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왜 우리가 길을 잃을까?
흔히 양은 똘똘 뭉치는 힘이 아주 강해서 그냥 두면 한 여름에도 너무 붙어있어 털끼리 엉겨 붙어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개나 염소들이 양 사이를 갈라놓아서 귀한 털이 엉겨 붙지 않게 하기도 하고, 피부에 병이 생기지 않게 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염소는 늘 혼자 돌아다니며 뿔을 들이대고 싸우기를 좋아한답니다. 양과 염소는 같은 종족이지만 그렇게 다르답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를 구별해서 성경에서는 많이 쓰이고 있는가봅니다. 똘똘 뭉쳐 있는 백 마리의 양 가운데 한 마리가 무리를 탈출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양을 찾아 나섭니다.
경영학적으로 보면 이 주인은 아주 잘못하는 것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보면 이런 행동은 아주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칫하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모두 잃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정말 무모한 것입니다. 손실이 기대하는 이익을 훨씬 능가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산성의 문제로 계산하더라도 1%의 생산효과이며, 투자 차원에서 보더라도 투자 수익률도 1%에 불과합니다. 승률로 계산해도 99대 1이라는 승률을 가지고 전쟁에 나가는 장수와 같아서 전혀 승산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길을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것을 택하신 것은 이익을 따지는 경영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랑경영에 관한 문제로 생산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투자수익에 관한 문제가 아니며, 기회비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양과 주인을 많이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이 무리를 떠나서 길을 잃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답니다. 어떤 경우가 길을 잃은 양인가 하는 것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고 있답니다.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는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다.>라는 뜻입니다. 전국시대의 사상가 양자(楊子)의 이웃 사람이 양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양의 주인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또 양자에게 하인을 청하여 양을 찾아가려 하였답니다. 그래서 양자가 궁금해서 물었답니다. “아니 양은 한 마리를 잃었는데 어찌 쫓아가는 사람이 많은가요?” 이웃 사람은 “갈림길이 많아서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이윽고 여러 사람이 돌아왔으므로 붙잡았느냐고 물으니, “양을 잃어버렸습니다.”하더랍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쫓아갔는데 어찌 잃었단 말인가?”하고 물으니 그들이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고, 또 갈림길이 있어 양이 어느 길로 갔는지 알 수 없어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왜 양이 길을 잃을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갈림길이 많이 때문입니다.
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가지를 많이 칩니다. 큰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길이 아니라 가지를 많이 친 갈래 길일 수록 길을 잃기 쉽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와 떨어져 같이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갈라진 길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서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갈 길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어느 길로 가야 올바른 길인지 알지 못하고 있답니다.
2. 무리와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의 미움을 받아서 무리 안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리에서 왕따를 당해서 함께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은근히 도망해야 하는 서러운 처지에 있을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떠나면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는 생각이 언제나 나를 유혹합니다. 혼자 있고 싶고, 아무의 간섭도 받기 싫고, 가족도, 친구도 모두 떨쳐버리고 그냥 혼자 있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막연한 기대가 나를 꿈에 부풀게 하고, 헛것에 정신을 팔리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마지못해 그 공동체에서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가슴에 원망과 서러움을 품고서 그렇게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3. 자신이 가는 길이 최고로 여기는 고집 때문입니다.
좋은 길이라고 고집을 피우고 혼자서 앞장서서 가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뒤따라오는 양이나 사람이 없으면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 잘난 척하며 너무 앞장서서 나갈 때 사람들과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어버리고 혼자서 방황할 수도 있습니다.
4. 무서운 동물을 만나면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자나 표범과 같은 큰 동물들이 잡아먹으려고 덤벼들면 자연히 가던 길을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 동물들은 무리에서 떨어지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잡아먹고 공격하기에 적당한 환경을 만듭니다. 세상을 살면서 그런 위험한 때를 많이 만나기도 합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강한 적이 공격해오면 더욱 무리를 떠나지 말아야 하는데도 그 때는 그 것을 모르고 삽니다.
5. 길잡이를 잘못 만나서 엉뚱한 길로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직 어린 양을 잘 인도해 주는 대장이 엉터리로 양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철모르는 어린 양은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에서도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답니다. 부모도, 스승도, 선배도, 신부님도, 직장의 어른들도 모두 나를 이끌어 주시는 대장이랍니다.
6. 내 욕망이나 목표에 따라서 길을 볼 수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이라는 말이 있지요. 잘 아시는 것처럼 <사슴을 쫓는 자 산을 보지 못하고 길을 잃는다.>라는 말입니다. 사슴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건너편에 있는 풀이 더 맛있어 보이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입니다.’ 분수를 알고 사는 것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7. 세상이 모두 암흑천지라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잃고 헤맬 수 있습니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어둠이 판치며 정의가 숨어버려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세상이라서 길을 찾지도 못하고 무리가 보이지도 않는 경우입니다. 나도 지금 그런 어둠 속에 있는 듯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있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1-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6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7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축일12월 12일 복자 토마스 홀랜드 (Thomas Holland)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 지역 : 영국(UK)
활동 연도 : 1600-1642년
같은 이름 : 도마, 토머스, 홀란드, 홀란트, 홀런드
토마스 홀랜드는 아마도 상류 계층에 속한 리차드 홀랜드(Richard Holland)와 앤(Anne)의 아들로 1600년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셔(Lancashire)의 서튼(Sut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의 생토메르(Saint-Omer)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621년 8월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영국 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프랑스어, 플라망어(벨기에 북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네덜란드어), 에스파냐어 그리고 라틴어에 유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도서관’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박식하였다. 1623년에 제임스 1세(James I) 왕의 아들인 찰스(Charles) 왕자가 결혼 문제로 에스파냐에 왔을 때 그가 대표로 뽑혀 마드리드(Madrid)에 가서 라틴어로 연설하기도 했다.
1624년 그는 플랑드르(Flandre) 지방으로 돌아와 예수회에 입회하고 와텅(Watten)에서 예수회 수련기를 마쳤다. 이어서 리에주(Lieg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품을 받은 그는 오늘날 벨기에 북서부 헨트(Gent) 지역에서 잠시 활동하고, 생토메르에서는 신학생들의 영적 지도를 맡기도 했다. 1634년 헨트에서 종신서원을 한 토마스 홀랜드는 이듬해에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는 1635년 잉글랜드에 도착해 7년 동안 런던(London)과 고향 등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가톨릭 사제의 사목과 선교 활동이 금지된 상황이라 가명 등을 사용하며 비밀리에 움직였고,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기에 때로는 외국인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1642년 10월 4일 런던 거리에서 체포되어 클러컨웰(Clerkenwell)에 있는 뉴 프리즌(New Prison)에 갇혔다가 뉴게이트(Newgate)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2월 7일 재판에서 ‘가톨릭 신자이고, 사제이며, 더욱이 예수회원’이란 죄목으로 반역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12월 10일 토요일에 감옥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날인 주일과 월요일 미사를 감옥에서 봉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 12일 그의 마지막 미사는 처형장인 타이번(Tyburn)으로 이어졌다. 그는 처형장에 모인 많은 이들 앞에서 설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 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토마스 홀랜드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12월 12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토마스 홀랜드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토마스 홀랜드 (Thomas Holland)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