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6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9-15
9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진리의 증인이 되십시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든지 누구나 그것으로부터 방어태세를 갖습니다. 문을 잠그고 아무도 들이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있고, 높은 담을 넘어 들어오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장애를 설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결국 그 장애를 뚫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서양에 '아무리 성벽이 두꺼워도 깨지게 되어있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느끼는 두려움에는 장벽이 없는 것처럼 지금 제자들은 마음으로 느끼는 두려움에 처해있습니다. 몸으로 받을 위험을 마음으로 더욱 크게 느끼고 있는데 이 두려움을 물리쳐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이며, 평화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이 두려움을 멀리 쫓을 수 있습니다. 두려울 때 주님 함께 계시고 그 주님은 부활하신 분이시니 제자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 항상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부활하신 그 분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아 돌아가시게 만드는 두려움입니다.
아버지께서 주님을 우리 사이에 보내심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보내십니다. 우리를 악으로 몰아넣으며 죽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세상에 보내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두려움을 없애줄 성령을 주시며,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주님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증인은 참 어려운 일이어서 없는 것을 있다고 할 수 없고, 못 본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가 이루어집니다. 못 본 것을 철저하게 보고, 그리고 본 것을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확실하게 있음을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시고, 우리에게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시며, 제자들이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이르십니다. 우리가 용서 받지 못할 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는 사랑으로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극치이며 사제의 사죄권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표징으로 삼습니다. 그 것은 최종적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서 용서하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느 영화에서 보니까,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훔쳐 갔다고 하니까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다니느라고 혈안이 되어서 제자들과 같이 있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을 만나서 복수하려는 마음이 가득했다고 전합니다. 이는 영화의 얘기지만 아마 나 또한 시신마저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결코 없어진 시신을 찾기 전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토마스를 내세워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당시의 제자들이나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어보고, 상처를 직접 눈으로 보고 믿겠다는 정신은 좋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경영학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속담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재삼 확인을 강조합니다.
토마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분명 토마스보다 더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토마스는 바로 주님과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눈뜨면 보았을 주님을 그렇게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과 같이 생활하지 않았으니 더 비통해 하지도 않을 것이고, 지금 또한 실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덜 의심하니까 그만큼 신앙도 미지근할 것입니다. 마치 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는 많이 슬펐고, 친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덜 슬픈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멀게 느껴졌을 때 그냥 대충 믿게 됩니다. 그렇게 대충 믿음을 갖는 것이 바로 토마스의 경우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토마스를 비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토마스의 비통함과 간절한 사랑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토마스의 신앙이 부러울 것입니다.
토마스는 즉시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의심을 품었음을 용서 청합니다. 진정으로 토마스는 주님의 못 자국에 손을 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의심을 버리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지금도 부활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믿음을 가지기도 어렵습니다. 그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오늘 주님은 확실하게 설명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시신을 찾으러 다니느라고 성령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엉뚱한 것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속 에서도 엉뚱하게도 신앙을 다른 곳에서 찾고 하느님을 실제적인 세상에서 찾으며, 성령을 받지 못하면 결국 겉에서만 맴돌 수밖에 없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성령을 받아 그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분명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누릴 자격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보고 믿는 것과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사실 확인의 수준에서 머물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보지 않고도 확신을 가지고 믿음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권권복응'(拳拳服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윗사람의 말씀을 두 손을 마주 잡고 공손하게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면서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은 직장 상사의 말이나 본당 신부님의 말씀보다도 더 소홀하게 생각하고 지키지 않는 안일한 태도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13-21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13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4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최고 의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한 다음,
저희끼리 의논하며 16 말하였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들을 통하여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진 터이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17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
18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 그들은 백성 때문에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 하고 풀어 주었다.
그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축일4월 6일 성 마르첼리노 (Marcellinus)
신분 : 순교자
활동 지역 :카르타고(Carthago)
활동 연도 : +413년
같은 이름 :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에스파냐의 톨레도(Toledo)에서 태어난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교양 있고 관대하며 신학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의 국무장관이었다. 409년 황제는 북아프리카 교회의 한 이단 종파인 도나투스파(Donatism)에게 공적인 예배를 허용하는 자유를 준 적이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들은 이 허가를 악용하여 황제의 결정에 반대하던 정통교회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카르타고에 파견되어 가톨릭교회와 도나투스파 주교들의 회의를 주재하고 재판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성 마르첼리누스는 일련의 조사를 마친 후 도나투스파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정통교회로 돌아올 것을 판결했다.
하지만 그는 이 결정에 반대하던 이들에 의해 체포되고 감옥에 갇혔다. 그와 평소 가까운 친구였던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 주교가 그를 방문해 구출하려고 노력했으나 수포로 끝났다. 그는 도나투스파와 그 지지자들을 대적하기 위해 황제가 보낸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형제와 함께 참수되었다. 후일 황제는 그에 대해 ‘가장 훌륭한 기억을 안겨준 위인’이었다며 애통해했고, 가톨릭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선언했다.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그의 장례식에 추도사를 썼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413년 그의 저서 “신국론”(De ciavitate Dei)의 첫 권을 성 마르첼리누스에게 헌정했다. 그의 축일은 9월 13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마르첼리노 (Marcellinus)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