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좋은 일만 있을 수 없으며, 좋은 생각만 할 수는 없습니다. 나 자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헛된 생각들이나 좋지 않은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상상하지 못하는 유혹에 빠져 있으면서 유혹인지도 모르고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완고한 생각으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는 정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정치가들을 정직한 사람들이며,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지 않습니다. 아주 정직한 사람도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고정관념으로 그들을 대하는데 그런 고정관념을 완전히 불식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수도승, 교사와 교수들에 대한 어떤 기대감과 이미지는 우리의 생각을 아주 완고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심성일지도 모르는 것처럼 이렇게 어떤 상(像)이 만들어집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도 아주 완고한 것이어서 ‘내 자식은 절대로 잘못 할리 없다.’는 것이 부모들의 생각이고,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기고, 제일 예쁘고, 가장 똑똑하고, 모든 면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 부모들입니다. 부모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부모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잘못이면서 잘못을 잘 모르는 것이 부모들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어떤 것보다도 크기 때문인데 그렇게 굳어진 완고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나도 아홉 살부터 신자의 길로 들어서서 세례를 받고, 성경을 공부하고, 피정도 받고, 주로 친한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들이어서 그렇게 굳어진 생각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고정관념으로 묵상도 하고, 이렇게 글도 쓰는 것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가를 하거나 특별한 훈련을 하지 않은 사람은 팔이 밖으로 휘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 범주 안에서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 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바리사이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또한 예수님을 편견과 완고한 마음과 고정관념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유대인들과 바리사이들을 완고한 마음으로, 어떤 고정관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에도 그런 사고방식은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 복음에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라는 대목에서 언제나 머물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로 불러 세우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손이 정상이던 사람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오른손이 후천적으로 오그라들었다는 것이지요.
손이 오그라든 것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손의 모양대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존우사상’(尊右思想)에서 오른손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을 나타내고, 왼손은 나와 나의 일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안식일을 율법에만 매달려 잘못 생각하고 있는 바리사이들을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으로 비유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손을 펴 주시는 일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며, 하느님 지향이 되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고정관념과 완고한 생각과 편견으로 안식일을 판단하고, 세상의 일을 판단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오그라든 손은 전부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의 오그라진 손을 펴 주시어 그가 손을 뻗는다는 것은 자신지향에서 타인지향으로 바뀜을 의미하고 자신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전환됨을 의미합니다. 내가 바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세례를 받고 온전히 주님을 향하여 뻗었던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세상의 온갖 유혹과 죄에 물들어 야금야금 내 양심을 좀 먹더니 이제는 아주 뻔뻔해지고,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진 오그라든 사람이 되었답니다. 육신과 영혼이 모두 굳어져서 주님의 손길이 없으면 도저히 펴질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도 정말 모르게 그렇게 변해졌습니다. 모든 것에 둔감해지고, 감정은 삭막해지고, 방어기재가 기승을 부리고, 그 모든 것이 환경의 탓이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치유를 받아야 할 내가 주님께서 불러 세우고, 사람들 가운데로 세우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내가 그 분께 다가가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를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려고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24―2,3
형제 여러분,
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5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26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27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나타난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29 이를 위하여 나는 내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받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2,1 사실 여러분과 라오디케이아에 있는 이들, 그리고 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모든 이들을 위하여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2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축일9월 11일 성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 (John Gabriel Perboyre)
신분 : 신부, 선교사, 순교자
활동 지역 : 중국(China)
활동 연도 : 1802-1840년
같은 이름 : 가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퍼보일러, 페르바르, 페르부아르, 한스, 후안
성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Joannes Gabriel Perboyre)는 1802년 1월 6일 프랑스 남부 로트(Lot)의 카오르(Cahors) 교구에 속한 르푸에쉬(Le Puech)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여덟 형제 중 다섯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신부와 수녀가 됐을 정도로 신심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15살 때 선교에 대한 강론을 듣고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사가 되려는 꿈을 키운 그는 1818년 12월 형인 루이(Louis)와 함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선교회(Congregation of the Missions of St. Vincent de Paul)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2년 후 첫서원을 하고 1826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소망과는 달리 첫 부임지는 생 플뢰르(Saint-Fleur) 신학교의 교수로서 교의 신학을 담당했다. 1832년에는 새로 입회한 수련자들을 위해 파리에 세워진 수련원의 부원장이 되었다. 늘 중국 선교를 희망하던 그는 형 루이가 중국에서 선교하다 죽은 후에는 더욱 중국 선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마침내 그는 1835년에 선교사로 중국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그해 3월 21일 유럽을 떠나 8월 29일 마카오(Macao)에 도착했다. 마카오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낯선 중국 문화에 적응하는 훈련을 한 후 이듬해 6월 중국 땅에 도착해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양쯔강 근처 허베이성(Hebei, 河北省)의 선교 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 전역에서 유럽인들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당국과 중국인들의 감시를 피해 다니며 선교를 계속하던 그는 새로 신자가 되어 교리교사가 된 어떤 사람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1839년 9월 재판에 넘겨진 뒤 1년여 동안 잔인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1840년 9월 11일 후베이성(Hubei, 湖北省) 우한(Wuhan, 武漢)의 ‘붉은 산’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묶인 채 밧줄로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
성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 신부의 선교 활동과 순교는 중국 선교의 마중물이 되어 그리스도교가 중국 전체에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889년 11월 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됨으로써, 중국 지역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첫 번째로 시복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1996년 6월 2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유해는 용감한 신자가 어렵게 수습해 20년 전에 순교한 성 프란치스코 레지 클레(Franciscus Regis Clet, 7월 9일)의 무덤 곁에 모실 수 있었다. 그 후 다시 프랑스 파리의 성 빈첸시오 선교 수도회 모원 경당으로 옮겨 안치하여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