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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8일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매년 1월 마지막 주일은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해외 원조 주일'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92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촉구하고자 이 주일의 2차 헌금을 해외 원조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하였다. 오늘 특별 헌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남미 등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해외 원조 사업에 쓰인다.
오늘은 연중 제4주일이며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스승이요 악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원자로 성자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질병과 기아, 전 지구적 기후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 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기로 다짐하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2024년 제32회 해외 원조 주일 담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 찬미 예수님,
하느님을 사랑하시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2024년 해외 원조 주일을 맞이합니다. 주교회의는 1992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1월 마지막 주일의 2차 헌금을 해외의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도움은 이제 세계로 뻗어 나아갑니다. 이는 지구가 하나의 촌이요, 세계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모두 한 형제임을 드러냅니다.
지난해 11월 ‘대한민국-교황청 수교 60주년 기념’ 관계사 발굴 사업 학술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황청 관계사 발굴 사업을 중심으로 주제가 발표되고 질의와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춘천교구장이었던 토마스 퀸란(Most Rev. Thomas Quinlan) 주교가 한국 교황 사절로 재임하였던 1953-1957년의 문서들이 소개되었습니다. 토마스 주교는 6·25 전쟁 이후 어려웠던 우리나라 교회를 위하여 교황청에 많은 재정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실제로 이후 우리나라 모든 교구에 지원금을 비롯하여 소신학교와 대신학교 건립을 위한 자금, 미사 예물, 베드로 성금 등 수많은 지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6·25 전쟁 직후 평양대목구장 서리였던 안 제오르지오 캐롤(George Carroll) 몬시뇰을 통하여 미국 가톨릭 교회에서 많은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지원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독일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가톨릭 복지 기구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던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전쟁과 테러, 폭우, 화산 폭발, 지진 등의 자연재해와 질병 등으로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풍족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경우도 자주 봅니다. 나누려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시몬 베유(Simone Weil)의 말처럼, 우리는 미움을 나누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 기준도 밝혀 주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이런 자선은 선한 의지로 하는 것이며, 자신을 자랑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마태 6,2).
우리의 나눔은 분명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합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한없이 낮추고 비워 우리 모두에게 ‘밥’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셨습니다. 현대인들은 오늘도 ‘나는 결코 너의 밥이 될 수 없다’며 치열한 경쟁을 벌입니다. 그뿐 아니라 타인을 ‘내 밥’으로 삼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다운 사회가 되려면 타인에게 밥이 되어 주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조금이라도 나눠서 지려는 마음도 밥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나눌 것이 없다면 함께 울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이기주의와 약육강식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김수환 추기경, 『하늘 나라에서 온 편지』).
우리의 나눔으로 새로 맞이하는 갑진년 새해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될 수 있기를, 더욱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2024년 1월 28일
해외 원조 주일
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
이사장 조규만 주교
<처녀는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32-35
형제 여러분, 32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33 그러나 혼인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4 그래서 그는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5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축일1월 28일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신분 : 신부, 신학자, 교회학자
활동 연도 : 1224/1225-1274년
같은 이름 : 도마, 아퀴노, 토마스아퀴나스, 토머스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로마(Rome)와 나폴리(Napoli)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Roccasecca)의 가족성(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퀴노의 백작 란둘프(Landulph)와 신심 깊은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보내져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1239년경에는 더 좋은 교육을 받아 훌륭한 지도자가 되길 바라는 가족의 뜻에 따라 나폴리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도미니코회의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으면서 가족의 뜻과는 달리 수도자가 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는 1244년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결국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설득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카세카 성에 감금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Paris)에서 수학하고, 1248년부터 쾰른(Koln)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프랑스 파리와 독일 쾰른에서 당시 저명한 신학자로 이름난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1월 15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250년과 1251년 사이의 어느 때에 사제품을 받았다. 성 토마스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투스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이 말 없는 황소는 그의 울부짖음으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 1252년부터 그는 주로 파리와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아나니(Anagni), 오르비에토(Orvieto), 로마(Roma), 비테르보(Viterbo) 등지에서 강의했고, 1259-1264년 사이에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Contra Gentiles)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의 집필에 착수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1269년에는 수도사제와 교구사제 간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의 시게르(Siger)와 요한 페캄(John Pecham) 그리고 파리의 주교 에티엔느 탕피에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1274년 리옹(Lyon) 공의회에 참석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논의하라는 복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1월 10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리옹으로 가는 도중 테라치나(Terracina) 교외 포사 누오바(Fossa Nuova)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7일 선종하였다. 1369년 1월 28일 에스파냐의 툴루즈(Toulouse)로 그의 유해가 옮겨졌고, 그때부터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그의 미완성 대표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들여질 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로마에서 시작한 집필은 파리로 옮겨서도 계속되었다. 하루는 하느님께서 성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듯 하느님의 축복 속에 그의 집필 작업이 계속되었으나,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 축일 미사 중에 강렬한 하느님 체험을 한 후부터 돌연 모든 집필 작업을 중단했다. 당시 “신학대전” 제3부 ‘속죄’에 대한 부분을 집필 중이던 그에게 왜 더는 글을 쓰지 않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의 발현 시에 형언키 어려운 신비를 보았다. 그동안 내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이 신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신학대전” 미완의 대작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탐구하고 철저히 섬긴 대학자였다. 동시에 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시와 탈혼,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를 체험했다. 1261년 교황 우르바누스 4세(Urbanus Ⅳ)는 당시 몇몇 나라에서 지키던 성체 축일을 보편교회 전례력에 포함하기 위해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시간 전례)에 들어갈 성체 찬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당대 석학인 성 토마스와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7월 15일)에게 그 일을 맡겼다. 어느 날 우연히 성 토마스의 찬미가를 본 성 보나벤투라는 그 완벽함에 감탄해 자신이 작성한 찬미가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교황은 성 토마스가 작성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성무일도와 미사 전례문을 정했다. 그는 이외에도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많은 찬미가를 지었고, 주님의 기도(Pater Noster),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 그리고 성경 일부에 대한 주해서도 썼다.
그는 1323년 7월 21일에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567년에는 교황 비오 5세(Pius V)에 의하여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1880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칭호는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또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이다.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에서 모든 신학생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