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매일 주님을 만나고도
그럭저럭 성당에 다닌 지 69년이 흘렀습니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 동생들 손을 잡고 아주 어색하게 공소에 가서 무릎을 꿇고 공소예절을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고상(十字苦像)을 바라보며 눈물도 흘리고, 기도도 하고, 더듬거리지 않고 공과(公課) 책을 잘 읽는다고 사람들이 칭찬하는 소리도 듣고, 큰 미사에 참례하러 읍내 성당에 가거나 공소에서 판공성사가 있어서 신부님이 오시면 복사 선생님(지금의 사무장님)이 신부님 장백의, 개두포, 제의와 영대와 허리끈을 잘 챙기는 것을 보기도 하고, 신부님 복사를 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라틴어를 중얼거리며 연습도 하고 마냥 신기한 것뿐이어서 그렇게 좋아서 쫓아다닌 것이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 본당에 가끔 일을 봐주러 오시는 큰 본당 수녀님을 아주 좋아해서 수녀님을 만나려고 전화도 없던 시대, 70여리를 걸어서 무작정 가기도 하고, 교리문답 320조목을 모두 외웠다고 신부님이 무지하게 비싼 책을 상으로 주셔서 열 번도 더 읽고 지금까지도 자랑하면서 다니는 것이 내 신앙생활의 시작이었고, 모습이었습니다. 부활절을 참으로 많이도 지냈고, 먹은 달걀을 모아도 여러 판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웃기는 얘기지만 나는 아직도 주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주 자주 주님을 만나고 산다고 합니다. 정말 부러워서 못살 지경입니다. 한 번은 어느 목사님이 매일 주님과 얘기를 하면, 주님께서 일일이 그날의 일을 지시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주셔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주님하고 얘기하려고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주님의 얼굴도 본 적이 없고, 도란도란 얘기 해 본적도 없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하고, 이렇게 투자하면 이익이 볼 것이고, 이렇게 하면 병이 나을 것이고, 이쪽으로 가면 아주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고, 꿈에서도 복권을 사라고 해서 샀더니 당첨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부럽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하면, 은근히 속이 상하고 부아가 치미는 것입니다. 나는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유신정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시는데 기자들이 질문했습니다. “추기경님, 하느님 보셨습니까?” “아니오. 한 번도 못 봤습니다.” 그래서 나도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습니다. 그러시더니 추기경님은 갑자기 말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만나고 삽니다.” 그때는 추기경님이 젊게 보였으니 노망이 든 것은 아닐 것이고,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연탄을 배달하는 한 자매가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 언덕길을 오릅니다. 산동네에 연탄 한 장을 배달하면 2원을 받습니다. 200장을 싣고 언덕길을 오를라치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쉬려고 하면 뒤로 미끄러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밀어주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연탄이 묻을까봐 전부 피해갑니다. 좁은 길에 자동차는 빵빵거리며 난리를 피웁니다. 그런데 리어카가 갑자기 가벼워졌습니다.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은 중학생 하나가 가방을 목발에 걸치고, 나머지 손으로 리어카를 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언덕에 다 올라가자 가방을 다시 지고 흐르는 땀을 손으로 쓱 씻었는데 땀하고 연탄이 묻어서 까만 땀방울이 볼을 타고 내립니다. 그 연탄이 묻어 까만 땀방울 속에 주님께서 웃고 계셨습니다.” 추기경님은 그 내용을 잊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가 주님을 뵈웠습니다.”라고 마리아는 말합니다. 주님을 뵙기 위해서 피정에도 많이 참석하였고, 기도도 숱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울기도 많이 울었고, 하소연도 많이 하였습니다. 가슴을 두드리며 애걸복걸하기도 하였지만 한 번도 자상하게 얼굴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심 많이 서운했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생각하고 많이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주님을 마리아처럼 사랑했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향유 병을 깨트려 주님의 발을 씻어드릴 만큼 주님을 사랑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그 사랑 속에 주님께서 웃고 계시다고 했는데 나는 이웃이나 내 가족에게 정말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내 욕심이 지나쳐 억지를 부리고 있는 자신을 반성하였습니다. 억지를 부려도 주님께서는 아마 이렇게 나를 달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야고보야! 내가 언제나 네 곁에 있고, 네가 내 곁에 있으며, 내가 언제나 네 안에 살고 있으며 네가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그 안에 살고 있는데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심통을 부리느냐? 넌 참 욕심도 많다. 억지도 많다. 매일 속삭이듯 얘기하며 살자꾸나.”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36-41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축일4월 2일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Francis)
신분 : 은수자, 설립자
활동 지역 : 파올라(Paola)
활동 연도 : 1416-1507년
같은 이름 :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1416년 3월 27일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 코센차(Cosenza)의 파올라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어린 시절 산마르코(San Marco)에서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3세 때에 산마르코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면서 기도와 금욕과 겸손의 삶을 배웠다. 이는 그가 아기였을 때 한쪽 눈에 병이 나서 실명의 위험에 처하자 그의 부모가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전구를 청하며 했던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그 후 부모와 함께 로마와 아시시를 순례한 후, 15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영지인 파올라 교외에서 홀로 지내다가 바닷가의 한 동굴에서 6년 동안 기도와 금욕을 실천하며 은거 생활을 전념했다.
1435년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와 함께 생활하게 되자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는 작은 건물과 경당을 지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 동참하는 이들이 계속 늘면서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했고, 1454년경 코센차 교구의 대주교에게 허락을 받아 새로운 수도원 건물과 성당을 건축했다. 그들의 생활 규칙은 매우 엄격했는데, 극도의 청빈과 금욕을 실천하면서 겸손을 중요하게 여겼다.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1474년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로부터 ‘성 프란치스코의 은수자회’로 설립 허가를 받았고,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에게 수도회 설립을 승인받으며 그 이름을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Ordo Minimorum, The Order of Minims)로 변경했다. 그는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Sicilia)에 수도원을 세웠고, 수녀회와 제3회도 설립했다.
그의 생활이 거룩하고 엄격했던 만큼,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적인 영향 또한 지대했다. 그는 특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예언의 은사를 받아 1480년 이탈리아 남동부의 오트란토(Otranto)가 터키에게 점령당할 것과 나폴리(Napoli) 왕에 의해 탈환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시칠리아에 갈 때 뱃사공이 항해를 거부하자 자신의 망토를 깔고 한쪽 끝을 돛 삼아 동료들과 함께 메시나 해협(Strait of Messina)을 가로질러 항해하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카를 소생시켜 어머니에게 돌려주기도 했다. 이런 예언의 은사와 여러 기적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프랑스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갔다. 1483년 임종을 준비하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꼭 한 번 보기를 청했다. 루이 11세 왕은 성 프란치스코만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비록 온전히 치유되지는 못했지만, 루이 11세 왕은 큰 위로를 받고 만족해하며 임종을 맞았다. 국왕의 아들로 왕위를 이은 샤를 8세는 성 프란치스코를 흠모해 계속 머물러 줄 것을 요청했고, 그의 친구가 되어 프랑스의 여러 곳에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의 후반기 25년을 프랑스의 플레시(Plessis) 수도원에서 지냈는데, 마지막 3개월 동안은 투르(Tours)에서 고독하게 지내면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는 파스카 성목요일에 회원들에게 사랑의 실천과 엄격한 생활을 당부한 후, 다음날 총장 대리를 선출하고 영성체를 한 다음 요한 복음의 주님의 수난기를 들으며 1507년 4월 2일 조용히 선종하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여러 수도원에 나뉘어 묻혔고, 1519년 5월 1일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1943년 3월 2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해상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그가 행한 많은 기적이 바다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파올라의 프란치스코 (Francis)형제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