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소 모형
신원경
스위치를 눌러
당신이 살던 지형에 불을 붙인다
모형은 마을의 연대기를 끌어안고 있다 첫 번째 버튼을 누르면 기원전의 세계가 켜진다 마지막 버튼을 누르면 우리가 오랫동안 사랑한 얼굴들이 잠든 땅이 밝아지고
모형 해는 전구가 나가버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인간의 세포를 떼어 증식해둔 모형들이 움직여
같은 지점에서 누군가는 귀가 중 칼에 찔려 죽고 누군가는 전쟁을 겪고 누군가는 시위를 일으켰다는 게 악법을 만들고 악법을 파기하고 오래 생각했지만 여기서 헤어지는 게 맞아 그렇다고 너와 보냈던 시간과 사랑이 사라지는 건 아닐 거야 많이 배우고 웃었어 믿는다는 게
폭설이 오래도록 내려 기록적인 땅이 되었다가
그 기록을 부수는 비가 쏟아지고 잠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미친 여자와
나체로 생활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버튼을 눌러 확인해봐
네가 살아갔던 마을의 지형도를
나의 마을은 어느 날에는 식민지였으며
어느 날에는 잘 다듬어진 공원이 된다
당신은 박물관에서
모형과 연결된 스위치 여러 개를 한꺼번에 누른다
지나가는 두 연구원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물건을 복원 중이다 아직 용도를 몰라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는 그건
문을 열게 하는 손잡이 같다가도
날카로운 나이프 같아서
스스로를 찌를 수 있게 하지
자신의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락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도구를 어떻게든 이해하겠지
빛이 들어오지 않는 모형의 중간에는
비석 하나가 놓여 있다 해가 뜨지 않던 시절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과 개들의 이름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다
내핵 속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얼굴 하나 둘 셋……
홀로그램 모형 안
떠도는 영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