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무미건조한 신앙생활
오늘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우고 가던 배가 풍랑과 큰 파도에 부딪치는 것에 대하여 묵상합니다. 우리가 흔히 배는 교회나 가정에 비유하기도 하고 직장이나 각종 공동체나 단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항상 어느 단체에 가입해서 그 구성원으로 함께 할 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오늘 복음에서는 상징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풍랑을 무엇에 비유할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1) 교회에 대한 박해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치며, 신앙을 증거하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데 생명을 바칠만한 가치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 박해이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는 것이 모두 풍랑입니다.
2) 황금만능주의와 물질주의의 모든 가치관이 풍랑입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이기적이고,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그리스도의 참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모든 학문이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나름대로 세워진 우상을 만들어 그 우상을 신봉하고 하느님을 과학이나 지식으로 공격합니다. 신앙을 신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식의 한 방편으로 생각합니다. 예전에 충효사상(忠孝思想)은 우리 사회의 근본 사상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낡은 사상이고 고루한 생각이라고 치부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병들고 더 이상 충효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교회도 가정도 시름시름 병들어 가는 것만 같습니다.
3) 지도자들을 잘못 만나면 아주 큰 불행을 맞이하고 큰 풍랑이 몰아치는 것입니다.
배의 키를 잡은 선장의 인도로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어떤 시련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공이 많다고 하여도 지도자가 그들을 잘 통솔하고 인도하지 않으면 거친 풍랑에 휘말리기 쉽습니다. 본당신부가 바뀌면 신부님의 의향에 의해서 전략과 전술이 바뀌게 되면 신자들은 혼란스러운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만 내세우고 그들의 의향에 따라주기만 바란다면 곤란합니다. 가장의 권위가 상실되면 이혼율이 늘어나고, 스승의 권위가 상실되면서 학교가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사교육이 판을 치고 있어도 교육은 자꾸만 퇴보하는 것은 훌륭한 지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풍랑을 이겨나가려면 아주 선각적인 지도자가 있어야 하듯이 신앙인은 각자가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4) 사람들의 신심이 부족하면 작은 풍랑에도 견디지 못합니다.
내가 가진 성덕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측량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성덕의 생활을 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좋은 표양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덕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데 어떻게 모진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이 있지요. 옛날의 믿음만 자꾸 강조하다보면 우리는 흐르는 강물에 떨어뜨린 칼을 배안에서 찾고 있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결과입니다.
5) 사람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욕구와 재미를 충족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의 욕구는 점점 다양해지고 그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항상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재미’를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 ‘교회도 재미 없어서 다니기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듯이 재미를 요구하는 풍랑은 아주 적은 부분인 것 같지만 아주 큰 풍랑으로 변할 수 있는 소지가 큽니다. 지금 사람들은 모바일에 정신을 빼앗겨 살고 있습니다. 조금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얼마 전 20세 미만의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예수님이 참 재미없는 분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어 매 게임마다 해트트릭을 하신다면 인기를 누리어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몰려 올 것이고 그런 예수님은 세상을 완전히 사로잡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면서 다른 나라의 선수들이 골을 넣고 성호를 그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 참 부러웠습니다.
6) 기도와 성령의 부족은 우리 사회의 큰 풍랑으로 몰아쳐옵니다.
모든 일이 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도 하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자신들의 능력을 믿고 실패하였을 때만 주님을 원망하는 창구로 삼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미건조(無味乾燥 : 성당에 다니기도 싫고 기도하기도 싫고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할 때인데 신자에게 자주 찾아오는 유혹과 시련의 시기)할 때에는 억지로라도 기도하라고 영성학자들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너무 기도 하지 않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너무 소홀히 여깁니다. 그래서 그 풍랑의 여파로 우리가 탄 배가 삶의 매순간마다 가랑잎처럼 흔들립니다.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9,15-29
그 무렵 15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며 말하였다. “자, 소돔에 벌이 내릴 때 함께 휩쓸리지 않으려거든,
그대의 아내와 여기에 있는 두 딸을 데리고 어서 가시오.”
16 그런데도 롯이 망설이자 그 사람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주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17 그들은 롯의 가족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18 그러나 롯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리,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19 이 종이 나리 눈에 들어, 나리께서는 이제껏 저에게 하신 것처럼
큰 은혜를 베푸시어 저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재앙에 휩싸여 죽을까 두려워, 저 산으로는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20 보십시오, 저 성읍은 가까워 달아날 만하고 자그마한 곳입니다.
제발 그리로 달아나게 해 주십시오. 자그마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 목숨을 살릴 수 있겠습니다.”
21 그러자 그가 롯에게 말하였다. “좋소. 내가 이번에도 그대의 얼굴을 보아
그대가 말하는 저 성읍을 멸망시키지 않겠소. 22 서둘러 그곳으로 달아나시오.
그대가 그곳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내가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리하여 그 성읍을 초아르라 하였다.
23 롯이 초아르에 다다르자 해가 땅 위로 솟아올랐다.
24 그때 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25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
26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27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29 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
축일7월 4일 성녀 엘리사벳 (Elizabeth)
신분 : 여왕, 3회원
활동 지역 : 포르투갈(Portugal)
활동 연도 : 1271-1336년
같은 이름 :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왕 페드로 3세(Pedro III)와 시칠리아(Sicilia)의 왕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났다. 페드로 3세 왕은 자신의 딸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녀의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11월 17일)을 본받으라고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데니스 1세(Denis 또는 Dinis I)와 결혼하여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후에 남매를 얻었다. 딸 콘스탄스는 후에 카스티야(Castilla)의 왕인 페르난도 4세(Fernando IV)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고, 아들은 포르투갈의 왕위를 승계해 아폰수 4세(Afonso IV)가 되었다.
데니스 1세 왕은 능력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칭찬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의 교육까지 담당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자선 사업에도 힘써 병원 · 고아원 ·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 양로원 등을 설립하고, 순례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숙소도 마련해주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냉대에도 인내심을 갖고 대했고,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한 아들 아폰소 4세와 남편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그녀의 노력과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아 한때 알랑케(Alenquer)로 추방되기도 했다.
성녀 엘리사벳은 1324년 남편 데니스 1세가 병을 얻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다.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뒤늦게 회심하고 신앙을 찾았지만, 이듬해에 선종하고 말았다. 남편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성녀 엘리사벳은 아들이 왕위를 승계한 후 수도원 · 교회 · 빈민 구제소 등을 세우는데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리고 코임브라(Coimbra)에 자신이 세운 성녀 클라라(Clara)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근처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그곳에서 수녀가 되겠다는 이상은 포기했지만,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되어 수도자 못지않은 엄격한 보속의 생활과 봉사활동에 전념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평화와 중재의 사도’로 알려진 성녀 엘리사벳은 말년에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전쟁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1336년 7월 4일 아들인 아폰수 4세와 카스티야의 왕이자 자신의 조카인 알폰소 11세(Alfonso XI) 간의 평화를 중재하러 가능 도중 과로와 열병으로 인해 병을 얻어 에스트레모스(Estremoz)에서 선종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그녀의 유해는 코임브라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성당에 묻혔고, 두 왕은 후에 동맹을 맺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복녀로 선언됨으로써 코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이 허락되었고, 1626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630년 “로마 순교록”에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8일 축제(현재는 폐지되었음)와 겹치는 관계로 7월 8일로 바꿨다. 하지만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선택 기념일로 변경되면서 축일 또한 천상 탄일(선종일)인 7월 4일로 복원되었다. 그녀는 흔히 포르투갈 또는 아라곤의 이사벨라(Isabella, Isabel)로 알려져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엘리사벳은 평화와 중재의 사도답게 대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혹은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비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과 마찬가지로 장미의 기적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있다. 14세기의 한 제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어느 겨울 아침에 성녀가 성을 나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전(또는 빵)을 나누어주었는데, 그녀와 마주친 왕이 무엇을 감싸고 있냐고 묻자 ‘주님의 장미’라 답했고, 1월임에도 불구하고 풀어헤친 앞치마에는 장미가 있었다고 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엘리사벳(Elizabeth)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