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hler / Symphony No.5 - Abbado - Lucerne Festival Orchestra
오늘 듣는 교향곡 5번에서 나타나는 악장들 사이의 급격한 변화들은
말러가 지녔던 짙은 고뇌를 보여줍니다.
물론 그 분열의 양상을 오로지 말러 개인의 내면으로만 읽어낼 수는 없겠지요.
당대적 현실 속에서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교향곡 5번이 보여주는 분열의 양상은
‘세기말’이라는 외적 요인의 개입 없이는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미 검증됐다시피 세기말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맞이한
첫 번째 좌절 혹은 위기였으며 머잖아 다가올 공황의 전조(前兆)였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의 ‘거인’으로 다가와 있는 말러가
오스트리아 빈에 있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자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 곡을 쓰던 20세기 초반, 정확히 말해 작곡에 착수했던 1901년에
말러는 이미 ‘40대’라는 나이에 들어서 있었으며,
그는 세기말의 모든 양상이 집약된 도시 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1898년 빈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취임한 말러는 1907년 빈 궁정오페라극장을 떠나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지휘자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약 10년간 빈에 머물렀습니다.
당시의 빈은 베네치아와 더불어 세기말을 대표했던 도시였지요.
제국주의가 꿈꿨던 이상향은 적어도 겉으로는 실현된 것처럼 보였지만,
도시와 사람들의 외양을 수놓은 화려한 탐미주의는 황폐한 속살을 간신히 감춘 외피였습니다.
당시의 40대가 오늘의 동년배에 비해 얼마나 더 성숙했는가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말러는 유년기의 불안의식에 더해진 시대의 균열을 이미 특유의 촉수로 감지한 상태였습니다.
스스로 ‘4부작’이라고 칭했던 앞의 교향곡들(1번부터 4번까지)과 확연히 다른
다섯 번째 교향곡은 바로 그 시점에서 탄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가
<나머지는 소음이다>라는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급은 적확합니다.
그는 교향곡 5번을 작곡하던 무렵에 말러가 처해 있던 심적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이 도시의 표면 뒤에 숨어 있는 균열이 곧 터져버릴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말러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예민했으나 양심적인 음악가였던 그는
청년 시절에 자신이 동경했던, 적어도 세계의 일부라고 믿었던
이상주의적 서정과 평화로운 목가 풍을 마침내 손에서 내려놓습니다.
그리하여 5번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 막을 올립니다.[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