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5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심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래 전 CNN뉴스에서 미국의 한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암 투병 중이어서 방사선 치료를 받느라고 머리가 다 빠져 학교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힘들어 하니까 같은 학년의 남자 아이들 서른 한명이 친구를 격려하기 위해서 머리를 삭발하는 장면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놀이가 생겼다고 좋아하였는데 그것은 머리를 문지르며 용기를 주는 놀이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가끔 삭발하는 장면이 나와서 마음이 언짢았는데 친구들과 같아지려고 삭발하는 어린 아이들의 따뜻한 뉴스를 접하면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지금 갈라져 살고 있습니다. 대화부족으로 사랑이 결핍되고, 희생과 헌신이 없는 겉도는 마음으로 각각의 제 길을 가고 있는데도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19 때문에 사람들은 억지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정말 일치는 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주님 생각이 정말 일치합니까? 그렇다면 그 생각이 가족과도 일치합니까? 진정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과 학생들은 일치합니까?
주님의 간절한 기도를 우리는 건성으로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지금 하나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어떤 때는 이런 묵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일치의 수덕(修德)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임을 느끼고 가슴이 답답하고 부끄러워집니다. 언제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탓하면서 평생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위험성이 많으면서도 아주 잘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반성은 아주 잘하고 비판도 잘하지만 회심은 반성과 비판에서 끝나기 때문에 진정한 회심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도에서 멈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회심의 초반부에서 고개를 돌리고 마는 행태를 평생 되풀이하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지금도 또 회심의 시작에서 멈추고 있지는 않는지 진정한 회심은 사랑의 실천이며, 일치의 첫 단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먼저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하느님께서 비천한 인간이 되시고, 당신의 삺을 모두 헌신하시고, 우리에게 살과 피로 자양분으로 오셨습니다. 외천종 내천주 (外賤從 內天主) 라는 말이 있습니다. 곧 "밖의 모습은 천한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안에는 하느님의 본성이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한 종의 신분을 취하신 그 분 안에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그 분과 같이 있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하나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와 주님이 하나 되는 것일까요?
주님과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으니 우리 스스로가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고, 다른 사람과 하나 되기 위해서 아주 잘 붙는 접착제가 되어 녹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녹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녹지 않는다는 탓만 하고 살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고, 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다'고 말하면서 누가 뭐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우리는 아주 영악해지고 잦은 피정으로 우리들의 귀만 거룩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슴은 계속적인 거룩한 말씀에 면역이 되어서 웬만한 충격적인 말씀 아니면 꿈쩍도 않는 강심장이 되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새로운 상품을 알리는 방법도 고단위의 마케팅 기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날마다 변화하고 개발되는 마케팅 기법으로 사람들은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도 제발 하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일치하고 서로 떨어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간절히 기도하심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잘 생략하고 자신의 능력만을 더 믿고 교만하지는 않습니까?
<너는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2,30; 23,6-11
그 무렵 30 천인대장은 유다인들이 왜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아보려고,
바오로를 풀어 주고 나서 명령을 내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바오로를 데리고 내려가 그들 앞에 세웠다.
23,6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 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7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8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
9 그래서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바리사이파에서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강력히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
10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려가 그들 가운데에서 바오로를 빼내어 진지 안으로 데려가라고 부대에 명령하였다.
11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축일5월 25일 성 베다 (Bede)
신분 : 신부, 교회학자, 역사가
활동 연도 : 672/673-735년
같은 이름 : 비드
영국 타인(Tyne) 강 남쪽 지역의 노섬브리아(Northumbria) 왕국에서 태어난 성 베다(Beda)는 7세 때 친척들에 의해 캔터베리(Canterbury) 위어머스(Wearmouth)의 성 베드로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수도원 원장인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Benedictus Biscop, 1월 12일)의 지도하에 교육을 받았다. 685년부터는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가 새로 지은 재로우(Jarrow)의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겨 그곳의 원장인 성 체올프리두스(Ceolfridus, 9월 25일)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성장한 뒤에 그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고, 19세에 부제품 그리고 30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늘 수도원 안에서 생활하면서 주로 성경 연구에 전념했으며, 수도원 내의 교육과 저술 활동에 몸을 바쳤다.
그는 당대의 가장 박학한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영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경에 관한 그의 주해서들은 당대에 가장 권위가 있었고 중요시되었으나, 그는 역사가로서 더 유명하다. 그의 “영국 교회사”는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그는 또한 영문법과 연대기 작업을 하였고 찬미가와 시를 썼다. 이외에도 그는 서한집과 강론집 그리고 순교록을 썼는데, 이들 책들이 모두 라틴어로 저술되었지만 그는 영어로 집필한 저술가로도 이름이 나 있다. 만년에 그는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성 요한 복음서”를 번역하였고, 세비야(Sevilla)의 성 이시도루스(Isidorus, 4월 4일)의 저서들을 추출하였다. 그는 735년 5월 26일 재로우의 수도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재로우에 묻혔다가 더럼(Durham)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더럼 성당의 갈릴리 경당에 묻혀 있다.
성 베다는 일생 동안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자였으나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그의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자’(Venerable)라는 칭호를 덧붙였고, 이 칭호는 853년 아헨(Aachen)의 교회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겸손하였으며,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가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는 성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고 하였다. 그는 단테(Dante)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의 ‘천국 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하다. 비드(Bede)로도 불리는 그는 1100년 이전까지 영국 전례력에서 5월 26일에 기념되다가 1969년부터 5월 25일로 확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베다 (Bede)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