈물 바다을 만들었을 명량해전승리. 기적의 기념비을 만들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