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이승만의 민주국가 건국과 한미동맹은 신의 한 수였다.
일제 강점기 평균 수명 33세인 – 유아 사망률이 높아 - 조선에서 일제 35년은 희망을 잃고 무력감에 빠지는 긴 기간이다. 소규모 가내공업을 제외하곤 변변한 민족 기업도 없는 농업국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조선에서 끼니를 잇기 위해 중졸 이상 졸업자 26,000여 명의 지식인 대부분은 총독부 관리나 일본인 기업체 등에 취업해야 했다.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한 이들을 악질적인 친일 부역자와 동등하게 친일파 굴레를 씌우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조선은 왕조시대 가렴주구와 궁핍한 소작농으로 민주주의 경험을 못 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문맹률이 78%에 달하고 농업 인구는 전 인구의 70%, 그중 소작농이 86%에 달했다. 지주 토지를 나눠주고 온 국민이 평등한 세상이 된다는 사회(공산)주의 거짓 선동에 혹해, 해방 후 1946년 미 군정의 정치체제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 71%,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로 사회주의가 대세였다. 사회주의를 경험하지도, 어떤 것인지도 몰랐기에 사회주의를 선호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동구권은 사회주의 열풍으로 대거 공산화되었다. 좌파는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한 후에 테러, 암살 등으로 우파를 제거하여 사회주의를 완성한다. 초등교육 이수자도 드문 일제 치하에서 이승만(모든 존칭 생략)은 조지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를 수학,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국제정세에 해박했다. 진주만 습격을 예언한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미국에서 출간하여 베스트 셀러에 올랐다.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인식하고 미국을 이용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에 힘썼다.
김구는 남파 거물 간첩 성시백(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 배후)에게 포섭되고, 자신을 대통령으로 모신다는 김일성의 전언을 서영해(상해 임시정부 주 프랑스 외교위원)에게서 듣고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김일성과 남북통일 정부 수립에 매진했다. (김구 추종자 조경한, 1997.5.26.자 북한 노동신문 보도). 김구는 윤봉길 의거 등을 기획하며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남북통일에 집착하여 건국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북한과 좌우합작은 공산화로 가는 지름길로 판단한 이승만은, 김구 등의 좌우합작을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건국했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의 비협조로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친일청산에 실패했다. 국가 경영을 위해서는 친일파와 공산 세력 중 한쪽과 협력해야 하는 이승만은, 현존 위험 세력인 공산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과거 위험 세력인 친일파의 협조가 필요했다. 내각에는 친일파를 기용하지 않았으나, 하위직엔 국가 경영 경험이 있는 친일파를 채용하였다. 기업체 설립 때 신규 직원만으로는 기업 경영이 어려워 경력직원을 채용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북한은 김영주, 김달삼, 홍명희 등 친일파 20여 명을 요직에 등용하고, 지주 등은 친일파 굴레를 씌워 처형했다.
6·25 때 북한 야크기가 서울에 출격하고 6.26 저녁에는 창동, 미아리 방면에 북한군이 진입하자 이승만은 다음날 피난을 떠났다. 전쟁 지휘부가 적에게 사살, 납치당하면 전쟁 수행에 치명적이라 지휘부는 후방에서 지휘한다. 10.17 국군이 평양 입성 때 김일성은 5일 전에 피신하였다. 북한군이 서울 진입 2시간 이내 한강교를 폭파하여 한강 도하를 저지하는 작전계획에 따라, 6.28 육참총장이 공병감에게 명령하여 한강교를 폭파했고, KBS에서 급히 피난하면서 자동송출 장치를 끄지 않아 피난 후에도 서울 수호 방송이 송출되었다. 북한이 서울 점령 후 좌익 폭동을 3일이나 기다렸으나, 이승만의 농지분배로 내 땅을 지키기 위한 농민들의 호응이 없어 실패했다.
1953년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미국은 휴전을 서둘렀다. 휴전은 미군 철수로 이어져 한국의 안보가 위협을 받을 수 있어, 휴전을 반대한 이승만은 미국 압박을 위해 미군이 관리 중인 반공포로를 몰래 석방하였다. 휴전에 목매는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고 휴전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한미 상호방위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한국은 70년간 전쟁 위협을 벗고 경제에 전념하여 경제부흥을 이루었다.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 당선은 확정되었으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은 85세 이승만 이후를 노려 자유당과 부정선거를 실행하여 이승만은 하야했다.
민주주의는 사치재로 국민 소득이 1만 달러(한국 1994년) 이상 되어야 민주주의가 정착하는데, 경제 발전이 받쳐주지 않는 저개발국은 권위주의로 흐르기 쉽다. 미국 링컨은 반대자 3,500여 명을 재판 없이 투옥하고 신문사 300여 개를 폐쇄하였고, 싱가포르 리콴유는 일제 치하 일본 정보부대에 자진 입대하는 등 친일행동과 31년 독재를 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7,000만 명, 대만의 장개석은 1,000만 명을 학살하였지만, 그 나라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데 이승만은 비난을 받는다.
해방 당시 국민 소득 45달러로 세계 120개국 중 119위 국가에서 현재 237개국 중 11위 경제 대국을 이룬 것은 이승만의 민주국가 건국과 한미동맹, 박정희의 경제 개발에 선조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더해진 결과이다. 노를 열심히 저어도 조타수가 잘못하면 배가 옆이나 뒤로 갈 수 있듯이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승만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독도 누락)만 한국에 반환한다는 미일 샌프란시스코 종전 협정(일본 항복)에 대응하여, 6·25 때 독도를 점령하고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의 실효 지배를 실현했다. 실수로 누락된 협정을 근거로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한 143개국 중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해방 후 1인당 국민 소득 45달러이던 한국이 30~50클럽(소득 3만 달러, 인구 5천만 명 이상 국가)에 가입하였다. 이 중 6개국(미, 독, 영, 일, 프, 이)은 식민지를 경영한 국가지만 한국만 유일하게 식민지를 당한 나라이다. 이승만은 민주국가를 건국하고 한미동맹으로 전쟁을 방지하여 경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미국은 신생 한국을 원조하고 6.25 전쟁에 참전하여 공산화를 저지했다.
우리가 누리는 이 풍요는 -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간 죽어가며 꿈꾸고 갈망하던 그것을 우리는 향유하고 있다. 조공을 바치고 임금 등극도 중국 승인을 받던 우리가 중국보다 잘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도 외국의 건국 지도자들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데,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도와준 미국을 고마워하기는커녕 비난을 하고 있다. 정의가 무너지고 불의가 득세한, 한국은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라고 하고 있다. 조국에 고마워한 적이 있는가, 조국을 위해 울어본 적이 있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