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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1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聖召)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한 날이다. 성소 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였다.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꾸준한 기도와 필요한 활동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일깨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치유하시며, 부활하신 성자의 영광을 빛나게 하십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모으시어,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아버지께 감사드립시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61차 성소 주일 담화 (2024년 4월 21일)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평화를 건설하라는 부르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해마다 성소 주일은 소중한 선물인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순례하는 백성의 일원인 우리가 당신 사랑의 계획에 참여하여 우리의 다양한 생활 신분 안에서 복음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라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 것은, 종교적 이상의 이름으로라도 부과할 수 있는 의무가 아니라, 행복에 대한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제일 확실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받은 선물들이 무엇인지, 우리가 그 선물들을 어디에서 열매 맺게 할 수 있는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사랑과 관대한 수용, 아름다움과 평화의 표징이자 도구가 되기 위하여 따를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발견할 때, 우리의 삶이 충만해집니다.
그러하기에 성소 주일은 언제나 신자들이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온 생애를 아우르는 부르심에 응답한 모든 이의 꾸준한 그리고 때로는 눈에 띄지 않는 노력을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저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거나 순간의 덧없는 유행을 좇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애로 특징지어지는 관계, 생명의 선물에 대한 개방성, 자녀와 그들의 성장을 위한 헌신을 통하여 자기 삶의 모습을 빚어가는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마음으로 자기 일을 해나가는 모든 이를 떠올립니다. 더 정의로운 세상, 더 연대적인 경제, 더 공정한 사회 정책과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애쓰고 있는 이들을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삶을 바쳐 공동선을 위하여 일하는 선의의 모든 사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침묵의 기도와 사도직 활동 안에서 주님께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모든 남녀 축성 생활자들을 떠올립니다. 이들은 때로는 사회 주변부에서 끊임없이 창의적으로 자신의 은사를 발휘하면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섬깁니다. 그리고 성품 사제직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 모든 이를 생각합니다. 이들은 복음 선포를 위하여 자신을 봉헌하고,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성찬의 빵과 함께 자신의 삶을 쪼개어 나누며,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모든 이에게 드러냅니다.
저는 젊은이들에게, 특히 교회에 거리감을 느끼거나 교회를 불신하는 이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당신께 이끄시도록 내맡기십시오. 또한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이 생각한 중요한 질문들을 예수님께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현존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제기하시는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이 도전은 우리에게 언제나 건강한 위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강요하시지 않고 제안하십니다. 예수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가운데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청하실 때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내어 드리면서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정 중에 있는 백성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인정하고 동행하는 다양한 은사와 성소가 어우러진 다성 음악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살아 있는 돌들인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이자 서로 형제자매인 대가족의 일원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두어 둔 외딴섬들이 아니라 더 큰 전체의 일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소 주일은 시노달리타스의 특성을 지닙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다양한 은사들을 인정하고 성령께서 모든 이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이끄시는 곳이 어디인지 식별하고자 서로 경청하고 함께 걸어가라고 부름받고 있는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우리는 2025년 희년으로 나아가는 공동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희망의 순례자로서 성년(聖年)을 향하여 함께 나아갑시다. 성령께서 베푸시는 다양한 선물 가운데에서 자신의 성소와 그 자리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꿈을 알리는 전령이자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으로 또 애덕과 협력과 형제애의 유대로 결합된 한 인류 가족을 꿈꾸십니다.
성소 주일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아버지께 거룩한 성소의 선물을 청하는 기도에 특별히 봉헌된 날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아시다시피, 기도는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보다 하느님 말씀을 귀여겨듣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이야기하시며 그 마음이 열려 있고 진실하며 너그럽기를 바라십니다. 주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을 전부 드러내 주십니다. 희년을 준비하며 기도에 전념하는 올해, 우리 모두는 주님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희망의 순례자가 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이 더없는 축복임을 재발견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기도는 희망의 첫 번째 힘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희망이 자라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기도가 희망으로 가는 문을 열어 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편에 희망이 존재하지만, 그 희망에 이르는 문은 나의 기도로 여는 것입니다”(수요 일반 알현 교리 교육, 2020.5.20.).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
그런데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순례에 나서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적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언제나 그 목적지를 마음과 정신에 새겨 두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지에 다다르려면, 모든 걸음을 집중하여 내디뎌야 합니다. 곧, 자신을 짓누르는 짐들을 없애고 꼭 필요한 것만 들고 가벼운 상태로 여행하며 날마다 온갖 피로, 두려움, 불안, 망설임을 떨쳐 버리고자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날마다 다시 길을 나서는 것,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 피로와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눈앞에 새로운 지평과 미지의 경관을 펼쳐 놓는 그 여정의 다양한 단계들을 따라가는 데에 필요한 열정과 힘을 되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순례의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자양분을 얻는 내적 여정에 힘입어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순례는 목적 없는 여행이나 정처 없는 방황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날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곧 평화와 정의와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걸음을 내딛으려고 노력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며 이를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기에,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입니다.
모든 성소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희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개인으로서 또 공동체로서 다양한 은사와 직무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시대적 도전들에 직면해 있는 이 세상에 희망의 복음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몸과 마음을 다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시대 변화에는 산발적인 싸움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지려는 불길한 조짐, 더 나은 미래를 찾아 고향 땅을 벗어나 피난하는 이주민들의 대열, 가난한 이들의 지속적인 증가, 지구의 안녕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해치는 위협 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 외에도,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으로 우리는 때때로 체념이나 패배주의에 빠질 위험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으로 가득한 안목을 길러,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응답하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면서 충실히 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 이러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이 희망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에서 비롯되었고 주님께서 모든 이 저마다의 마음 안에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마음’ 안에서 성취하기를 바라시는 구속 사업에 우리가 동참하게 해 줍니다. 이 희망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추진력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죽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또다시 곳곳에 부활의 싹이 돋아납니다. 이는 막을 수 없는 힘입니다. 가끔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고질적인 불의와 사악함과 무관심과 잔인함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어떤 것이 생명의 싹을 틔우고 언젠가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복음의 기쁨」, 276항).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거듭 말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성취된 구원은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에 힘입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도전들에 맞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희망의 순례자이며 평화의 건설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였고 살아가고자 하는 성소 안에서 우리의 모든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인식을 가지고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반석 위에 기초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 길에서 실패도 걸림돌도 생겨날 수 있지만 우리가 뿌리는 선의 씨앗은 소리없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최종 목적인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그리고 형제애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기쁨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궁극적 소명을 우리는 날마다 미리 맛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들과 이루는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바로 지금도 우리는 일치, 평화, 형제애를 향한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부르심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유한 생활 신분에서 나름대로 작은 방식으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희망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투신할 수 있는 용기
이에, 제가 리스본 세계청년대회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자 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잠에서 깨어납시다. 우리가 저마다 교회와 세상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성소를 찾고 희망의 순례자이며 평화의 건설자가 될 수 있도록, 무관심을 뒤로하고 우리 스스로를 가두어 놓곤 하는 감옥의 문을 열어젖힙시다!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집시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곳에서 살아가고 있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에 투신합시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투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집시다!”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의 사도로서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섰던 오레스테 벤치 신부는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고 무엇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부유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가신 것처럼 우리 또한 기쁨의 전령이자 새 생명의 원천, 형제애와 평화의 장인이 될 수 있도록, 모두 일어나 희망의 순례자로서 길을 나섭시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4년 4월 21일
부활 제4주일
프란치스코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41127?gb=K1200 ]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2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일4월 21일 성 안셀모 (Anselm)
신분 : 대주교, 교회학자, 철학자
활동 지역 :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 연도 : 1033-1109년
같은 이름 : 안셀름, 안셀무스, 안쎌모, 안쎌무스
1033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Aosta)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안셀무스(Anselmus, 또는 안셀모)는 15살 되던 해에 수도원에 입회하려고 했으나 부친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1056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Bourgogne)로 공부하러 집을 떠났고, 1059년에는 노르망디(Normandie)의 베크(Bec)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 학교에서 수학했다. 당시 수도원 원장은 란프랑쿠스(Lanfrancus)로 성 안셀무스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1060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정식으로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1067년에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성 안셀무스는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서 많은 작품을 저술했고, 윤리 교육과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 학교로 발전시켰다. 1078년에 수도원 원장이 된 그의 박학다식함과 성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많은 청년이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한곳에서 교육할 수 없어 프랑스와 영국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영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성 안셀무스는 란프랑쿠스가 사망한 뒤 영국 왕 윌리엄 2세(William II Rufus)에 의해 1093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성 안셀무스는 이때부터 적지 않은 분쟁에 휩싸였다. 영국 국왕의 교회 직무에 대한 간섭에 반발하고 교황의 권위를 위해 투쟁하며 성직자들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국왕은 물론 다른 많은 주교로부터도 배척을 받게 되었다. 성 안셀무스는 1093년까지 베크를 떠나지 않고 국왕 윌리엄 2세와 격렬한 논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1097년 영국을 떠나 로마로 망명길에 올랐다.
교황 복자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7월 29일) 역시 윌리엄 왕의 요구를 반대하자, 윌리엄은 성 안셀무스를 유배시키겠다고 위협했으나 끝내는 성 안셀무스의 귀국을 허용하였다. 1098년 복자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요청에 따라 성 안셀무스는 바리(Bari) 공의회에 참석하여 성령을 두고 벌인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필리오퀘'(filioque) 논쟁을 조정하는데 큰 몫을 했다. 1100년에 윌리엄 2세 국왕이 사망하자 성 안셀무스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또다시 윌리엄의 후계자인 헨리 1세(Henry I)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 1103년에 다시 로마로 망명길에 올랐다. 1102년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공의회에서 성 안셀무스는 노예 매매를 극렬히 비난하였다.
그는 영국 국왕을 상대로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으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 당시에 위대한 신학자요 ‘스콜라 학파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고 있었다. 그는 계시와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파의 변증법에서 이용하는 이성주의를 신학에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한 “독어록”(獨語錄, Monologion)의 저자이다. 이 사상은 후대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데카르트(Descartes) 그리고 헤겔(Hegel)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 안셀무스의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는 중세의 강생에 관한 신학 논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작이다. 그의 저서 중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De Fide Trinitatis), “동정녀 잉태론”(De Conceptu Virginali), “진리론”(De Veritate) 그리고 400여 통의 편지와 기도 및 묵상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다. 그는 1109년 4월 21일 성주간 수요일에 캔터베리에서 선종했다. 그는 1492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720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단테가 신곡의 천국 편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성 안셀무스를 언급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다. 성 안셀무스의 상징으로는 주교 복장이나 교회의 영적인 독립을 표현하는 배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안셀모 (Anselm)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