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3일 토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랑의 배달부가 되게 하소서.
IMF가 닥쳤을 때 나는 대학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서 밤잠을 설쳐가며 일을 하고 본당에서도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어서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서울에서 고해성사를 보게 되었는데 상설고해소에 젊은 신부님이 칸막이를 뜯어놓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계셨습니다. 고해가 다 끝나고 신부님은 보속이나 훈계의 말씀을 하시지 않고 ‘아이들이 몇이냐?’, ‘아이들이 아버지 말씀 잘 듣지 않지요?’하고 물으셨습니다. 난 ‘예’하고 대답했고, ‘직장이 무엇인지?’ 물으셨고 난 ‘학교에 있다고 대답했더니’ ‘학교도 경제가 어려워서 힘들지요. 학생들이 선생님 말씀 잘 듣지 않지요?’ 하시며 ‘교회에서 본당 신부님하고 신자들도 요즘 많이 어려우시지요?’ 고해를 하는 분은 신부님 같고, 난 그저 ”네“라고 대답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질문과 답변이 끝나자 신부님은 일어나서 제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시며 사죄경을 외워 주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주 조심스럽게 ”신부님 보속은?“ 하고 여쭈웠더니 ‘이 어려운 세상을 사는 게 보속이지요. 열심히 사세요.’ 하고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날 큰 성당에 홀로 앉아서 십자가 고상을 보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주님께서 그 어렵고 힘든 제게 위로를 주시고, 안식을 주시는 것을 크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안식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안식(安息)이 어떤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편히 쉬는 것을 안식이라고 한다면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하는데 그 고통의 바다에서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하루 종일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글도 쓰고, 책도 보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에 드는 하루하루가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어려운데, 그렇게 사는 세상에서 안식이 정말 있을 수 있을까? 편하게 두 다리를 한 번 뻗고 쉬고 싶다고 하면서도 맘 편하게 쉬어 본적이 없는 것이 우리들의 팔자인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속상한데,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그래도 괜찮게 한다고 하면 주일을 한 번도 편히 쉴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주일이 되면 미사에 참례하고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어느 때는 피정이나 세미나, 각종 회의 등 왜 그렇게 갈 곳은 많은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신부님의 말씀은 복음 말씀이 아니라 볶음 말씀처럼 들리고, 교회 살림살이나 선교나 어떤 의무나 사명의식으로 마음은 더 괴롭고, 죄의식으로 조금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했을까 하느님께서 쉬셨으니 우리도 쉬라는 말씀이 과연 우리에게 합당한 말씀이 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자리 잡고 있답니다.
그런데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요즘에서야 겨우 깨닫고 있으니 난 정말 바보처럼 살았나 봅니다. 육체적인 안식이나 정신적인 안식을 얻지 못하는 것이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내가 추구하는 안식의 방향이 전혀 잘못된 것임을 겨우 알게 된 것이지요. 주님께서 주일에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은 ‘바쁜 세상살이에서 얼마나 지쳤니? 내게서 축복을 받고, 평화와 기쁨을 받아서 열심히 세상을 살렴.’ 하시고 당신의 품 안에서 편히 쉬게 하시려는 것이 안식일의 참 뜻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욕심으로 바쁘고 괴로움에서 벗어버리지 못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움켜쥐고 살아가는 것이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내가 안식일의 주인인 것처럼 살았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종이나 자식들이 주인이나 아버지가 엄하고 무섭다면 그 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편안하겠습니까?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우리가 잘 알고 있다면, 그 분이 사랑과 자비의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면 안식일이 얼마나 편안하고 평화와 기쁨의 날이겠습니까?
'지족자 빈천역락 부지족자 부귀역우’
(知足者 貧賤亦樂 不知足者 富貴亦憂)란 말이 명심보감에 있습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하거나 천하여도 또한 즐거우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자거나 신분이 귀해져도 또한 걱정하고 근심한다.>라는 말이지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편안하고 안락해도 안식이 아닌 것입니다. 안식일은 주님께서 주시는 그 위로와 행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의 날인 것입니다. 율법에서 정한 안식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에 맡겨진 행복의 날이 안식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4,6ㄴ-15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6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한 가르침을 나와 아폴로에게 배워, 저마다 한쪽은 얕보고 다른 쪽은 편들면서
우쭐거리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7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임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임금이 될 수 있게 말입니다.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11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12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13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14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타이르려는 것입니다.
15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축일9월 3일 성 그레고리오 1세(대) (Gregory I the Great)
신분 : 교황, 교회학자
활동 연도 : 540?-604년
같은 이름 :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또는 그레고리오)는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이미 두 명의 교황, 즉 성 펠릭스 3세(Felix III, 526-530년, 9월 22일)와 성 아가피투스 1세(Agapitus I, 535-536년, 9월 20일)를 배출한 로마 귀족 가문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법학 등 고등 교육을 받고 573년 로마 시장이 되었다. 574년경 아버지 고르디아누스(Gordianus)가 세상을 떠나자 성 그레고리우스는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부모의 저택을 성 베네딕투스의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고, 그 수도원에 입회하여 오래전부터 꿈꿔 왔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시칠리아(Sicilia)에 있는 가족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더 세웠다. 578년 교황 베네딕투스 1세(Benedictus I)에게 부제품을 받고, 579년 교황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II)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파견되었다. 586년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다시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계속하며 교황 펠라기우스 2세를 도와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590년 교황 펠라기우스 2세가 선종하자 그는 수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제64대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는 신심 깊은 인물로 출중한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교회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했으며, 막대한 경비를 들여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랑고바르드족(Langobards)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키고,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기근의 희생자들을 구호하였다. 그는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될 만큼 활동적인 교황이었다. 593년 랑고바르드족이 로마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직접 랑고바르드족과 담판을 지어 로마의 평화를 지켰다. 이로써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왕과 함께 평화의 수호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이렇듯 그는 위대한 주교이자 정치인이었다.
또한 그의 학덕은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실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중세 주교와 사제가 꼭 읽어야 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사목 지침서”(Liber Regulae Pastoralis), “욥의 윤리”(Moralia in Job) 등 각종 성경 해설집과 설교집, 당시의 신학 · 전례 · 역사 · 사회학의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800여 통의 서한을 모은 “서간집”(Registrum Epistolarum), “그레고리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regorianum) 등을 집필하였다. 특히 그는 교회의 성가를 재조정하고 그레고리우스 성가도 제정하여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저서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서방교회의 전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게르만족의 개종뿐만 아니라 영국의 앵글로 색슥족의 개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597년 성 안드레아 수도원 원장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와 40여 명의 수도자를 영국 켄트 왕국에 파견해 601년에는 영국에 요크(York) 대교구와 캔터베리(Canterbury) 대교구와 12개의 소속 교구를 설정하였다. 그는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는 동시에,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함으로써 교황권이 지배의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권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시켜 교황의 권위 아래 두었다.
그는 라틴 교부의 일원이자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에 그의 다양한 활동과 영성적 위대함으로 인해 ‘대교황’이란 명칭으로 불린다. 그는 604년 3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사후 즉시 성인품에 올랐다. 축일은 선종한 날인 3월 12일에 지내오다가 1969년 전례 개혁과 함께 라틴 교회에서는 그가 교황으로 착좌한 9월 3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동방교회와 영국 성공회, 루터교 등에서는 여전히 3월 12일에 지내고 있다. 그는 음악가, 가수, 학생, 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대 그레고리오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