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9/13)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349년 무렵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현재 튀르키예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수덕 생활을 하던 그는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을 하며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386년
사제품을 받고, 주로 안티오키아에서 사목하며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선임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의
생활을 올바르게 개혁하는 데 힘써 좋은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황궁에서 증오를 품고 시기하는 자들에게 밀려나 한두 차례
유배 생활을 하다가 고통에 짓눌린 채, 407년 9월 14일 (튀르키예)
폰투스의 코마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 교리를 해설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을 독려하는 많은 설교와
저술들 때문에, ‘크리소스토모’(금구, 金口: 황금의 입)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제1독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여러분 안에 있는 것들을 죽이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11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6 이것들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
7 여러분도 전에 이러한 것들에 빠져 지낼 때에는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8 그러나 이제는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아홉 가지 행복 선언을 전하는데(5,3-12 참조),
루카 복음서는 네 가지 행복 선언에 이어서
네 가지 불행 선언을 함께 나열합니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 선언들 각각은 서로 대칭을 이룹니다.
곧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첫째 선언),
지금 굶주리는 이들과 지금 배부른 이들(둘째 선언),
지금 우는 이들과 지금 웃는 이들(셋째 선언),
그리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들과 환대를 받는
이들(넷째 선언)이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자의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겪고 있는 암울한 상황과는 정반대로
밝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지만
하느님 나라가 올 때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고
배부르게 되며 웃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자의 사람들을 두고는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재 누리는 것과 정반대의 암울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는 사람들은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은 것이며, 하느님 나라가 오면 오히려 굶주리고
슬퍼하며 울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여 모은 재산으로 여유롭게 사는 것,
먹고 싶은 것을 사 먹고 좋아하는 취미나 여가 활동을
즐기면서 그 나름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소소한 행복도 느끼면서 살아야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달콤함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
곧 지금의 삶에 만족하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이 말씀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에게 경고합니다.
이와 비슷한 경고의 말씀도 귀담아들읍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5.16).
현실이 주는 위로가 크면 클수록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위로가 설 자리는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추구하여야 할 참행복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것을 차지하려면 현세에서 누리는 달콤함과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출처 매일 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