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어린양 – 심순화 카타리나 作
“그래도 사랑해!”
“얼마나 사랑해?”
아이가 부모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연인에게 종종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하느님께 드리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전례 독서를 통해 이런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랑해!”
우리가 부족하거나 약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사랑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이집트 탈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과 시나이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을 맺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두 실행하겠다.”(탈출 24,3.7 참조)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사십 일”(탈출 24,18)도 참지 못해 주님께서
“명령한 길에서 빨리도 벗어나”(탈출 32,8) 우상숭배를 시작합니다.
이 모습에 주님께서 진노하셨지만,
당신 진노를 돌리시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돌아선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더 나아가
당신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1티모 1,13)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과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1코린 15,9; 갈라 1,13 참조)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다가가서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1티모 1,16) 우리를 어여삐 봐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오늘의 비유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건장한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누어달라고 무례하게 굴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하지 않고 가산을 나누어줍니다.
재산을 받자 작은 아들은 홀연히 떠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례한데다가 자신을 놓고 매정하게 떠난 작은 아들이 언제나
돌아올까 노심초사하며 기다리십니다. 기다림 끝에 작은 아들이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멀리 있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그래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사랑해주십니다.
잘하는 사람, 이쁜 짓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족하거나 미운 짓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돌아서도, 박해해도, 무례하고 매정하게 굴어도
“그래도 사랑해”주십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힘입어
한가위와 더불어 기쁘고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희망합니다.
글 : 김진오 요셉 신부 – 전주교구
감사하는 삶
어느 겨울 크리스마스 때였습니다. 대부를 서 준 친구가
성가 대원들과 성탄 시기 성가 연습을 하는 걸 한쪽에서 구경하는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노래가 들렸습니다.
끝부분이 영어 발음하고는 다른 이탈리어 같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가톨릭 성가 101번「글로리아 높으신 이의 탄생」이었습니다.
‘글로~~오~~오~~리아 인 엑스 첼 시스 데~오’ 그 노래 때문이었는지
그날은 평생 잊히지 않고 기억됩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팝송이며 온갖 장르의 음악을 참 좋아했습니다.
바로 위 형님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을 자주 접한 정서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대부였던 친구는 얼마 안 되는 돈을 빌려 행방불명 돼버렸고,
저도 그때부터 성당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성당에 몇 년 다니다 말고 냉담을
오래 하게 된거죠. 그때 그렇게 주님의 손을 스스로 놓아버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주님께서는 쭉 저를 붙잡고 계셨음을 압니다.
바로 무종교인 저희 집안에서 천주교 신자가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누나, 형님 그리고 지금은 조카들까지 줄줄이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아버님께서도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또 무엇보다
제 집사람이 세례를 받았을 때 주님께서 제 손을 놓지 않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저희는 같은 직장에서 만나 결혼했는데 저도 그때부터 냉담을 끝내고 다시 성당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지간한 부부들이 똑같이 살 듯 저희도 정말이지 부부로서 맞는 건 단 한 가지가
없을 정도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라는 노래처럼 힘겨운 관계로
살았으나, 지금은 모든 걸 그러려니 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바로 신앙의 힘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신앙의 본질인 것 같고,
그것을 제대로 믿는 마음과 행동이 신앙다운 신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건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살아오는 동안 부족한 제게 이리도 큰 은총을 내려주셨으나
그저 주일 미사에 한 번 참석하는 거로 끝나는 건 아닌지, 또한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봅니다. 예전엔 그래도 레지오 활동이나
차량 봉사 등 작은 봉사를 했었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무엇을 한다는 게
무리라 주일 미사에만 참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주님의 은총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찌 살든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뿐!
하느님께도 감사, 성모님께도 감사, 이 글을 쓰게 해주신 주님께도 감사,
제 집사람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몰랐더라면
하루하루가 더욱 힘들었을 건데 다행히 그 귀한 진리를 알았으니 이제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 아닐까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해보는 날입니다.
글; 윤정열 스테파노 / 『내 마음속엔 아름다운 나타샤가 있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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