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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
아이들은 아버지가 무관심하고,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하여 아버지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내도 그 동안 마음 고생한 것을 내가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상하면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도 어려서 아버지는 내 마음을 하나도 알아주지 않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수 없이 원망하고, 어린 나의 마음고생을 알아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어려서 많은 병을 앓으면서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어떤 때는 너무 다리가 아파서 학교를 갈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인가 할머니의 지팡이를 짚고 학교에 갔습니다. 체육선생님이 멀쩡한 놈이 지팡이를 짚고 학교에 왔다고 기합을 주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서운합니다.
그리고 그날 아버지는 고등학생이 꼴사납게 지팡이를 짚고 학교에 갔다고 야단을 치셨을 때 정말 서러웠습니다. 지팡이를 짚지 않고 학교에서 집에 오던 날 이십 리 길을 가다가 진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끌고 친구들이 시골 병원에 데려 갔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진료비도 받지 않고, 나보고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친구들은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끌고 빵집에 가서 빵을 사주면서 웃고 떠들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그날 친구들에게는 내가 ‘영양실조’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픈 다리를 어루만지면서 그 빵을 목이 메도록 먹던 나를 보고, 친구들은 속으로 많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그 모든 것들을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인가 술에 취하셔서 대문간에 쓰러져 계신 아버지를 떠메 오는데 “자식이 못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려 다리까지 아픈 것을 이 애비가 모르는 줄 아느냐?”고 자탄하시며 자꾸만 헛소리처럼 되 뇌이시던 아버지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속속들이 알고 계셨고, 당신의 아픈 가슴을 토할 수 없어서 술에 취하셨고, 당신의 무능을 탓하시며 가슴 아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 아픔을 끌어안는 데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십년이 지난 뒤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산소를 이장하면서 그 유골을 품에 안고 나서야 아버지의 아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아버지가 자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모르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생애를 알고 있으니 무엇 하나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아픔이나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대부분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그래서 자식들의 답답함도, 속상함도 기쁨과 슬픔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답니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만 모르는 체 할 뿐이기도 하고, 잘 모르는 것은 궁금해서 잘 알려고 아내에게 물어도 보고,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상의도 하고,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그 때문에 답답해하는 것은 오히려 부모들입니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만이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들이 누군지 가장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주님을 몰라주고,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당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믿음도 신앙도 고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분이 좋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체하는 사람들도 모르는 하느님의 신비를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알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들어내 보이십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축일7월 13일 성녀 데레사(예수의) (Teresa of Jesus)
신분 : 수녀
활동 지역 : 로스 안데스(Los Andes)
활동 연도 : 1900-1920년
같은 이름 : 테레사, 테레시아
성녀 로스 안데스의 예수의 테레사(Teresia de Jesus de los Andes, 또는 예수의 데레사)는 1900년 7월 13일 칠레(Chile) 산티아고(Santiago)의 상류 가정에서 후아나 페르난데즈 델 솔라르(Juana Fernandez del Sola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 깊었던 그녀는 프랑스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인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10월 1일)의 전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성인전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극복하며 모든 것 위에 다른 사람을 두는 방향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녀의 자기 변화에 더 큰 영감을 준 것은 첫영성체 때였다. 이를 통해 그녀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값진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였다.
1919년 5월 7일, 19살의 나이에 후아나(또는 후아니타 Juanita)는 로스 안데스의 카르멜회 여자 수도원에 입회하여 같은 해 10월 14일 착복식을 하고 예수의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의 짧은 생애의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영성 생활의 체험을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편지 쓰기 사도직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녀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치명적인 발진티푸스에 걸려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스무 번째 생일을 석 달 남겨 두고, 또 6개월의 법정 수련 기간을 완료하기 직전에 그녀는 죽음의 위험 중에 있는 상태에서 관면을 받고 1920년 4월 7일 첫 서원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12일, 그해의 사순시기 성주간 중에 선종하였다.
성녀 예수의 테레사가 선종한 후 그녀의 시신은 산티아고에서 90km 정도 떨어진 로스 안데스의 아우코 린코나다(Auco-Rinconada) 순례지에 모셔졌다. 매년 10만 명 정도의 순례자들이 그녀의 유해를 참배하기 위해 이곳을 찾을 정도로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에게 잘 알려진 그녀의 생애에 대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가 1990년대 초 칠레에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그녀는 1987년 4월 3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3년 3월 2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칠레의 첫 번째 성인이자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성인으로 선포된 첫 번째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의 수녀이다. 또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10월 15일), 예수 성심의 성녀 테레사 마르가리타 레디(Teresia Margarita Redi, 3월 7일),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10월 1일),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8월 9일)와 더불어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에서 다섯 번째로 테레사 이름을 가진 성녀이다.
축일7월 13일 성 에즈라 (Ezra)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4/5세기BC
같은 이름 : 에스드라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성문서에,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역사서에 속하는 구약성경 에즈라서는 후반부(7-10장)에 가서 등장하는 주인공 에즈라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였다. 에즈라서는 느헤미야서와 함께 바빌론 귀양 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도움이라는 뜻을 지닌 성 에즈라(Esdras)는 바빌론으로 귀양 간 유다인들의 사제이자 율법 학자로서 페르시아 정부의 유다인 담당 기구 안에서 조언자의 직무를 맡고 있었다.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제7년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다인의 공동체를 다시 이룩할 명령을 받았다. 약 1,500명의 유다인과 많은 성전 봉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해(7장 이하) 법을 선포하고 그것을 의무적으로 지킬 것을 명하며 타민족과의 혼인을 금지하였다(9장 이하). 이는 많은 동포가 이민족들과 혼인하여 민족의 순수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페르시아로 돌아갔으리라고 본다.
축일7월 13일 : 성 요엘 (Joel)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4세기BC
같은 이름 : 조엘
요엘서는 구약성서의 열두 소예언서 중 두 번째로 등장하는 예언서로 브두엘의 아들 요엘(1,1)이 선포한 말씀으로 모아져 있다. 요엘은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을 지니며 역대기와 느헤미야서와 에즈라서 등 구약성서 후대의 역대기계 문헌에는 18회나 언급되지만, 그 외에는 사무엘 예언자의 맏아들 이름으로 단 한 번만 사용된다(1사무 8,1). 그래서 요엘이 오래된 이름이기는 하지만 구약성서의 후대에 와서 흔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구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요엘 예언자가 언급되지 않는다. 요엘서 자체에서도 요엘 예언자 개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런데 요엘의 예언이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그가 유대인이고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요엘은 성전에서 거행되는 종교 의식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이사야나 에제키엘처럼 이스라엘인들의 잘못된 종교 의식을 비판하였던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가뭄과 메뚜기 떼의 침입으로 성전에서 매일 바쳐야 하는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여러 외적 궁핍보다 더 큰 불행으로 여긴다(1,9. 13. 16). 또한 그의 많은 표현도 전례 용어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직하던 ‘전례 예언자’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다른 한편, 기존의 성서에 정통한 요엘은 선배 예언자들의 사상을 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미 공포한 말씀을 다시 선포하고 그들의 어구나 어휘를 인용하고 재활용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예언자를 ‘성서 예언자’ 또는 ‘성서 해설가’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예언자로서 요엘의 성격을 흐리게 하거나, 그의 독창성을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여러 정황을 종합할 때, 기원전 4세기 초엽이 요엘 예언자의 시대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유대인들은 민족과 땅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나름대로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가 감행한 종교개혁 덕분에 예루살렘 성전은 유일한 성소로 자리를 굳히고, 그곳의 모든 전례도 이미 잘 정비되어 거행되고 있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예수의 데레사 자매님과 요엘, 에즈라 형제님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