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0일 연중 1주간 월요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회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잘못한 것을 바로 잡기도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에 대해서 어렵다고 말하고, 또 실제적으로 너무 어렵기 때문에 회개한다는 것에 대해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곧은 낚시로 유명한 태공망(太公望)이 독서만 하고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아서 아내가 이혼장을 써 던져놓고 친정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태공망은 계속해서 학문에 정진하여 나중에 제후가 되었습니다. 그의 벼슬이 높아지자 그를 떠났던 아내가 찾아와 다시 예전의 사이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물 한 그릇을 떠서 흙에 붓고 다시 주워 담으라고 했다고 하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흙에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주워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큰 그릇을 받쳐두고 다시 잘 담을 수 있도록 준비 되어 있는 때에는 약간의 손상은 있으나 대부분 다시 담을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실수나 실패를 만회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한 번 잘못하면 용서나 정상으로 돌아오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 있으면 회개가 가능한 일입니다. 회개를 받아들이는 분이 있으면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진실이 됩니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 아니라 ‘복수반분’(覆水返盆)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 한다는 것은 엎질러진 물이라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주워 담을 때는 복음으로 인한 행복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선물 받는 은총의 과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생업(生業)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릅니다. 회개는 이처럼 하나를 포기하고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입니다. 아주 큰 것을 포기하고 잃었지만 그보다 더 크고 훨씬 좋은 것을 얻는 은총의 아름다운 과정입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습니다.
잃었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습니다.
얻었다고 너무 날뛰지 마세요.
이생을 잃으면 내생을 얻는 것이고, 병을 얻어 건강한 육신을 잃으면
그 동안 경시했던 내 몸을 더욱 중시하는 마음이 생기지요.
오른 손을 잃으면 왼 손이 그 일을 대신하고 聽力을 잃으면 視力이 강해지지요.
죄 될 일을 놓으면 복을 얻고, 복될 일을 잃으면 죄가 얻어지는 거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와요.
잡념을 놓으면 일심이 생기고, 일심을 잃으면 망념이 가득해져요.
너무 먹으면 몸이 무거워지고, 적게 먹으면 몸이 가벼워져요.
잃은 하나와 얻은 하나의 차이는 어떨까요?
잃은 것이 내게 득이 되는 것이라면 크면 클수록 좋을 것이고,
얻는 것이 내게 해로운 것이면 작으면 작을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얄팍한 계산속입니다.
그런데 잃은 것이 크든 작든, 얻는 것이 크든 작든
그 기준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요?
따지고 보면 그것은 수십 년 살아오면서 습득된 내 욕심의 기준일 것입니다.
亡者가 입는 수의에 호주머니가 없듯 태어나면서 갖고 온 내 손도 빈손이었고요,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갖고 갈 손도 빈손입니다.
빈손에 잡히는 정도라야 제 손 크기 밖에 더 되겠습니까?
나상호 "자전거 타고 가며 보는 세상" 중에서
<프닌나는 주님께서 태를 닫아 놓으신 한나를 괴롭혔다.>
▥ 사무엘기 상권의 시작입니다.1,1-8
1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춥족의 라마타임 사람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였는데, 에프라임족 여로함의 아들이고 엘리후의 손자이며, 토후의 증손이고 춥의 현손이었다.
2 그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프닌나였다.
프닌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3 엘카나는 해마다 자기 성읍을 떠나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
그곳에는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가 주님의 사제로 있었다.
4 제사를 드리는 날, 엘카나는 아내 프닌나와 그의 아들딸들에게 제물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
5 그러나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6 더구나 적수 프닌나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
7 이런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프닌나가 이렇게 한나의 화를 돋우면,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8 남편 엘카나가 한나에게 말하였다. “한나,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만 하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축일1월 10일 성녀 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 (Leonie Francoise De Sales Aviat)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 연도 : 1844-1914년
같은 이름 : 방지가, 살레시아, 프란체스까, 프란체스카, 프란치스까, 프란치스카, 프랜시스
성녀 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는 1844년 9월 16일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Champagne) 지방의 세잔(Sezanne)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트루아(Troyes)에 있는 성모 방문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그녀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준 마리 드 살 샤퓌(Marie de Sales Chappuis) 원장수녀와 루이 브리송(Louis Brisson) 교목신부를 만났다. 이 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녀가 앞으로 살레시오회의 영성을 기반으로 젊은이들의 복음화에 헌신하는 수도회를 설립하는 기틀이 되었다.
1866년 산업혁명에 따른 산업화로 인해 저임금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는데 트루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수많은 어린 소녀들이 방직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열정적인 사목자인 브리송 신부는 19세기 말에 본격화된 사회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858년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들에게 완벽한 인성 교육과 그리스도교 교육을 위한 센터를 열었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사업’으로 알려진 이 센터에 적합한 책임자와 안정적인 관리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영감 안에서 수도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그는 더 없는 조력자이자 수도생활을 향한 성소를 간직한 레오니 아비아를 발견했다. 사실 레오니 아비아는 공부를 마친 후 성모 방문 수도회를 떠났다가 수도자가 되려는 굳은 의지를 갖고 돌아왔다. 하지만 브리송 신부와 샤퓌 수녀는 그녀에게 기다리도록 권고했고 그녀는 이에 순명했다. 얼마 후 그녀는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영감을 받았는데, 이는 그녀를 자신의 고향인 세잔에서 유리제품을 만들고 수리하는 공장에 들어가도록 이끌었다. 작업장 안에는 젊은 공장 노동자들이 쉼 없이 일하고 있었고, 그녀의 마음 안에서는 그들 가운데서 함께 하며 그들을 상담하고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솟아올랐다. 이러한 열정은 브리송 신부가 자신이 트루아에 노동자들을 위해 설립한 센터에 그녀를 초대했을 때 더욱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1866년 4월 18일 그녀는 성모 방문 수녀회의 학교 동창생 중 하나인 루시에 카뉘에(Lucie Canuet)와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며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사업’에 동참했다. 1868년 10월 30일 젊은 설립자인 그녀는 수도복을 입으면서 프랑수아즈 드 살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이 이름은 그녀의 일생의 사업이 무엇일지를 가리키는 상징이었다. 그녀는 이 작은 그룹을 주네브(Geneva) 교구 주교의 보호 아래 두고 이끌었으며, 그의 영성과 교수법의 방법을 완벽하게 적용하였다. 그 후 그녀의 공동체는 자신들의 전 생애를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헌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오블라티 수녀회(Oblate Sisters of St. Francis de Sales)로 그 명칭을 정하였다.
1871년 10월 11일 프랑수아즈 드 살 수녀는 서원을 발하고 새로운 수녀회의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에 교회법적 인준을 받은 수녀회는 설립자의 지도 아래 급속히 발전하며 사회 사도직을 확장해 갔다. 동시에 본당들에 학급을 열고, 파리(Paris)에 젊은 여성들을 위한 첫 번째 기숙학교를 열어 8년 동안 프랑수아즈 드 살 수녀가 교장을 맡았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오블라티 수녀회의 사도직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교육 형태로 확장되었다.
1893년 그녀는 다시 총원장 수녀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그 책임을 맡았다. 그 동안 그녀는 수녀회를 유럽과 남아프리카와 에콰도르에 진출시켜 교육 사도직을 전파하는데 힘썼고, 1903년에는 프랑스 내에서 수도회에 반대하는 반종교적인 박해의 시류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수녀회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그녀는 이탈리아의 페루자(Perugia)로 본원을 옮겼다. 1911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로부터 수녀회에 대한 최종 승인을 받았다. 연로한 프랑수아즈 드 살 수녀는 1914년 1월 10일 페루자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고요함 중에 선종하였다. 그녀는 1992년 9월 2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11월 25일 같은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오늘 축일을 맞은 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 (Leonie Francoise De Sales Aviat)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