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공현대축일-woo
동방박사는 누구?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公顯)이란 ‘공식적으로 나타내 보이다’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로 드러나심을 의미합니다.
삼왕이라고도 칭해지는 동방 박사 세 사람(가스팔, 멜키올, 발타살)은
이방인들로서 구세주 예수님을 처음 뵙고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여정은 절대 순탄치 않았습니다.
머나먼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마태 2,1 참조) 그 별의 인도를 따라 힘든
순례 끝에 베들레헴에 도착해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고
정성껏 준비한 선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봉헌합니다(마태 2,11 참조).
저는 주님 공현 대축일만 되면 독일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라인강 옆에 자리 잡은 웅장한 쾰른 대성당을 보며 동방 박사 세 사람의 유골이
모셔져 있는 찬란한 황금 유골함과 오늘 복음의 장면을 그린 병풍형 그림을 봤던
순간이 항상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의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이스라엘로부터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페르시아 제국에서 활동하던 천체에 지식이
깊은 동방박사들이 별자리를 살피던 중 유난히 빛나는 큰 별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지는 구세주의 탄생에 관한 예언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이스라엘을 비추는 그 큰 별빛을 따라 기나긴 여정을 하게 됩니다.
성경과 율법을 모두 암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학자들은 오히려
메시아 탄생을 모르고 있었고(마태 2,3-4 참조) 이 이방인들의 박사들은 별을
보고 메시아 탄생을 믿고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는 것은
구원의 땅에 살면서도 자신들의 구세주 탄생인데도 이방인들에게 즉
외국인들에게 자신들의 나라 소식을 듣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임신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미사를 참례하고, 유아세례를 받고, 복사를 서고,
예비신학생 모임을 다녀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이 아닌 우스운 성적으로 졸업하며
사제가 된, 신앙으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헤로데와 율법 학자 같은 저에게
동방박사 같은 이교인들은 제가 일하는 성라자로 마을에 많이 찾아와
구세주의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하고, 전하고 가십니다.
머나먼 미국 한인사회에서도 오고, 경상도 전라도에서도 오고,
가톨릭 단체가 아닌 소방서, 경찰서, 일반 기업과 공공기업에서 우리 마을의 한센병
가족들에게 찾아와 자신들이 정성껏 준비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봉헌하고 가십니다.
저는 또 다른 예수님인
우리 한센 가족들과 매일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님을 몰라보는데, 오히려 머나먼
곳에서 찾아온 이방인들이 우리 마을의 예수님을 알려주고, 깨우쳐주고 가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이방인들이었던 동방 박사들에게
구세주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러웠듯이 저도 성라자로
마을을 찾는 저보다 더 커 보이는 많은 방문객에게 알량한 자존심도 상하고
주님께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송함을 금하기 힘들 때가 너무나도 많음을 고백합니다.
존경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동방 박사의 모습을 기억하며 우리도 하루하루 구세주 예수님이 비추시는
별빛을 잘 따라가고 주님께 올바른 예물을 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감동을 주는 예물을 바쳐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울러
우리 모두를 위해 공적으로 드러나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합시다.
글 : 한영기 바오로 신부 – 성 라자로 마을 원장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사랑의 길
저는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에서 근무하는 의사입니다.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이곳에서 일한 지 이제 막 1년을 채워가는 아직은 햇병아리
호스피스 의사이지요. 더불어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지도 만으로 1년이
막 지난 새내기 신자이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는 열심히 성당을 다녔지만, 공부를
핑계로 성당에 잘 나가지 않게 되면서 흔히 말하는 나이롱(?) 신자로 지내던 제가
세례를 받을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이곳에서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대전성모병원에서 수련을 받던 전공의 시절,
성빈센트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으로 두 달 정도 파견근무를 오게 됐습니다.
병동의 분위기가 무겁고 슬플 것이라는 막연한 제 선입견이 틀렸음을 느끼는 데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호스피스 완화의학은 암 자체를 치료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자와 가족들을 우선으로 생각하면서 돌봄을 행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며,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가 아닌
‘삶의 남은 시간을 소중한 사람들과 의미 있게 보내는 환자들’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예수님과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이곳은 가톨릭 병원답게 병실마다 십자고상이 걸려있고,
병동 가장 환한 곳에 있는 작은 정원에는 성모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환자·보호자들이 혼자 기도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수녀님과 손을 잡고 함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몸은 병마로 고단하지만, 주일이면 꼭 성당에 가고 싶어 하던 환자와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좋아하던 성가와 성경 구절을 들려주며 마지막 작별의 시간을 보내는
보호자, 병자성사를 위해 병동을 방문해주시는 신부님과 수녀님들까지.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에 잠들어있던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다시
깨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병동에 걸려있는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과 성모님께 기도드리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에서 보낸 두 달의 시간은 제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을 다시 마주하게 된 후 교리 수업을 신청했고,
세례를 통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례명을 성모님의 애칭을 딴 ‘스텔라’로 정하며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에 대한 순명과 사랑, 예수님과 함께하신 신앙의 길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또 전문의가 된 후의 진로를 고민하던 제게 이곳에서의 경험은
마치 ‘선원들을 이끄는 밤바다의 별’처럼 가야 할 길을 알려주었고,
저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목전에 둔 환자들의 소중한 마무리를
함께 하는 의사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따라 아기 예수님을 찾고 경배 드린 것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여정을 시작해야 하며
선택의 길, 그분의 길, 겸손한 사랑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제게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에서의 근무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길이며 사랑의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사랑의 길을 따라,
환자분들의 마지막 시간을 평안히 보낼 수 있도록 돕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글; 김보경 스텔라 | 성빈센트병원 호스피스 완화의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