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습니까?
우리가 삶을 살면서 죄를 짓지 않거나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묵상을 하는 중에도 나는 많은 죄로 얼룩진 내 인생을 후회하고 아파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셀 수 없는 잘못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면서도 그 잘못을 느끼지도 못하였습니다. 또한 기족에게도 많은 잘못을 하였지만 아주 잘 살고 있는 것처럼 편안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 자신을 정화하고 새로운 각오로 마음을 다잡고자 피정에 참석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분들의 강의를 듣고, 주님 앞에서 무릎 꿇고 엎어져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자성(自省)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침묵과 고요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삶을 되돌아보면 나의 인생의 삼분의 이는 엉터리로 살았다는 깨달음에 이르고 도대체 잘한 것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내 탓으로만 느껴져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마음이 아파오면서 회심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1. 회심(悔心)은 지은 죄를 뉘우치고 새롭게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못한 것을 진심으로 통회(痛悔)하고 이제는 새로운 마음과 행동으로 살겠다고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을 증인으로 삼아서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결심을 깨지 않게 해달라고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고, 그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회심한 대로 살고자 더욱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때 진정으로 회심한 대로 살지 않으면 진정한 회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결심으로 끝나 버리는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회심한 대로 그렇게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2. 회개(悔改)는 지은 죄를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이 곧 '회'(悔)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것을 '통회'(痛悔)라고 하는데 자신이 지은 죄로 자비와 용서의 지존(至尊)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아파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한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청하고 이제부터 잘하겠다고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개'(改)는 자신의 탓으로 생긴 것을 자신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고쳐서 좋은 것으로 만들고, 좋은 것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천이 없는 것은 회개가 아니고 즉시 행동에 옮길 때만이 비로소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행동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이 그 사람의 용서를 받아줄 수 있을 때 회개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3. 회개(回改)라고 표현할 수 있는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에 만들어 주신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초심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때에도 '초심'(草心)과 '초심'(初心)이 있는데 이는 풀과 같이 순수하고 꾸미지 않은 마음을 말하며, 우리도 세례 받을 당시나 어렸을 때와 같이 아주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입니다. 즉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와 같이 그 깨끗한 은총 안에 머물게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 모습은 하느님께서 간절히 원하고 바라시는 모습이며,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회개하는 모습을 강조하여 표현하십니다.
첫째, ‘자루 옷을 입고’
둘째,‘재를 뒤집어쓰고’입니다.
자루 옷을 입는다는 것은 부끄러워 모든 것을 감추는 것이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며, 죄가 많아서 감히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입이 있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가슴에 아픔과 슬픔을 자루 옷으로 끌어안고 있는 형국입니다.
재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정화의 뜻으로 모든 것을 태운다는 뜻입니다. 더럽고 오욕에 가득 찬 내 마음을 모두 태워서 재와 같이 만든다는 뜻입니다. 재는 참으로 덧없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이 재를 바르며, ‘사람아 너는 흙에서 낳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3,19)는 말씀과 같이 모든 잘못이 내 탓임을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 잘하고 살았으며 무엇이 그렇게 떳떳한 삶인가요? 그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으면서도 자루 옷을 입거나 재를 바르려고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돌아보면 나는 회개하지 않고 살았고, 새롭게 생활을 바꾸지도 않았으며 실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렇게 파멸될 것을 생각하면 무섭고 소름끼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속에서 여유만만한 사람으로 나를 벌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자만하고 때로는 교만에 가득차서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듯이 큰소리를 치고 회개나 회심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7,1-9
1 우찌야의 손자이며 요탐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아람 임금 르친과 르말야의 아들인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2 아람이 에프라임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
3 그러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마전장이 밭’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나가서 아하즈를 만나,
4 그에게 말하여라.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5 아람이 에프라임과 르말야의 아들과 함께 너를 해칠 계획을 꾸미고 말하였다.
6 ′우리가 유다로 쳐 올라가 유다를 질겁하게 하고 우리 것으로 빼앗아 그곳에다 타브알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자.′
7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8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9 에프라임의 우두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우두머리는 르말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축일 7월 12일 성녀 베로니카 (Veronica)
신분 : 신약인물, 부인
활동 지역 : 예루살렘(Jerusalem)
활동 연도 : +1세기경
같은 이름 : 베로니까
전승에 따르면 성녀 베로니카는 예수님께서 골고타(해골산)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땀을 닦아 준 예루살렘의 어느 부인이다. 그녀는 머리에 두르는 천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에서 피땀을 닦아드렸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그 천에 주님의 얼굴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 여인은 ‘베로니카’로 알려졌는데, 라틴어의 ‘베로니카’는 ‘베라’(vera : 참, 진실한)와 ‘이콘’(icon : 형상, 성화상)의 합성어로 그 이름 자체로 그리스도의 ‘진실한 형상’, ‘진실한 성화상’, ‘참된 모습’이란 뜻이 된다. 그래서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중세 때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천을 전해 준 사람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참모습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후대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빌라도의 술책”(Mors Pilati)이나 “황금 전설”(Legenda aurea) 등에서는 성녀 베로니카의 신원에 대해 여러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오르시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루카 23,27) 중 한 사람으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다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여자(마태 9,20-22)로, 베타니아의 성녀 마르타(Martha)로, 주로 프랑스에서는 예리코의 세관장으로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던 자캐오(루카 19,1-10)의 부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그녀는 남편 자캐오와 함께 프랑스 남부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 사람들의 개종을 위해 헌신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성녀 베로니카가 나중에 로마로 가서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천으로 티베리우스 황제를 치유했고, 임종하면서 그 천을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s I)에게 드리라고 유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천은 944년까지 에데사(Edessa)에 보관되었음이 확인되었다가 동로마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1세(920-944년 재위)가 전리품으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져갔다고 한다. 10세기 말 또는 11세기 초부터 로마에서 공경을 받았고, 중세 때에 대단한 신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3세기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로마로 옮겨와 현재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녀 베로니카 경당에 보관되어 있으나 식별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성녀 베로니카는 여러 지역과 일부 전례 안에서 기념되기도 했으나 초기 순교록이나 “로마 순교록”에도 그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은 대체로 대중적인 신심 안에서 생겨난 현상으로 보고 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수건으로 대표되는 성녀 베로니카는 특별히 십자가의 길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합시다.”를 통해 주님의 수난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 고통에 동참하며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도록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베로니카 자매님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