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1일 목요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나는 논어를 처음 공부할 때 공자의 생활철학을 가장 먼저 대면하게 되었는데 그 생활의 경지가 얼마나 높은지 그 깊은 뜻을 알 수 없어서 해석해주는 대로 그냥 외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아주 쉽게 생각하였는데 세상을 살다보니 점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논어의 학이 편에 가장 먼저 나오는 공자의 말씀입니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매우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왔다면 매우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매우 군자다운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해석하고 있어서 한문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금방 알아듣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말이나 ‘배우고 제 때에 익힌다.’는 말은 약간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말을 ‘제 때에 익힌다.’는 왕숙(王肅)의 집해(集解)에 더 마음이 갑니다. 익힌다는 말은 끊임없이 실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 계속 날개 짓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새끼 새가 어미 새처럼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계속 연습하고 복습하는 것을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배운 것을 그렇게 실행에 옮기며, 끊임없이 복습하고, 배운 대로 생활할 때 참으로 기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공부한 것을 내 생활에 제대로 옮기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며, 제때에 복습하지도 못한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복음을 묵상하면서도 언제나 공부한 그 때 뿐이고, 금방 그 말씀을 잊고 살며, 생활화하는 데는 아주 둔감하답니다. 그래서 배운 것을 제 때에 익히지 못하니 그 내면의 기쁨을 얻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벗이 먼 곳에서 찾아왔을 때 그 즐거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열(悅, 說)은 내면의 기쁨을 말하지요. 그리고 낙(樂)은 ‘남과 어울려 밖으로 드러나는 즐거움’이라고 하였습니다. ‘간담상조’(肝膽相照 :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이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은지, 또 그 친구가 천리 길도 멀다하지 않고 찾아주었다면 그 기쁨과 즐거움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서로 ‘해를 가리켜 눈물짓고, 살든 죽든 서로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하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엘리사벳은 오늘 ‘열락’(悅樂)의 기쁨으로 성모님께 인사합니다. 태중의 아기도 기뻐합니다. 바로 내면의 기쁨을 말로써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로 성모님께 인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만나자 그 기쁨이 넘쳐 즐거워하며 환호성을 터뜨리며 성모님께 인사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논어의 첫 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논어를 공부할 때 가장 쉬운듯하면서도 가장 어려웠던 그 말씀을 오늘은 아주 쉽게 공부했답니다. 세상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촌언니가 있어 행복한 성모님의 아름다움은 바로 기쁨, 환희(歡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기를 잉태한 성모님을 엘리사벳은 알고 찬미합니다. 성모님을 만난 그 반가움으로 기쁨에 가득 찬 엘리사벳의 즐거움을 마음으로 느낍니다. 오늘 독서에서 애인을 찾아서 뛰어오는 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찾아서 뛰어가는 애인이 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뛰어가는 노루나 사슴처럼 그렇게 달려가고 싶습니다. 마음만이라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이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들려옵니다.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아가의 말씀입니다. 2,8-14
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10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4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축일12월 21일 성 베드로 카니시오 (Peter Canisius)
신분 : 신부, 교회학자
활동 연도 : 1521-1597년
같은 이름 : 가니시오, 가니시우스, 베드루스, 카니시우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Petrus Canisius, 또는 베드로 카니시오)는 네덜란드 동부 네이메헨(Nijmegen)에서 아홉 차례나 시장으로 선출된 야곱 카니스(Jacob Kanis)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 베드로 카니스로도 불리는 그는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독일의 쾰른(Koln) 대학교로 갔으나, 그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며 예수회원이던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1일) 신부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전향하고, 1543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산을 모두 나눠 준 후 154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그는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유명해졌다. 그는 트렌토(Trento) 공의회의 여러 회의에 참석했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가 시칠리아(Sicilia)의 메시나(Messina)에 설립한 예수회의 첫 번째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던 중 바이에른(Bayern)의 빌리암 4세 공작이 그곳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물리치고 가톨릭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의 도움을 요청하자 1549년에 잉골슈타트(Ingolstadt)로 갔다. 그는 이와 비슷한 일을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서도 수행했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는 오랫동안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가톨릭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을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그런 주제를 다루는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가 독일어 교리서의 첫판을 출판하자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즉시 15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1556년에 프라하(Prague)로 파견되어 그곳에 새로 짓는 대학교를 위해 일하는 동안에, 남부 독일과 보헤미아(Bohemia)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새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일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의하고 설교하였고,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했으며, 여러 개의 대학을 설립하고, 그가 설교하는 도시의 가톨릭을 부흥시켰으며, 폴란드에 예수회를 널리 보급한 장본인이었다. 1559년부터 1565년 사이에 그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대성당의 대표적인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아주 정열적인 사람으로 30년 동안 도보로 또는 말을 타고 2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톨릭의 부흥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후일 그는 독일의 딜링엔(Dillingen),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Innsbruck)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프리부르(Fribourg)에서 끝까지 교육과 집필에 전념하다가 1597년 12월 21일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조차 ‘고상한 예수회원’, ‘결점 없는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평할 만큼, 트렌토 공의회에 연이어 일어난 가톨릭 재건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논객들 가운데에서 가장 예의 바르고 올바르며 예리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펜과 신문의 영향력을 간파했기 때문에 모든 인쇄업자와 출판사에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는 또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루스(Cyrillus)와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 전집을 편집하였고,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편지를 비롯해 순교 신학, 성무일도 개정 그리고 가톨릭 공과(기도서) 등 수많은 저서를 출판했다. 흔히들 그를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부른다. 그는 186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며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예수회에서는 4월 27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베드로 카니시오 (Peter Canisius)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