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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안다고 증언하는가?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도 가장 하기 싫은 것이 공부하는 것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정말 가난해서 공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집중해서 공부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언제나 마음으로는 공부에 몰두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소설을 읽거나 한문 공부를 하거나 엉뚱한 곳에 마음을 다 쏟고 살았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공부에만 완전히 몰두한 친구를 보면서 많이 부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결혼을 하고 아내가 헌신적으로 학부모가 되어 주어서 그 때부터 정말 공부하는 재미를 붙여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원 없이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쓸데없는 것만 공부한 것이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허울만 박사이고, 교수이지 내가 정말 아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느낍니다.
공자의 제자 증자는 이름을 삼(參)이라고 하고 노나라 사람이며, 효도에 뛰어났고 특히 공자의 심법(心法)을 올바르게 전수받은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논어에서 이렇게 자신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오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
(吾日三省吾身; 爲人謨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나는 매일 자신에 대하여 세 가지를 반성하는데, ‘남을 위해 일을 함에 있어 불충실하지 않았는가? 친구들과 사귐에 있어 신의를 잃은 일은 없는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익히지 않은 것은 없는가?’ 이다.>
증삼은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현자로서 항상 자신을 반성하면서 그렇게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았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반성하였다고 하는 그 세 가지 덕목은 크리스천으로 살고자 하면서 매일 묵상하는 복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언급하고 있는 사랑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나도 논어를 배우면서 이 말씀을 언제나 새기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매일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자신을 더욱 쇄신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내가 교단에 서면서부터 이 말이 더 새록새록 생각나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내가 봉급을 받으면서 그만큼 일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많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 일에 몰두하지 못하였고, 맡은 일에 충실하지 못하였던 것이 더 많이 생각납니다. 정치를 하거나 공무원을 하거나 회사에 다니거나 봉급이 적다고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사는 사람들은 반성해봐야 할 덕목입니다.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도 내가 맡은 직책을 정말 성실하게 수행했는지 생각하면 성실하지 못하였던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자신의 명예나 자신의 의견으로 봉사했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살았던 것을 반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과 사귀거나 사람들을 사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의(信義)라고 합니다. 결혼생활도 그렇고, 사회생활에서도 그러하며, 나를 믿고 의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믿음이 가도록 살았는지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고, 신의를 가볍게 여기고, 불신을 심어 주어서 믿음이 가지 않는 생활을 한 것이 더 크게 생각납니다. 나는 전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많이 결심하고, 마음을 다잡기도 하였지만 말에서도 신의를 저버리고, 행동에서도 그렇게 보였으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현은 전혀 다르게 기만하고 산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비위만 맞추려고 했었던 것도 지금은 장작불 앞에 있는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그런데 나를 가장 부끄럽게 하는 것은 배운 것을 다시 익히기 위해서 전혀 노력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매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좋은 글이나 묵상을 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배우면서도 그 것은 그냥 지식이었던 것이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복음을 묵상한지도 벌써 25여년이 됩니다. 그리고 매일 묵상한 것도 18여년이 되고, 묵상한 것을 글로 쓴 것도 16년이 다 되어갑니다. 매일 반성하고, 주님께 용서를 빌고, 새롭게 살겠다고 결심하면서도, 내 행실이나 마음가짐이나 말은 전혀 변하지 않고 그냥 그 상태에서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엉터리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고 하셨습니다. 공부해서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가르치고,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서 알았으면, 믿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것을 게을렀던 것이 나의 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말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잘 표현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잘못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서 입을 다물고, 귀를 막고, 어떤 것은 아예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자식들에게도 잘못 가르치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직업을 택한 것도 나의 큰 교만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힙니다. 내가 믿지 못하고, 마음과 행동을 바로 세우지 못하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들어 올리고, 목말라 하시며 죽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반성하고 뉘우쳐도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오늘은 많이 부끄럽습니다.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4-10
형제 여러분, 4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10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축일3월 10일 성녀 마리아 에우제니아(예수의) (Mary Eugenia of Jesus)
신분 : 수녀, 설립자
활동 연도 : 1817-1898년
같은 이름 : 메리, 미르얌, 미리암, 에우게니아, 외제니, 유진
성녀 안나 마리아 에우게니아(Anna Maria Eugenia, 또는 마리아 에우제니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완전히 패배한 후 군주제가 회복된 1817년 프랑스 메스(Metz)의 경제적으로 부유한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Paris) 북쪽 교외의 한 성(城)에서 성장하였다. 그녀의 출생 배경은 그녀가 장차 프랑스 교회 전체에 새로운 영성적 길을 제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볼테르(Voltaire)와 자유주의의 신봉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정치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을 통해 마리아 에우게니아에게 풍부한 감수성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강한 의무감을 일깨워주었다. 가정생활을 통해 그녀는 지적 호기심과 낭만적인 정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폭 넓은 세계관을 키워갈 수 있었다.
뒤늦게 세례성사를 받은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축일 날 성당 미사 중에 별다른 마음의 준비도 없이 관행처럼 첫영성체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첫영성체는 미래의 비밀을 예언하는 놀라운 신비의 체험이었다. 그녀는 훨씬 뒤에 자신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로 완전히 돌아서기 전까지는 그 예언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청소년기는 행복했지만 전혀 괴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오빠와 젖먹이 여동생의 죽음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고, 허약한 건강 상태와 말에서 떨어진 일로 인해 심각한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힘든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배워 알고 있었다.
마리아 에우게니아가 13살이 되었을 때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모든 재산과 부동산을 잃었다. 게다가 여러 오해로 인해 부모님이 이혼하자 그녀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파리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마리아 에우게니아 역시 종종 어머니를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가정을 방문하곤 하였다.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아 15살 때 그녀는 어머니를 콜레라로 잃고 말았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세속적이고 천박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세속적인 즐거움과 경건한 삶의 좁은 길 사이에서 흔들렸다. 괴로움 중에 진리를 찾으며 때로는 절망하기도 한 그녀는 마침내 절대자에 대한 회개의 갈증을 느끼고 초월자에게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19살 때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 주교좌성당의 사순절 특강에 참석했다가 이미 설교자로서 그 재능이 잘 알려진 도미니코 수도회(설교자회)의 젊은 수도원장인 앙리 라코르데르(Henri Lacordaire)의 강론을 듣게 되었다. 라코르데르는 세상이란 특별한 장소에서 교회의 쇄신에 관한 환시를 본 라므네(Lamennais)의 제자였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했고 이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그는 젊은이들의 의문과 갈망, 이상주의, 그리스도와 교회 모두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강론 말씀은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가슴을 울렸고, 이를 통해 그녀는 그동안의 많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다. 동시에 수도 성소에 대한 소망이 일었다. 그녀는 완전한 회개를 경험했고, 그 순간 이후 자신의 모든 정신과 나약함까지도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런 순간에 그녀는 라므네의 또 다른 제자인 콩발로(Combalot) 수도원장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콩발로 신부는 그녀와의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꿈꾸어 왔던 수도회의 설립자로 예정된 한 선택된 영혼과 만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마리아 에우게니아에게 자신의 사업을 맡아주길 설득하며, 하느님께서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기 위해 그녀를 선택하셨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오직 교육에 의해서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만들어 당대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결국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콩발로 수도원장 신부의 인도를 받기 시작했다. 22살의 나이에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승천 수도회의 설립자가 되어 수도자들의 전 생애를 성화하기 위해 헌신하며 그들과 세상 안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1839년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다른 두 명의 젊은 여성들과 함께 파리의 생 쉴피스(Saint-Sulpice) 성당 근처 페루(Ferou) 길에 있는 한 공동주택에서 기도와 연학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41년에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부인과 앙리 라코르데르 수도원장, 몽탈랑베르(Montalembert) 같은 여러 지인들의 보호와 후원 속에 수도회의 첫 번째 학교를 개교하였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그녀가 설립한 수도회는 네 나라 출신의 16명의 수녀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로 성장했다. 그들은 옛 것과 새 것을 연결하기를 원했다. 즉 오랜 역사 안에 쌓여 있는 교회의 영성적 보화와 수도생활의 지혜를 현대인들의 요구에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교육과 결합하고자 했다. 이는 그 시대의 가치를 반영하는 문제였으며, 동시에 복음적 가치가 새로운 산업화와 과학의 시대에 부상하는 문화를 관통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강생의 신비에 중심을 둔 수도회의 영성은 깊은 관상과 사도직 활동에 헌신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찾아 나서도록 주어진 삶이었다.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생애에 대해서는 19세기 내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열렬히 사랑했고, 이를 수도회 역사의 활기 있는 한 부분으로 삼았다. 계속해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미래의 선물과 수녀회의 확장에 쏟아 부었고, 그것은 그녀의 평생의 사업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많은 수녀와 친구들을 보내주셨다. 초창기 회원 중 한 명인 테레사 엠마누엘(Teresia Emmanuel)은 아일랜드 출신의 신비가로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수도회의 공동 설립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엠마누엘 달종(Emmanuel d’Alzon) 신부는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1845년에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성모 승천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이 두 설립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로를 도와주었다. 또한 이 두 설립자는 우정뿐만 아니라 그들이 영감을 준 많은 평신도 협력자들이 수도회와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고 노동하며 수도자와 평신도들을 성모 승천의 길로 이끌며 많은 이들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자리 잡았다. 그녀가 설립한 수도회는 1888년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예수의 마리아 에우게니아 원장수녀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침묵과 겸손으로 지냈다. 그녀의 생애는 완전히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삶이었다. 1898년 3월 9일과 10일 오늘날의 파리에 속한 오퇴이유(Auteuil)에서 임종을 앞두고 노자성체를 받아 모신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온화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돌아갔다. 그녀는 1975년 2월 9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7년 6월 3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마리아 에우제니아(예수의) (Mary Eugenia of Jesus)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