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과 지혜 함께 닦아야 행복한 삶 가능
현지스님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편안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마음은 편하지만 몸이 편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몸도 마음도 모두 편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몸과 마음이 모두 다 편안한 사람이 있다.
복을 많이 지은 범부들은 재물에는 궁색함이 없어
몸은 편하나 삼악도를 벗어나지 못해 마음은 불안하다.
아라한은 공덕을 닦은 것이 없어
걸식해야 하나 삼악도는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편안하지만 몸이 편하지 않다.
범부가 복을 닦지 않으면 재물도 궁하고
삼악도도 면하지 못하니 몸과 마음이 모두 편하지 않고,
아라한이 공덕을 쌓으면 공양이 궁색하지 않고
삼악도를 벗어나서 몸과 마음이 함께 편하다.
수행자는 항상 도 닦음과 동시에 공덕을 쌓아야 한다”
마음과 육신의 자유,
그것은 조화로운 삶의 영위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니라.
그러면 21세기 한국불교의 조화로운 모습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유가(儒家)는 패밀리즘이라는 편협성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패밀리즘을 포기하지 않는다.
불교의 발전은 수행과 공덕의 두 덕목을 바탕으로 한
승가사회의 화합정신의
회복 여부에 달려있다고 본다.
지금 세상은 다가오는 세기의
생존 전략에 절치 부심하고 있다.
어떤 분야이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도 하나의 산업(심성산업)으로 자리 잡는다.
자유롭고 직관적인 영감이 필요하고 정치,
사회적인 변화를 예의주시 할 줄 알아야 한다.
미래의 계급, 또 인간의 성공은
과잉된 정보처리 능력으로 좌우될 것이라 한다.
세포가 모여 조직이 되면 조직은 기관이 되고
비로소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몸의 각 부분은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움직인다.
모든 세포가 평등하고 자유롭지만
최상의 상태로 살아가는 공동의 목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 태어나는 데에는 나름의 부여받은 이(理)가 있어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덕(德)이 생긴다.
행동양식을 보면 덕을 아는 것이다.
사자가 들소를 잡아먹을 때,
몇 마리가 어미소를 유인하면 나머지는 새끼들소를 덮친다.
그런데 들소들이 진을 쳐서
사자가 공격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덤벼보지도 않고 돌아선다.
자연환경에서 생활하려면 사자로서의
엄청난 지모와 지략의 덕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조화로운 사회, 그것은 공생의 원리이다.
로마는 포용성과 개방성으로
도시 국가에서 세계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흥분이 아니라
역시 보이지 않는 지루한 것이다.
그 지루함을 감내하는 것,
그 보이지 않는 허령한 것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나를 끊임 없이
나를 넘어선 허무로 내던진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고고한 이상을 품은 자가 아니면
감당해 낼 수 없는 것,
이 덕을 우린 갖추어야 한다.
초월성보다 내재성이 훨씬 어렵고 본질적인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인 해탈은
인간세의 모든 것이 고(苦)이고
그 고는 집착에서 비롯되므로
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집착을 끊어야 하는 것인데,
그 집착은 스스로의 굴레 아닌가.
티벳의 성자 밀라레빠는 기도한다.
“내가 지어낸 생각이 도리어 나를 구속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현자는 항상 평이한데 거(居)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것을 행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지 않던가.
잠시라도 떠날 수 있다면 도(道)가 아니다.
그래서 일상성은 어렵고 아름답다.
여름의 것과 무게를 달리해
청명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하루가 중간에서 밝은 소리를 내며 부러져 버릴 것만 같다.
나무잎이 빛을 흔든다. 한가위다
모셔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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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 관세음보살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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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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