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6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주님, 당신의 불로 저를 태우소서.
‘물것’이라는 것이 생소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내가 어려서 그 물것 때문에 정말 못 견디게 괴롭힘을 당하고 살았습니다. 모기, 벼룩, 빈대, 이, 바퀴벌레, 설설이, 노래기, 지네, 개미, 쐐기, 송충이, 등에, 깔때기, 사마귀 등 시골에서 살 때 어린 우리들의 살점을 물어뜯는 곤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것들을 통 털어서 ‘물것’이라고 합니다. 거머리, 뱀처럼 징그러운 동물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지렁이나 미꾸라지 같은 것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물것 때문에 정말 괴로웠습니다. 겨울에 살금살금 기어 다니는 이는 간질거리고, 약간 가렵지만 빈대나 벼룩, 쥐이가 붙으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온몸이 퉁퉁 부어오르고,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고,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요즘 프랑스에서 빈대가 나타나 전 세계가 아주 난리입니다. 그 빈대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더니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찜질방에서 나타나 지금 방충에온 신경을 쓰는 모양입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작은 일 때문에 큰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 사용하는 말입니다. 초가삼간이라는 것은 3칸짜리 초가집을 말합니다. 서민의 집은 일반적으로 부엌과 안방, 윗방으로 되어 있는 삼간이 보통입니다. 안방은 온돌 구조에서 보면 아궁이에서 가까운 방입니다. 그래서 윗방보다 따뜻합니다. 안방에 어른을 모시고, 윗방에 젊은 사람들이나 시집살이하는 며느리가 있는 공간입니다. 초가삼간 이라면 서민의 생활공간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공간입니다. 조금 더 큰 집이 4칸 집이 있습니다. 사랑방이라고 아궁이를 따로 가지고 있는 방입니다. 조금 더 큰 집이 다섯 칸 집이 있습니다. 윗방과 사랑방 사이에 큰 대청이 있으면 아주 큰 집입니다. 그리고 위채와 아래채가 함께 어울러 있으면 열두 칸도 되고, 아홉 칸도 됩니다. 그런데 작은 빈대를 잡으려고 집에 불을 놓게 되면 빈대는 잡을지 몰라도 소중한 집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소중한 초가삼간을 태울 정도로 빈대가 싫고 그 괴롭힘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실수로 집을 태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일 때문에 큰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을 빗대어 말하는 속담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괴로웠든지 빈대를 잡으려고 불을 질러대려고 하겠는지 상상이 됩니다.
빈대에 물려 본 사람은 정말 불을 지르고 싶답니다. 정말 한 숨도 눈을 붙일 수 없어서 빈대가 있는 집에서는 잘 생각을 할 수 없답니다. 나는 어려서 빈대에 물리고 두드러기가 나서 약 1주일을 고생한 적이 있어서 빈대 물린 생각을 하면 지금도 따갑고 가렵답니다. 쫓아도 잡아도 몰려드는 모기와 파리, 벼룩과 빈대, 이와 쥐벼룩, 쥐이는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벌레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빈대 붙는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물것과 같이 아주 더럽고, 추하고, 좀먹고, 상처주고, 병을 옮기며, 생명을 갉아먹고, 평화를 파괴하는 기생충과 같은 죄의 뿌리를 없애기 위해서 불을 질러 태워버리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우리의 생활공간이기도 하면서 부정과 부패의 온상인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불태워버리고자 하시는 주님의 의지를 가슴에 간직하고 싶기도 합니다.
또한 세상을 밝히고, 어둠에 파묻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빛을 내시기 위해서 불을 지르러 오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모든 악의 소굴에 살면서 어둠에 파묻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물것을 잘 볼 수 있도록 모든 등불과 횃불에 불을 밝히시는 주님의 그 빛을 생각해 봅니다. 어둡기만 하면 피를 빨아먹기 위해서 기를 쓰고 달려드는 물것들이 밝은 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살을 물어뜯으며, 피를 빨아먹으려고 덤벼들지 못하도록 빛을 내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세상의 허접 쓰레기 같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헛된 욕망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신앙에 열정이 없이 냉담한 사람들을 성령으로 불태우시기 위해서 불을 지르러 오신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냉골과 같이 차디찬 내 가슴은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답니다. 교만과 편견과 아집은 내가 최고인 듯 세상의 모든 것을 내리깔고 우습게 여기며, 진실을 왜곡하고 있답니다. 얼음장과 같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하여 차디찬 내 신심을 뜨겁게 만드시려고 불을 지르러 오신 주님의 그 열정과 사랑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편견과 무지함에서 겉만 번지르르한 이 위선과 교만함을 태워버리기 위해서 불을 지르러 오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죄와 악의 뿌리를 근절하기 위해서 세상의 온갖 유혹과 악마의 손짓을 과감하게 물리치고 악마로부터의 단절을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진리와 복음을 선포하고, 세상에 주님을 증거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체면과 허례와 허식과 어줍지 않은 인간관계를 청산하고 사랑과 은총 안에서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열은 가족관계를 파괴하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족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불의와 악과 결탁하지 말고, 의로움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죄와 악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악마의 간교한 유혹에 결별을 선언하고 순수함과 아름다운 하느님의 본성을 지키시려고 죽음의 십자가를 지시려는 결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십자가가 당신이 받아야 할 세례이며, 억압이며, 짓눌릴 박해임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다시 악과 유혹과 결탁하고 있답니다.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19-23
형제 여러분,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축일 10월 26일 성 에아타 (Eata)
신분 : 주교, 수도원장
활동 지역 : 헥삼(Hexham)
활동 연도 : +686년
같은 이름 : 에따, 에아따, 에타
성 아이다누스(Aidanus, 8월 31일)가 노섬브리아(Northumbria)로 잉글랜드(England) 소년 12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중의 한 명이 성 에아타였다. 그는 후에 멜로즈(Melrose)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 큰 공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휘트비(Whitby) 시노드 이후부터 로마 전례 실시를 큰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성 콜만누스(Colmannus, 2월 18일)가 켈트(Celtic) 전례를 고집하고 아일랜드 북서부 코노트(Connaught) 해안의 이니쉬보핀(Inishbofin) 섬으로 가버렸을 때, 그는 성 콜만누스의 요청에 따라 그의 후임으로 린디스판(Lindisfarne)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678년에는 린디스판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 3월 20일)와 주교좌를 서로 바꾸어서 헥삼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주교직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에아타 (Eata)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