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방은 요즘 주말이면 기타를 ‘두들긴다’. 차마 기타를 연주한다는 표현은 도저히 못 쓰겠다. 그야말로 혼자 기타를 두들기며 아주 가끔이지만 뜬금없는 고성방가로 박서방 서식지 주변을 시끄럽게 하기도 한다. 혹시나 박서방 이웃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곤란한 노릇인데 실은 몇차례 옆 집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다. “박서방님, 혹시 어디서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려오지 않았나요?”(박서방 이웃) “예, 조금 전까지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 어느 집에서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았었나 봅니다.”(박서방) 박서방의 터무니없는 무마 전략이 먹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아직까지 고소고발 안 당하고 무사히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박서방의 기타는 소위 재즈기타라고 불리는 세미할로우바디 일렉트릭 기타다. 이렇게 얘기하면 무지하게 거창하게 들리는데 간단하게 얘기해서 흔히 어쿠스틱 기타라고 불리는 통기타의 특성과 흔히 전기기타라고 불리는 일렉트릭 기타의 중간 형태의 모델이다. 아주 어릴 때는 주로 일렉트릭 기타로 시끄러운 록음악을 연습했고 약간 자란 다음에는 어쿠스틱 기타로 민중가요를 따라 불렀던 박서방이 대충 배가 불룩 나올 무렵 이런 형태의 기타를 구한 이유는 박서방이 최고로 좋아하는 음악 장르인 블루스(Blues)를 연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박서방이 그토록 사랑하는 블루스는 재즈와 록큰롤 음악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그 탄생 기원을 살펴보면 무척 비극적이다. 근현대 초반,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강제로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로 끌고 간 것이 블루스가 만들어진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의 비인간적 폭력과 억압 속에서 순식간에 비참한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백인들의 악기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흑인영가와 블루스의 출발이다. 블루스는 아메리카라는 낯선 지역에서 부딪친 흑백의 두 가지 음악 문화가 화학적으로 결합된 결과라 하겠다. 블루스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고향을 그리는 망향의 노래였으며 고단한 삶을 달래기 위한 해원의 시였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견뎌내는 영혼의 그루브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블루스와 블루스에서 파생된 다양한 흑인 음악들은 1960년대 중반까지도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는 금기시 되었다. 이는 계층 간의 거리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음악 자체의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청교도의 영향이 강한 미국 사회에서 블루스는 ‘악마의 음악’으로 취급당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원색적이고 섹슈얼한 리듬감과 기존 서양음악의 화성학에서 벗어나 있는 음계 구조 때문이다. 간단하게 얘기해서 서구인들이 듣기에는 무척 ‘낯선’ 음악이었기 때문이란 얘기다. 낯선 것을 사악한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대전 부르스 노래비 /대전역
물론 블루스는 아프리카 음악의 영향을 받았지만 온전히 아프리카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탄생부터 알게모르게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음악의 영향이 쉼없이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근엄한 표정의 백인 중산층 가부장들은 블루스를 백안시 했지만 그들의 반항적인 자식들은 부모 몰래 블루스 레코드를 들으며 기타를 튕겨댔고 그런 이들이 나중에 버디 홀리(전설적인 백인 록큰롤 연주자)와 비틀즈가 되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한국의 대중음악으로 오면 블루스도 있지만 그보다 압도적으로 존재했던 ‘부르스’의 존재를 만나게 된다. 원조 블루스보다 먼저 들어온 부르스의 존재는 일제의 흔적이라고 하겠다. 19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부르스는 음악적으로 보면 일본 가요의 음계 구조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고전적 블루스 형식의 영향은 그다지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음악들이 ‘부르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박서방의 짧은 지식으로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상상컨대 블루스와 유사한 느린 리듬감과 더불어 정서적 유사성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의 1930년대는 한국의 1960, 1970년대와 유사하게 위로부터의 급속한 근대화가 이뤄지면서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많았던 시기다. 이런 시대 상황을 감안하자면 일본식 부르스도 정통 블루스와 마찬가지로 다분히 망향과 애환의 정서에서 출발한 음악인 것이다.
** 그 무렵 일본에서 '적과 흑의 부르스'라는 부르스가 유행했었다. 1955년도에 鶴田浩二(쯔루다 코지)라는 가수에 의해 발표된 곡인데 미국의 유명한 섹스폰 연주자 실오스틴이 일본에 공연차 왔다가 이 곡을 연주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 註 : 무애자
이 영향을 받은 한국의 부르스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굴곡많은 한국 현대사 덕분(?)인지 몰라도 수많은 ‘… 부르스’가 만들어졌다. 한국의 수많은 부르스 중 절창이라고 할만한 안정애의 노래 - 대전부르스(1959년) - 만 봐도 이런 음악의 정서가 잘 배어나오는데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로 시작해서 “부슬비에 떠나가는 목포행 완행열차”로 마무리되는 이 노래는 기차역을 배경으로 헤어지는 두 사람의 이별을 그리고 있다.
가요라는 장르의 특성을 못 벗어난 두 남녀의 신파조 이별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 신파조가 대중들에게 폭넓은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은 개인들에게 수많은 이별의 상처를 안져주었기 때문이다. 다소 장광설을 섞어 말하자면 전쟁이라는 가장 폭력적인 형태로 한국의 대중들에게 다가왔던 근대와 훼손당한 전근대가 엇갈리는 지점에서 ‘대전부르스’가 만들어지고 불려진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런 부르스의 정서에 대해 공권력은 ‘퇴폐적’이라는 훈장을 달아주기도 했다.
대전역 가락국수
한편, 1980년대 초반 한 시인은 부르스의 정서를 시에 담기도 했다.
대인동 부르스 / 곽재구
추석달이 밝은데
비인 거리에 너는 그림자를 띄웠느냐
콜타르 먹인 전신주 아래
다리 꼬고 턱 받치고 꼭 그렇게
눈물 나는 모습으로 서서 너는 다시
이 거리의 슬픔으로 가을 달맞이꽃이 되려느냐
부평에서 반월에서 구로동에서
이름도 얼굴도 때묻은 젖 큰 가시내들은
고향이라고 명절이라고 다들 밀려오는데
전세버스의 차창마다 깨꽃 같은 그리움은 피었는데
네가 설 땅이 꼭 한 곳뿐이라고
너는 그 전주 아래 슬픔의 뿌리를 내리고 굳었느냐
그 무슨 한맺힌 기다림의 씨앗이라도 뿌렸느냐
어색하게 스타킹을 신고 원피스를 입고
사과 광주리 설탕 한 포 입어보지 못한
어머니의 겨울내복을 사 들고
아버지의 소주와 동생의 운동화와 그림물감을 사 들고
저렇듯 돌아오는 때절은
가시내의 웃음소리가 그리웁지 않느냐
추석 달빛은 찬데
대인동 골목마다 찬 달빛은 출렁이는데
굳어 버린 너의 몸 위에 누가
창녀라고 낙인을 찍겠느냐
누가 한 오리 저주의 그림자를 드리우겠느냐
가까운 고향도 눈에 두고 갈 수 없어서
마음만은 언제나 고향 식구들 생각이 뜨거워서
홀로 들이켠 수면제 가슴 젖어오는데
추석 달빛은 차고 어머니는 웃고
너는 뜬 두 눈으로 달맞이꽃으로
대인동 골목마다 죽어서 살아 있는 눈물이 되었구나.
지금은 사라졌지만 대인동은 광주의 오랜 사창가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정책 속에서 붕괴된 농촌의 소녀들은 대거 도시로 유입되었고 대인동은 그녀들이 내몰렸던 최악의 장소 중 하나였다. 물론 어디 대인동 뿐이었으랴. 가장 크게는 청량리, 미아리가 있었고 완월동(부산)과 자갈마당(대구), 옐로우하우스(인천)가 있었다. 명절이 와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그녀들을 위한 시인의 노래는 부르스의 신파를 따르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이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과 공명하며 신파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 쯤에서 자문해보게 된다. 박서방이 연주하고 싶은 것은 블루스인가, 부르스인가? 블루스와 부르스가 과연 정말 다른 것일까? 왜 누군가는 희망의 세기라고 일컫는 21세기에 박서방은 영혼의 상처와 위안의 음악인 블루스, 혹은 신파조의 부르스에 미친 듯이 끌리는 걸까? 돌아갈 고향은 재개발로 사라진지 오래이며, 뼈 아픈 이별을 말하기엔 관계의 진정성은 눈 녹듯 녹아내린지 오래인데 말이다. 어찌되었건, 비는 내리고 막걸리 생각은 간절하다. 부르스(블루스) 연주자여, 그 음악을 ‘당분간은’ 멈추지 말아다오.
** 공감 가는 글 차분히 풀어 주신 이 글의 작자 ' 박서방님께 감사드립니다.
쯔루다 코지의 '적과 흑의 부르스'는 다른 곳에서 가져왔고 일부만 게재하신 곽재구 시인의 '대인동 부르스' 역시 전문(全文)을 밑에 그림과 함께 가져다 덧붙였습니다.
- [옮긴 이] 무애자
첫댓글
장사익의
노래는 언제 들어봐도
심금을 울립니다.
고운 음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방장님
대전 부르스 - 안정애. 장사익
안정애님과 장사익님이 각각 부른 영상 잘 봅니다 ㅎㅎ
맛깔스럽게 잘 불르주셨습니다 ㅎㅎ
정성이 가득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방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